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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 (요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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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오직 한 길 

본 문: 요한복음 14:6

‘독선’(獨善)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나쁜 단어입니다.‘독선’이란 “자기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고 여기거나 주장하는 심리 상태나 태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교회 새가족 교재가운데“협동 정신이 없이 독불장군식의 봉사는 언제나 일을 하고도 욕을 먹게 됩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저 사람은 참 독선적이야”라는 말을 듣도록 살아가면 안 됩니다. 관용과 융통성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독선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세계에서 독선이 없으면 그것은 이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인 요한복음 14:6에“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것이, 여러 길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것이 여러 길 가운데 가장 좋은 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것은 오직 한길 즉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구원 얻는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며,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는 교리(敎理) 혹은 교의(敎義)를‘도그마"(Dogma)라고 하는데 이 도그마는‘독선’이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교리에 독선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참 신앙도 아니고, 참 신자도 아닙니다. 참 신앙, 참 진리에는 반드시 독선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의 독선은 화가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있어서의 독선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을 위한 염려와 근심은 마음 밭의 가시떨기가 되어 결실하지 못하게 합니다(마태복음 13:22). 그러나 영혼을 위한 염려와 근심과 주님의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66:10~11에“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와 고락을 함께하는 사람에 대한 축복의 약속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있어서의 독선은 거룩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몇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一.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이십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전능하신 신이십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이사야 16:9에 말씀하시기를“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사야 13:11에는“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있어도 그것은 잡신이요, 마귀 사탄인 것입니다. 잡신은 곡식의 잡초와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오직 하나님”이라는 독선적인 신앙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죄 중에 가장 무서운 쇠가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고 숭배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신의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는 살인죄나 간음죄나 도적질하는 죄보다 하나님 앞에 훨씬 더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0계명 중에서 제일 첫 번째 계명이“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하셨습니다. 둘째 계명도“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은 왕은 모두가 유일신 하나님만 섬기며 우상을 타파하는 왕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인류의 역사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후진국이 되거나 가난한 나라가 없습니다. 선진국은 모두가 기독교 국가입니다. 하나님을 섬긴 후 복을 받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과 기후조건의 호불호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는 하나같이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름진 땅 북미나, 동토의 땅 덴마크나 스웨덴 등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나라는 모두가 국민소득 3만~7만 불이 넘는 부요한 나라가 되어 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교회당을 불사른 공산주의 국가 가운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1917년 레린은 혁명을 일으켜 1000년 동안 열렸던 교회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공산당 당사와 노동자 숙소, 심지어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때 미국은 20만개의 교회를 가지고 세계 선교에 힘썼습니다. 

소련은 자기들의 나라가 붕괴된 원인을 각 분야 전문가 100명에게 3년 동안 연구하여 발표하게 했습니다. 총 한방 쏘지 않고, 내란도 없었는데 왜 망했습니까? 그것은 본인들 뿐 만아니라 모두가 궁금한 일입니다. 연구결과 첫째는, 내부분제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 소련의 공산당 지도자는“교회 문을 닫으니 모든 문이 닫혔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불교국가 가운데 선진국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단 한 나라도 없습니다. 이슬람 국가 가운데 선진국이 있습니까? 단 한 나라도 없습니다. 선진국은 모두가 기독교 국가들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를 비추는 하늘의 태양 빛은 백 년 전에도 있었고, 이백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백여 년 전 이전을 가리켜 암흑기라고 합니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저는 백 년 전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한국이 어떠했는지 모릅니다. 당시 계셨던 분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 분들이 그 사회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와서 40년간 수고하신 아치볼드 캄벨이라는 분이 글을 쓴 것이 있습니다. 그분이 서울 장안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사람들이 여자를 천대하여 자기의 딸을 팔아먹고, 아내를 천대하여 거리에서 머리채를 끌고 다니고, 아내는 매를 맞고, 의사는 먹고 살기 위한 상술로 환자를 대하고 있으며, 문둥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소경과 거지들이 거리에 우글대는 서울 장안이다.”

