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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자 (느 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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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자 (느 2:11~20)


느헤미야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민족에 대한 바른 관계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라가 영적인 요소를 많이 취급하는데 반하여 느헤미야는 사실적 사건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느헤미야가 바벨론에서 귀환할 때까지 민족적 단합능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바벨론에 의해 훼파된 예루살렘 성벽은 약 131년간 그대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곤경을 당하는데 있었습니다. 성벽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약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느헤미야는 유다 총독 자격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습니다. 

그는 성벽재건 사업을 착수하기 전에 야음을 타서 주변의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문제점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성벽재건에 사용되는 엄청난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대적들의 방해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성벽재건의 당위성을 설명했습니다. 느헤미야의 말은 백성들 앞에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자고 했습니다.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는 말은 

Ⅰ. 선한 일에 대한 시대적 사명을 일깨 우는 말입니다. 

본문 2장 17절에 『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 조사를 야음을 틈타 암행으로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무너진 성벽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외부의 적들로부터 상습적인 노략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다른 지방에는 나름대로의 방어수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유다의 중심부이자 신앙의 심장부가 되는 예루살렘에만 방어용 성벽이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어떤 궤변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예루살렘의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중심부가 구멍이 뚫려있으면 설사 다른 지역이 온전하다고 해도 수치스러움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거민들만의 수치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수치입니다. 

본부가 점령당하면 그 부대는 항복을 하거나 후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잠들어 있는 시몬 베드로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7절에 『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라고 했습니다. 
'시몬아 자느냐'라고 하신 이 말씀은 첫째, 주님의 실망의 말씀입니다. 둘째, 책임을 묻는 말씀입니다. 수석격인 네가 잠을 자니 모든 자들이 잠을 잘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베드로의 잠을 깨우시는 말씀입니다. 
지도자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앞선 자들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목자를 치면 양떼가 흩어지는 원리입니다. 

스가랴 13장 7절에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벽은 전(全) 이스라엘의 성벽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것을 본 사람이 131여 년 동안 어찌 느헤미야뿐이겠습니까. 무너진 성벽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했고 눈물을 흘렸고 폐허에 서린 회포를 풀려고 갖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을 본 수많은 사람들은 성벽의 폐허의 실상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성벽 폐허로 인한 고통스러움을 당하면서 운명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와 그의 동지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보고 이 참혹한 현실을 극복해야 된다는 시대적 사명으로 승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받은 시대적 사명에 구경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받은 시대적 사명에 못 본 체 못 들은 체 하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역사의 현장 속에서 자신이 받은 시간적, 공간적 세계에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공격적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려는 축복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요 사명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의 차이입니다.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라는 말은 


Ⅱ. 선한 일의 필연성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본문 2장 18절에 『 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벽 재건 사업에 참여케 한 신앙적 동력이 되었습니다. 

에스라 7장 6절에 『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 왕이 내게 이른 말씀 』은 성벽 재건 사업을 착수하는 실천적(현장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성벽 재건 사업의 착수가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호론 사람 산발랏의 반대 때문입니다. 

고문서에 의하면 산발랏은 사마리아 총독으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언급되었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이 여호와를 뜻하는 어미가 붙어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는 유대 제사장 가문과 무관하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나름대로 여호와를 섬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이들의 종교는 지극히 혼합주의적이었습니다. 

에스라 4장 1-2절에 『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고 했습니다. 

혼합주의 신앙은 유일신 여호와를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산발랏은 바벨론식 이름으로 월신(月神)이 생명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2)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의 반대 때문입니다. 
도비야는 산발랏의 부하였습니다. 도비야의 조상이 암몬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도비야는 대제사장과 친밀한 교제를 했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섬기는 자로 자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발랏과 함께 반대 입장에 섰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그는 신앙으로 환경적 요소를 극복하지 못하는 그의 한계를 보인 것입니다. 

3) 아라비아 사람 게셈의 반대 때문입니다. 
게셈은 요단 동쪽 및 남쪽 지역을 다스리던 자로 추정됩니다. 게셈은 산발랏 휘하에 있었던 사람은 아닙니다. 그들의 종교는 다신주의 우상숭배입니다. 이들 반대자들은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고 협박했습니다. 

17절에 『 우리의 당한 곤경 』이라고 했습니다. 또 『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벽 재건 운동은 나의 일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 수치는 나의 수치 너의 수치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수치라는 말입니다. 나아가 우리 세대뿐 아니라 우리 후손들의 수치라는 말입니다. 성벽 재건 운동에 방해가 없다면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한 일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는 말은 


Ⅲ. 선한 일의 성취를 위하여 대동단결하자 는 말입니다. 

