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자기을 비우며 살 수 없을까 (고전 7:29~31)

  • 잡초 잡초
  • 328
  • 0

첨부 1


자기을 비우며 살 수 없을까 (고전 7:29~31)

       
용산철거민 사건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갈데가 없는 사람들, 철거를 해야 하는 사람들, 생존권과 도시개발과 무엇이 우선인가를 많이 생각하게 하는 한주간이 었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 조금 더 기다려 줄 수는 없었는가? 왜 하필이면 이 추운 겨울날 철거민들을 몰아내려고 했는가? 몇 달 더 기다리면 봄이 오고 그러다 보면 대화도 되고 길도 찾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집니다. 성급함이 화를 불러옵니다. 강한 자들이 강한 힘을 휘두르면 힘 없는 자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힘없는 자들을 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닮았으면 합니다.

장신대 총 동문 모임이 모이는 경주에서 자동차를 몰고 오면서 남을 배려 하는 마음이 없음을 회개했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 까지 또 깨닫고 또 배우고 또 깨닫고 그렇게 완성 되어 가는가? 봅니다. 차를 몰고 오는데 옆에서 승용차 한데가 홱 지나가는데 어찌나 빨리 가는지 마음속에 아이고 저것 왜 저렇게 빨리 달려, 가다가 사진이나 팍 찍혀라 하는데 성령이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얘 저 사람이 달리면 과속이고 네가 달리면 한번 달려 본거냐? 너는 과속한적 없어. 네가 과속 할 때도 팍 찍혀라 하냐? 할 말이 없어요. 그리고 왜 그리 내 마음이 사악한지 부끄럽습니다. 회개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그렇게 살 때가 많지요. 내가 끼어들 때는 상대가 양보를 안 하는 것 같고 상대가 끼어들 때는 dia체 같이 느껴지고 그래서 더 바짝 차를 대고 들어오지 못 하게 하는 심사도 있고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리는 차를 보면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 같고 내가 달리는 경우가 더러 생기면 사정이 급해서 어쩔 수가 없는 것이고, 아무데나 주차해놓아 길이 복잡하면 이 나라 교통법이 왜 이 모양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내가 주차를 할 때는 지나가는 차가 좀 피해 가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고, 추월선에서 천천히 가는 차 뒤를 따라 가다보면 달리지도 못하는 것이 추월선에 들어서서 가는 것 같고, 내가 천천히 갈 때는 지가 비켜 가면 되지 하는 생각이 들지요. 이런 것들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나만의 생각, 그래서 회개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더불어 사는 나라입니다. 사자가 어린양과 함께 더불어 사는 나라,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입지 않는 나라, 없는 것으로 인하여 부족한 것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나라. 억울한 죽음이 없는 나라, 가진 것이나 생긴 것, 출신으로 인하여 천대 받지 않는 나라 그 무엇보다 생명이 소중히 지켜지는 나라 누구나 누릴 수 있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나라 그렇게 함께 더불어 사는 나라 하나님나라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는 없다 해도 그 나라를 지향 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산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김 장로님이라는 분이 자동차로 저를 픽업해 주셨습니다. 어찌나 유순하고 친절하신지 우리교회 장로님 같은 착각을 몇 번이나 했습니다. 한번은 그 교회 담임목사님과 같이 차를 탔는데 장로님 자랑을 합니다. 목사님 우리 장로님이 하나님과 교회밖에 모르는 분인데 하나님이 큰 축복을 해주셨다. 는 거예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이런 이야기입니다. 

장로님은 본래 택시운전을 하셨답니다. 택시기사로 일해도 하나님의 일이다 생각하고 택시에 타는 분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하시고 기회가 되면 전도도 하셨는데 한번은 일본에서 온 손님이 타셨습니다. 그분은 초행길로 누구를 만나기 위하여 주소를 가지고 오셨는데 장로님이 아주 친절하게 골목, 골목을 찾아서 그 집을 찾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집에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없어 만날 수가 없으니 다시 택시를 타고 나옵니다. 

나오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는데 그분이 오늘 너무 너무 고맙다 자기가 한국에 여러 번 왔었지만 이렇게 친절한 분은 처음 봤다. 사실은 내가 일본에서 버티칼을 만드는 큰 회사를 운영하는데 한국에 지부를 내려고 누가 이 사람을 소개해서 왔는데 오늘 못 만나고 당신을 만났는데 너무 성실한 것 같고 친절해서 맘에 든다. 내가 지원해 줄터이니 한국지부를 맡아서 해 볼 생각이 없냐? 그래서 지부를 맡게 되었고 지금은 부산에다가 공장을 세우고 전국을 상대로 버디칼을 공급해주는 사장님이 되었어요.

친절과 성실함이 축복이 되었어요. 그의 겸손과 실천이 한 기업인의 마음을 감동하게 했어요. 그러나 여러분 더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요. 장로님의 믿음이 그의 삶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이지요. 하나님의 마음에 들은 것이지요. 너는 내 마음에 합 한자라. 그래서 다윗을 끔찍하게 생각하셨던 하나님, 다윗을 끝까지 도우시며 지켜주신 하나님이 그 장로님을 마음에 두셨고 도와주셔서 사람을 만나게 하셨고 축복이 되게 하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요. 어디서 축복을 기대합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성공 하는 비결입니다. 