우리나라에 개화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암흑이 물러가고 새로운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는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4:6의“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신 생명의 복음 즉 기독교가 선교사들에 의해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를 가리킵니다. 그로부터 학교가 세워지고, 문맹퇴치 운동이 일어났으며, 병원이 세워졌습니다. 이로 인해 오늘처럼 발전된 대한민국, 세계속의 한국이 되었습니다. 


二. 구세주(救世主)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본문인 요한복음 14:6에“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주님이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사도도행 4:12에“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만 구세주라고 믿는 독선은 꼭 필요한 거룩한 독선입니다. 이 독선이 없는 신앙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요즘 종교다원주의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란 모든 종교에는 다 같은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모 신학자는 신학대학교 학장으로 있으면서 말하기를“마리아가 낳은 예수가 우주적 그리스도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어도 구원 받는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면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변선환 교수)라고 했습니다. 

또한 후기근대주의(Post-modernism)는 그리스도의 구속도 그리스도의 부활도 부인하며 성경의 진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사탄의 사상입니다. 심지어“사신신학”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죽었다고 합니다. 또한 여성신학은“하나님은 여자였다.”라고 하면서“하나님 아버지”가 아닌“하나님 어머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5~11에“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십니다. 이사야 7:14에 예언하시기를“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성취에 대하여 마태복음 1:18에 말씀하시기를“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자 우리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29에“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3:23~26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5에“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종교의 교주가 무덤에서 살아났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기독교의 유일한 자랑은 부활하신 주님의 빈 무덤입니다. 인간의 최대의 난제를 해결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부활하신 빈 무덤은 역사입니다. 

이 부활은 우리들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에“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독선의 반대인 관용이 중요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용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관용이란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인격 요소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있어서는 관용이란 있을 수 없는 특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2더하기 2는 4라는 답 외에 다른 답은 없습니다. 2더하기 2는 9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9라는 답에 동의하지 않고 정확한 답이 4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관용이 없는 사람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문제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누구나 남의 의사를 존중하고, 그의 권리를 귀히 여기며 들어 줄 수 있는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 모순되는 것을 포함한 모든 관점까지 똑같이 옳다고 찬성하라는 관용에는 얽매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三. 복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복음이란 헬라어로는“유앙겔리온”(Euaggelion) 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복된 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우리의 선행이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대속의 피를 흘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말합니다. 로마서 3:23에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3:28에도“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 복음을 변절시키려는 이단이 생겨나서 사도 바울이 이를 엄하게 책망했습니다. 갈라디아서 l:7~9에“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강조한 사도 바울이“다른 복음을 선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믿지만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 개혁을 단행할 때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붙인 항거문은 95개 조항이지만 가장 기폭제가 된 것은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면서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면죄부”를 팔면서“면죄부를 사면 지옥의 고통을 면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사제들은 고행을 통해 죄가 없어지고 자기 영혼이 구원을 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높은 계단에 자갈과 굵은 모래를 뿌려놓고 맨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는 계단마나 입을 맞추며 올라갔습니다. 이는 복음의 이치를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래전에 상영되었던“미션”(Mission)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가운데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과는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복음적인 영화는 몇 년 전 우리가 함께 보았던“The Passion of the Christ”입니다. 

마틴 루터가 성경을 연구하다가 복음을 깨닫고 종교 개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한 사상은 네 가지로 요약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원은 오직 유일하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본문인 요한복음 11:6에“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4:12에도“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교황이나 신부가 죄를 사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면죄부를 산다고 하여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유일하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독선입니다. 

