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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빛 (요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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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빛 (요 1:1~13) 

    
요한복음서를 가르켜 영적복음서라 얘기합니다. 마가복음이 어떤 사건을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그 사건에 대하여 영적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무엇이 기독교적인가는, 얼마만큼 그리스도적인가로 평가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중심인가, 그 중심이 그리스도인가, 그것이 신앙의 획이 되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켜 예수믿는 사람, 성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데, 그리스도안에 있는가, 그리스도가 그 사람에게 누구인가, 그리스도가 내게 무엇을 하셨는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준, 척도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참 빛이라’ 이 말씀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적합하고 아름다운 비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참 빛’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기독교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 그가 여러분에게 있어서 누구이십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적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배움의 한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찬송가에도 ‘주님 닮기 원합니다’라는 가사가 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때 천당가기 위해서라고 하면 구태의연한 것 같고 조금 내세적인 것 같으나 ‘예수닮기 원함’이라 하면 아주 멋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의 교훈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배움의 대상만은 아닙니다. 가르치심에 대한 대상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흉내낼 수 있습니다. 개그맨이나 코메디언들이 남의 흉내를 잘 냅니다. 이번에 좋은 명절을 맞이하여 집안이 다 모였을 텐데, 길가에 뛰어다니는 아이를 보면서 얘는 누구집 아이일 것이라고 맞히면 그것이 별로 빗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랫만에 고향에 가서, 그곳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뭔가 닮은 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닮겠다고 노력해서 닮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 아버지 유전자가 있어서 자연적으로 닮아간 것입니다. 

예수 닮는 것은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닮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해서 닮고자 한다면, 예수 믿는 것보다 힘든 예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흉내내고 닮아보려고 애써보십시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마치 내 속에 그리스도의 유전자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안에서 닮아간다고 하면 그것은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배움의 대상, 닮아가는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내 속에 있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닮아가고 참으로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 16장 16절에 베드로가 사랑하는 예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만족해 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음을 가르쳐 고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똑똑한 것 같으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맹목적인 믿음이 어찌 믿음이겠느냐며 그래서 알아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알고 깨달아야 한다고 하면 이성의 종교는 되어져도 믿음의 능력의 종교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합리와 이성의 깨달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을 때에 알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는 자에게는 기쁨이 되어지고 제 나름대로 똑똑한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 되기 때문에, 복음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어리석음이 되어지고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의 말씀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해서 ‘계시’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호기심과 물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음은 합리적인 이해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섭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알게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를 닮게 되어지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서로 사귈 때에 그 관계속에 우리의 마음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듯, 우리는 그것을 거듭남이라, 새 피조물이라, 주님안에 성화되어져가는 성숙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여러분이 늘 새롭게 변화되어 갈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나는 참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칼빈은 참이라고 하는 말을 거짓에 대한 반대가 아니고 불완전이 아닌 완전함, 온전함의 뜻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참빛이시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는 불완전한 것을 온전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불완전한 사람,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당한 자들을 찾아다니셨고, 그래서 ‘나는 이만하면 됐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반대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서기관들이나 신앙적으로 열심히 산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나 똑똑하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나 정치하는 헤롯당들이나 모두 예수님을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나는 바보이고 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나는 남편 다섯이 있지만 지금 사는 남편도 내 남편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에 목이 갈한 자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참 빛이 되시며, 불완전한 자들을 치료하시고 약한 자를 세우시고 의미를 잃어버린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셔서 아름답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자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나의 부족을 깨닫고 주님의 온전케하시는 참 빛의 치유함을 받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꽃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지만 밤이 되면 분홍색인지 노랑색인지 파랑색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자기의 독특성이나 아름다운 색깔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밝은 빛이 비춰지면 비춰질수록 아름다움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온전한 빛은 존재로 존재케 하시는 능력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바로 모든 존재로 존재케 하시는 지혜와 능력이 됩니다.
   
우리모두가 그리스도빛 안에 있을 때만이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귀한 달란트가, 내 삶과 그 모습이 귀하게 보여지며, 또한 나만이 귀하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귀하게 아름답게 보여집니다. 왜 생명을 무시하고 불법이 성합니까? 어둠속에서 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귀하고 천한 것을 모릅니다. 

어둠 속에 길을 가 보았습니까? 넘어지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부딪히면 서로 욕을 합니다. 어둠속에 혼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밝은 빛 속에서 부딪히면 미안해할 줄 압니다. 우리는 앞을 보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설 명절 때 왜 2천만이 3천만이 대이동을 합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발견이기 때문입니다. ‘내 고향은 여기요 보잘것없는 무식한 촌부 나이 많은 분, 그분은 나의 위대한 아버지요 어머니입니다. 나는 그의 자녀입니다. 그가 나의 아저씨요, 우리의 친척입니다’ 그래서 고향가는 시간이 11시간이 걸리든 12시간이 걸리든 그것이 즐거움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나는 우주의 미아요,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인류가, 모든 삶이  예수그리스도가 계시고서야 내가 오늘 여기 있어야 할 존재로 의미를 갖게 되고 아름다움이 나타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믿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 그 자체가 복입니다. 그것이 위대한 가치입니다. 그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참 빛은 우리존재를 존재되게 할 뿐만 아니라, 살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죄가운데 죽어가니 ‘이쪽으로 가면 살 것이고 저쪽으로 가면 죽을 것이다’라는 도를 가르치신 자가 아니라 ‘내가 길이고 생명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자는 살 것이고 내 밖에 있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위대한 복음이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생명의 능력을 더하십니다.
    