오늘 본문 성도들이 성공하고 사는 비결을 우리에게 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가? 바울은 이렇게 살아라 하고 말하지요. 예수님이 그렇게 살았고 바울도 예수님을 따라 그렇게 살았고 그래서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아라 하는 것이지요. 그 길이 한마디로 하면 마치 아닌 것 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29-31)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으나 사람처럼 사셨습니다. 그는 천지만물의 주인이셨지만 머리 둘 곳이 없는 분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권세를 가지셨으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사셨습니다. 바울은 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자기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서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라고 표현을 합니다. 

바울은 젊은 시절 큰 자라는 뜻의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배경도 좋았고, 학벌도 뛰어났고,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이였습니다. 그래서 목에 힘주고 살았고, 대단히 교만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면서 달라졌습니다. 이름을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로 바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니 자기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 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주를 위해 봉사하면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 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돌보심 없이 주님의 인도하심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또 깨닫기를 자신이 정말 주를 위해 무익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를 위해 헌신 봉사하지만 그것이 주께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또 깨닫습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은 죄인인데 그것도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이었던가를 뼈저리게 깨닫는 것입니다.인생의 덧없음을 점점 더 깊이 깨달으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하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겸손을 깊이 배워갔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월의 덧없음 앞에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우리의 겸손을 더 키워야 하겠습니다. 

"있어도 없는 자 같이" “알아도 모르는 자 같이” “권세가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지위가 높아도 낮은 자 같이” 마치 아닌 것처럼 자기를 비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랑 받는 비결입니다. 자기를 비우는 생활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공군 군목으로 있을 때 그 부대에서 제일 높은 지휘관 장군을 전도해서 예수 믿게 했습니다, 이 분이 세례 받는 날이 되니까 자기 스스로 양주병, 양담배 있던 것을 몽땅 쓰레기통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례 교인이 되었으니 저에게 봉사할 일거리를 맡겨 주십시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주보를 나눠주세요. 라고 했더니,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주보를 나눠주니까, 부하 장병들이 멋도 모르고 들어오다가 기절할 정도로 놀라고 장군께서 저런 일을, 하고 감동을 먹었습니다. 부대 전체에 소문이 나고 제일 높은 장군이 낮은 자 같이 부하 장병들을 섬기며 봉사하니까, 그 부대전체가 예수 믿고 복음화 되었어요. 높은 계급이 있어도 없는 자 같이 섬기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자기 자신도 더 존경받는 멋진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때가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때가 단축하여 진 고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온다는 뜻입니다. 때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천년, 만년 산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닙니다. 순식간입니다. 사우나탕에 가보면 모래시계가 있습니다. 들어가서 엎어 놓으면 모래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위 편에 있는 모래가 점점 줄어들어 갑니다. 그리고 남았다 했는데 순식간에 다 빠져 나갑니다. 주님이 오심도 순식간입니다. 그래서 도적처럼 오시는 것입니다. 그 때를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시대에는 바울을 비롯해서 모든 사도들과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이 아주 가까이 온 것으로 알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마다 성도들이 만나면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십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하늘에 번개만 쳐도 "우리 주님께서 재림 하실런가?" 하늘이 조금만 신비롭게 보여도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시려나?"하며 살았습니다. 그 재림을 바라보기에 그들은 경건하게 살았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았습니다.

영국이 신앙으로 한창 뜨거울 때 국회를 하는데 번개와 천둥이 치고 보통 때와 다르게 하늘이 진동했습니다. 그때 신앙 깊은 한 국회의원이 말했습니다. "의장, 지금 하늘이 되어지는 것을 보니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국회를 중단하고 주님 맞을 준비를 합시다." 그 말을 듣고 모든 국회의원들이 "옳소. 국회를 중단하고 주님 맞을 준비를 합시다."라고 하는데, 한 국회의원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의장, 그것도 좋지만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국회를 잘 하다가 주님을 맞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따로 준비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회의를 잘 합시다." 누가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한 사람입니까? 후에 말한 분이 주님 맞을 준비를 잘 한 분입니다. 국회의원들이 들어보니 뒤에 말한 국회의원의 말이 옳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계속했는데, 그날 주님께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노느라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노라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납니다. 내 이름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여기 저기 우리친구들도 부릅니다. 보면 해가 졌어요. 모두 흩어져서 집으로 갑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놀던 것 다 버리고 손을 털고 집으로 갑니다. 주님 오셔서 "아무개야, 오너라." 하시면 다 손을 털고 가야 합니다. 

회사 사장님도 회사를 두고 손을 털며 올라가야 됩니다. 병원 원장님도 병원의 환자들을 다 두고 손을 털고 올라가야 합니다. 은행장도 금고의 돈을 그냥 두고 올라가야 합니다. 슈퍼마켓 주인도 가게에 있는 물건들 다 두고 그냥 올라가야 됩니다. 우리 현악반 단원들도 지금 가지고 있는 바이올린을 두고 손 털고 올라가야 됩니다. 신혼 여행가다가도 손 털고 올라가야 됩니다. 

세상에 너무 연연하지 마세요. 잠시 후에 다두고 가야 합니다. 뭐가 자랑이며 뭐를 내세우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는 여러분의 모습이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기차를 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며 신문을 보는 장면이 신문에 실린 것을 보고, '정말 멋있는 분이다'하는 인상을 가졌습니다. 대통령 전용 비행기나 대통령 리무진을 탈수도 있을 텐데, 대통령 의식을 깨끗이 비우고 기차표를 사려고 줄 서 있는 모습이 한없이 존경스러웠습니다. 마치 아닌 것처럼 그렇게 살수 없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