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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고 계십니까? (요 1: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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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목적대로 살고 계십니까? (요 1:19~29)


정말 멋진 삶을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30대 초반에 순교를 당한 청년이다. 예수님의 선구자로 짧은 인생을 살다가 간 세례 요한이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이렇게 칭찬하셨다. 

마11:11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 세례 요한을 사도 요한이 소개한다. 사도 요한도 한 때는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좌우에 앉혀달라고 할 만큼 높아지고 싶은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 자신은 단 한 마디도 소개하지 않는다. 요한 사도가 멋지다. 훌륭해 보인다. 

세례 요한은 어떤 사람인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준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요약하면 두 가지이다. 

1. 네가 누구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에게 찾아와서 질문을 했다. 
“네가 누구냐?”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자기 자신을 알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이 된다. 
대답이 무엇인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또 질문을 한다. 21절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아냐?” 

말4:5절에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서 준비 작업을 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메시야가 아니면 엘리야냐? 
이번에도 대답이 간단하고 분명하다. 
“나는 아니라” 

또 질문을 한다. 
“네가 그 선지자냐?” 
그 선지자는 모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에 나온다(신18:15). 그 선지자는 메시야를 의미한다. 
요한이 한 마디로 분명하게 대답한다. 
“아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메시야일거라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 당시에 최고의 스타였다. 요한은 한마디로 잘라서 대답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자신을 높여주는 일에 관심이 없다. 자기에게 굉장한 영광이 돌아올 수 있는데, 주저 없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멋지다. 훌륭하다.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이런 유혹에 얼마나 자주 빠지는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기가 자기를 높이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가?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스타가 되려고 얼마나 신경 쓰는가?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예전에 ‘스타’는 스스로 타락하는 사람이다. 그런 말을 교회에서 많이 했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그리스도인은 ‘예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이다. 
예는 예고 아니오는 아니오가 분명해야 한다. 자기를 위해서는 no! 예수님을 위해서는 yes!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빛이신 예수님을 스타로 만들어 드리자! 세례 요한은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다시 질문을 한다. 22절 
“또 말하되 누구냐...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그렇다면 너는 네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요한이 이번에는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한다. 29절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메시야일 거라고 말했다. 엘리야 선지자일 거라고도 했다. 
아마 그 선지가가 맞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요한은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성경말씀이 자기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했는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하나님이 뭐라고 불러주시는지 그대로 말한다. 이게 중요하다. 이게 핵심이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사장님인가? 선생님인가? 다들 그렇게 불러준다. 기분 좋으라고! 
잘 생겼다고 하는가? 섹시하다고 하는가? 별 볼이 없다고 하는가? 훨씬 더 중요한 게 있다. 
성경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는가? 하나님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정답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성경은 당신이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당신에게는 분명한 답이 있는가!! 
분명한 답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가! 


2. 너는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이냐? 

사람들이 다시 질문을 한다. 내용으로 보면 두 번째 질문이다. 25절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요한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강하게 요구하였다.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묻는다. 
"너는 왜 그 일을 하고 있느냐?" 
너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사느냐? 너는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느냐? 
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냐? 그렇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그 이유를 말한다.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을 위해서 한다는 것이다. 
그 분이 누구신가?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 분은 너무 대단한 분이시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고 말한다. 

요한은 성품이 유약한 사람이 아니다. 
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아!’ 그렇게 독설을 퍼부었던 사람이다. 
왕인 헤롯에게도 ‘저 여우’라고 회개를 촉구했던 담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분 앞에는 신발 끈도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고 겸손하게 고백한다. 
더 이상 겸손할 수 없을 만큼 겸손하게 자기를 말한다. 성품으로 겸손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겸손이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 
그 때 성령님이 비둘기 형상으로 예수님께 임재하시는 걸 보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보고 듣고 경험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겸손한 고백을 한 것이다. 

사도바울은 자기를 소개할 때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엡3:8)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게 되시길 바란다. 그러면 누구라도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다. 
특별히 교회에서 사역하는 모든 사역자가 가져야 할 겸손이다. 
교만한 사람은 아마도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한 교인일 것이다. 

*베들레헴 예수님 탄생교회의 출입구는 아주 작다. 고개를 깊이 숙여야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 누구든 예수님 앞에 나오려면 다 겸손하라고 문을 일부러 작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요한은 제사장의 사역을 할 사람이다. 아버지가 제사장이었다. 
아들도 제사장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제사장으로 인정받고, 높임을 받고 살 수 있었을 사람이다. 
그러나 광야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소리는 의미만 전달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독신으로 살았다. 그냥 광야에서 살았다. 
옷도 한 벌 약대 털옷을 입고 살았다.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 
먹고 사는 일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메시야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미쳐서 산 것이다. 

30대 청년인데도 존경스럽다. 존경스런 사역자이다. 
또 부끄럽다. 나는 미치지 못했는데... 
죄송스럽다. 50이 넘게 살았는데, 내가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미친듯이 사역을 한 일이 얼마나 있을까? 

세례 요한이 왜 그렇게 살았을까? 
그것이 자기 인생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정해준 것인가? 
출생 때부터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다. 
아버지가 많이 기도하여 응답으로 주신 아들이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눅1:13-17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하나님이 별 생각 없이 요한을 세상에 보내시지 않으셨다. 실수로 태어나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보내셨다. 
메시야를 증거하라고 예수님 앞서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요한의 부모는 그걸 분명하게 가르쳤을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제사장으로 인정받고 높이받고 대접받고 살지 않기로 결단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목적이 없으면 방황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모르면 방황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인가?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3.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요새 미국에서 스타가 된 분이 있다. 체슬린 설렌버거라는 조종사이다. 
155명을 태운 비행기가 공항을 이륙하다 비행기 엔진에 새 떼가 들어가서 추락을 하게 되었다. 
도시 한 복판에 떨어졌으면 수 백명이 죽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조종을 너무 잘해서 강에 불시착을 했다. 
죽거나 다친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한다. 너무 잘한 일이다. 

그러나 조종사의 목적은 비행기가 강에 안전하게 불시착하게 해서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조종사의 목적은 공항에 안전하게 착륙해서 승객들을 내려주는 것이다. 
그 조종사는 부득이 비행기를 강에 안전하게 착륙시켰다. 
비행기가 가라앉고 있는데도, 승객 승무원을 다 내리게 하고 두 번이나 비행기 안에 들어가서 
못 내린 사람이 있는가 확인했단다. 
비행기 회사가 정해준 조종사의 목적을 훌륭하게 감당했다. 잘한 일이다. 박수를 보내야 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누가 정하는 것인가? 내가 정하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증거자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왜 증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내 죄만을 지고 가신 어린양이 아니다. 우리 가족만의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이 아니다. 
세상 죄를 지고가신 어린 양이다. 
그래서 세상 끝까지 가서, 모든 민족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다.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우리가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우리의 사명이다. 비전인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오신 예수님을 증거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선포하는 제2의 세례요한이 되어야 한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증거되면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마24:14).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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