햇빛이 없이 식물과 생명이 자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 없이는 생명이 자랄 수도, 자라야할 이유도 없고, 자라는 인생의 맛도 없습니다. 
     
경북상주에갔을 때  상주참외가 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원래는 장마가 나면 낙동강이 범람해 모래를 실어다 놓아서 농사가 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심한 끝에 이곳에 모래가 많고 물이 잘 드니 참외를 심어보았는데, 참외가 잘되더라는 얘기입니다. 또 큰 산이 없고, 일조시간이 길어서 참외가 잘 익는 다고 합니다. 햇빛이 쨍쨍 쬐이니까 참외가 노랗게 잘 익는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왜 허무할까요?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행복, 내가 생각하는 가치관으로 아무리 비춰보아도 왜 수고를 해야 되는지 모르며 모든 인생의 행로가 어둠안에 끝나버리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참 빛이 비춰지면 노랗게 참외가 익듯 내가 오늘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큰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사명이 있을 때에 나옵니다. 인생에 왜 힘이 없습니까? 환경이 열악하고 조건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내 속에 살아야 할 조건이 있고 사명이 있을 때에 놀라운 힘이 솟아납니다. 
    
그리스도인들,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사명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태어나, 하나님을 위하여, 나를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하여, 배움의 기회를 갖고 일할 수 있는 기회와 건강과 가정을 얻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빛을 비출 때만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와 연결될 때만이 참 의미가 있습니다.  그 때에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어집니다. 인생의 단맛을 느낍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안에서 행복한 삶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자들의 고백입니다. 그것이 참 빛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10절에, 참으로 마음 아프고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절에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더라.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밖에서 삽니다.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참 빛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행위가 드러날까봐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어둠안에는 기생충과 사탄의 역사와 죽음의 능력뿐이나, 많은 사람들이 밝은 빛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밝은 빛안에 자신의 삶을 내어놓고 아름다운 주님의 빛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산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요, 위대한 사명이요, 살아있어야 할 궁극적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은총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그 안에 살게 하셨으니 예수 믿고 주님안에 살아간다는 것은 하늘의 축복이요 위대한 영광임을 하나님앞에 감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예수믿는 것은 때로는 힘듭니다. 왜냐하면 어둠의 세력이 반대하고 내 속에도 어둠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과 빛이 공존합니다. 그래서 주님앞에 나가려고 하면 못나가게 하고 주님안에서 생각하다가도 때로는 포기해버리고,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운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생활은, 풍파가 이는 바다가 조용해지듯 조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 좋은 교회는 조용한 교회가 아니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능력이 몸부림치고 갈등과 아픔, 때로는 선한 싸움이 있는 곳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가장 조용한 곳은 공동묘지입니다. 살다가 힘들고 어렵고 바쁘고 갈등생기고 마음이 불편한 일이 생기거든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의 즐거움이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선과 의인은 적극적이고 쟁취하는 빛의 아름다운 역할로 주어지는 것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말씀 12절에 우리에게 위대한 복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할렐루야! ‘이 빛을 영접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참빛으로 마음에 받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느니라’ 
    
여러분의 자녀를 위하여 여러분의 희생을 즐겁게 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여러분의 삶을 희생하며 보람을 느껴보고 감격과 귀한 행복감을 느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안에서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하나님의 사랑안에 살아가는 아름다운 감격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상속자이고 그 안에 거하는 자요, 그가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고 올라올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니라’ 하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축복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8장 12절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주를 영접하고 주안에 사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아니하고 빛 안에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어도 눈을 감으면 깜깜해 집니다.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찬란한 빛이 나 하나만을 사랑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젖어들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뜨십시오. 믿음으로 주를 영접해보십시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에 강같은 평화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빛가운데 비추게 되어질 때에 자연히 기뻐지고 모든 것이 순리대로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빛에 거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오늘을 살아 가야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함과 동시에 무엇이 하나님의 선한 뜻이며, 무엇이 오늘 내게 주어진 참으로 보람찬 삶인지 깨닫게 합니다. 
    
더 나아가 때로는 시련과 역경과 우리를 핍박하는 어둠의 세력이 엄습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시고 의로운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요,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위대한 찬양이 있고 위대한 감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 마음에 안정과 평강을 얻습니다. 
    
캄캄한 밤길을 가보셨습니까? 불안하고 초조하고 길을 다왔는지 아직 다 오지 않았는지, 길을 잘못 들었는지, 넘어질는지, 무슨 짐승이 나타날는지, 얼마나 불안하고 두렵습니까? 그러나 밝은 대낮, 빛 안에 걸아가 보십시오. 즐겁습니다. 넉넉합니다. 사방을 바라보면서도 제 길을 갑니다. 빛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그리스도인의 성숙함으로 남을 관용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내가 마음을 넓혀야겠구나 내가 수양을 해야겠구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가 내려다보이고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준비한 상급이 보여지고 미래에 대한 영원한 소망을 맞으면서도 있을 때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날아오는 돌을 맞으면서도 ‘아버지시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라는 기도를 할 수 있었고 자기를 영접하고 있는 하늘의 천군천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도 영원한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넉넉한 관용과 아름다운 삶이 될 줄 믿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안에 살면 그 날에 의로운 재판장이 내게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잘했다, 잘못했다 하지만 의로운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얼마나 여유가 있습니까? 얼마나 떳떳합니까? 어떻게 바울이 그럴 수 있었습니까? 참 빛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이 말씀대로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시고 참 빛이신 그리스도안에서 이토록 보람차고 축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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