둘째는 “오직 성경”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back to the Bible)입니다. West minster 신앙고백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과 생활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권고는 성서에 명확히 적혀 있다...그러므로 성서에는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 인간의 전승에 의해서든 아무것도 추가 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셋째로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길은 오직 믿음입니다. 절대로 고행이나 사제나 교황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터가 강조하는 것은“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로마서 3:10~12에 “의인은 없나 니 하나도 없으며...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22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선행이나 고행이나 율법을 지킴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16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 외에 행위나 선행이나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고 하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며 이단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아 누리고 또한 하늘나라에서 면류관과 상급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능력 받고 은사를 받는 것은 간구할 때 성령을 통해서 받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순간 즉시 받습니다. 그러나 성결 즉 거룩해지는 것은 점차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오직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구원받아 천국에 늘어가는 것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고 천국에서 면류관과 상급을 받는 것은 심은 대로 행한 만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구원은 오직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9의 말씀이 복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믿음”이나“은혜”나“선물”은 모두 값없이 거저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며 주장한 이 네 가지는 복음의 핵심내용입니다. 이것은 타협할 수도 없고 양보할 수도 없는 거룩한 독선입니다. 이러한 독선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오직 예수”“오직 성경”“오직 믿음”“오직 은혜”는 복음의 핵심내용입니다. 마틴 루터는 중세기 암혹의 장막을 걷어치우고 복음의 생명을 다시 살아나게 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내일은 설날입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함께 만나는 즐거운 명절입니다. 하지만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은 우상 앞에 절을 하며 복을 비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의 수가 해마다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먼저 믿는 신자들이 본이 되지 못하므로 실망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13~16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소금은 자기 자신을 녹여 없어지므로 음식의 맛을 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두음을 밝히는 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태워 없어지므로 주위를 환하게 밝힙니다. 소금과 빛이 되려면 양보하고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이웃에게 “착한 행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을 모르는 저들이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평양의 악명 높은 깡패 두목 김익두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날에 시장가는 사람들은 산 고개를 넘으면서, 부디 오늘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서낭당에서 빌고 갈 정도였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외국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훗날 목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어느 날 한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고자 산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더워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웃옷을 벗고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술이 건아 하게 취한 한 사람이 비틀거리면서 올라왔습니다. 그 사람이 김익두 목사님께 오더니 시비를 거는 것이었습니다. “왜 당신이 내 앞서 먼저 여기 올라 왔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어의가 없어 말대답을 하지 않자, 이 술 취한 사람은 김익두 목사님을 이유 없이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맞고 있었습니다. 힘이 없어서 맞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천하의 주먹 김익두가 이처럼 말없이 맞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한참을 때리더니, 이 사람이 때리던 것을 멈추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묻기를 “형님 다 때렸소?” 그랬더니, 이 사람이 “다 때렸다 왜?”하고는 또 때리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 때 김익두 목사님이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내가 김익두라는 사람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 사람이 김익두라는 말을 듣자 안색이 변하며 벌벌 떠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김익두 목사님이 하는 말이 “내가 예수 믿기 전이라면 당신 오늘 장례식 날이요, 내가 예수 믿은 덕에 당신이 오늘 살아남은 줄을 아시오.”라고 했습니다. 이때 이 사람이 머리를 땅에다 대고 “형님, 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무얼 어떻게 해, 따라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부흥회를 인도하는 교회에 데리고 가서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 사람이 훗날 예수 믿고 훌륭한 장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먼저 예수님을 만난 김익두 목사의 변화된 삶, 자기 양보의 삶, 자기희생의 삶이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설명절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리빙스턴은 인종과 문화가 전혀 다른 미개한 나라 아프리카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고자 일평생을 보냈습니다. 

비록 힘이 들고 마음에 맞지 않지만 그까짓 명절 며칠이야 못 참하겠습니까? 거짓 웃음을 웃어도 우리 몸에 절반의 효과가 있다고 하듯, 거짓으로라도 명절 며칠 동안만 빛으로 소금으로 희생하시며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눈치 어두운 시댁식구들은 감동을 받습니다.“아! 예수 믿으면 저렇게 변화가 되는 구나!”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일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한길, 믿음과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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