본문 2장 18절에 『 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선한 일 즉 성벽 재건을 위하여 자신들의 손을 스스로 강하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무엘하 2장 7절에 『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 재건 운동을 여러 차례 시도했었습니다. 
에스라 4장 12절에 『 …유다 사람들이 우리의 곳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 패역하고 악한 성읍을 건축하는데 이미 그 지대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오니 』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1)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함께 했습니다. 

① 각종 직업에 종사했던 사람입니다. 
대제사장(3:1)입니다. 느헤미야 3장 8-9절에 『 그 다음은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등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향품 장사 하나냐등이 중수하되 저희가 예루살렘 넓은 성벽까지 하였고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후르의 아들 르바야가 중수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제사장 지파 레위 사람들 입니다(3:17). 성전 잡역에 종사하는 느디님 사람입니다(3:26). 동문지기 성문의 파수꾼입니다(3:29). 상인들, 사업가들도 참여했습니다(3:32). 

② 성별을 초월하여 참여했습니다.
느헤미야 3장 12절에 『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 딸들이 중수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③ 지역을 초월하여 참여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 드고아 사람들, 기브온 사람들, 그리고 미스바 사람들도 찾아와서 도왔습니다(느 3:2, 5, 7). 드고아 사람들 중에 일부 귀족들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신분에 대한 체면 때문인지 아니면 경제적 이유나 정치적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선한 일에 협력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에 불참한 자들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선한 일이 중단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자칭 지식층이나 서울 사람들은 고상하고 신사적이어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유치하게 여기고 가담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2절에 『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일이 중단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2) 기능과 역할에 따라 참여시켰습니다. 

느헤미야 3장 23절에 『 그 다음은 베냐민과 핫숩이 자기 집 맞은편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아나냐의 손자 마아세야의 아들 아사랴가 자기 집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 3장 28-31절에 『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셀레먀의 아들 하나냐와 살랍의 여섯째 아들 하눈이 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자기 침방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고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누에 이르렀고 』라고 했습니다. 

5절에 성벽 한 부분을 중수했던 드고아 사람들은 27절에 와서 또 다른 부분도 맡아서 더 해내었다고 했습니다. 하눈과 사노아 거민이 성벽 일 천 규빗을 중수했다고 했습니다(3:13). 이들은 제일 많이 담당했습니다. 말기야에게는 분문 곧 쓰레기 하치장으로 통하는 작은 문 하나만 책임지도록 했습니다(3:14). 그리고 각자의 기능과 역할과 능력에 따라 성벽 재건운동은 성취되었습니다. 

성벽 재건운동은 양문에서 시작되어 예루살렘 성읍 한 바뀌를 완전히 돌아서 다시 양문에 이르도록 완전히 준공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자'(하라크, , come)는 '가다', '오다', '걷다'라는 말로 '너희는 오라'는 뜻입니다. 청유형이 아닌 명령형입니다. 
실제로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복된 일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이 세상 전투적 삶의 현장에 있는 사령부입니다. 교회는 축복의 전당입니다. 교회는 우리를 보호하는 불성곽입니다. 

성전 재건 명령을 하고 있는 학개 선지자는 학개 1장 7-9절에 『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세계 50대 교회 중에 20개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외국에 신학을 하러 갈 이유와 명분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국교가 아닙니다. 세계 모든 교회가 그러하듯이 교회 건축을 위하여 국가의 지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강남지역의 교회들을 보십시오. 일반 건물과 일반 광장이나 전당들보다 월등하게 잘 지어진 건축물과 최신 시설들로 꾸며 놓은 것이 사실입니다. 

누구의 돈으로 했겠습니까? 모두가 성도들의 헌금으로 지은 집들이고 시설들입니다. 
우리나라는 5만 교회 10만 목회자들과 금년 3월 예상 숫자로 2만 명의 선교사들을 세계 곳곳에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지 사업을 비롯한 기독교 여러 단체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과 수많은 기독교 사업은 모두 성도들의 헌금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십일조만 가지고는 이 많고 다양한 일을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십분의 구는 내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살 만하고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고 축복 받은 자들이 항상 문제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배불리 먹을 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성벽의 의미는 영적이고 신앙적인 것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벽입니다. 

시편 18편 2절에 『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진정한 성(城)은 믿음과 신앙입니다. 그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굳건한 성벽이요 반석이십니다.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우리의 성벽입니다.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시편 18편 2절은 바로 교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 우리의 믿음의 성, 교회로부터 받은 직분의 성을 중건하여 벌거벗은 수치를 당하지 맙시다. 
흉년의 수치를 당하지 맙시다.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 곧 교회운동을 합시다. 
선한 일에 반대자들은 항상 있고 그들의 족보는 항상 우상의 족보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정의 기독교 역사를 엮어 가는 초석이 되고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한대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주어진 우리의 시간은 얼마 되지 아니합니다. 정말 값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3-14절에 『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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