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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열심 (사 62:1~5) -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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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열심 (사 62:1~5) - 실패


어제 어는 인터넷 일간지를 보니까 대비되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습니다. 멘 위의 기사는 [뇌성마비 장애 딛고 미국 대학 강단에 선 정유선 박사 모녀의 끝없는 도전과 감동]이라는 제목이었고 바로 이어 [관악구청장 부인 자살]이라는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미국 조지메이슨 대학에서 4년째 보조공학을 가르치고 있는 정유선 교수는, 뇌성마비 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만성적인 근육통, 일그러진 얼굴, 대학실패, 어려운 유학생활 등으로 심한 우울증도 겪었지만 그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하빈이와 예빈이라는 아들 딸을 둔 어머니로 당당하게 살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정박사는 “돌이켜 보면 내 발목을 붙잡았던 걸림돌들이 모두 내 인생의 디딤돌이 돼준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살한 구청장의 부인은 최근 남편이 뇌물수수 및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다가 불구속 기소되자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음독자살을 하였다는 기사였습니다.
 
이 두 분의 고통 정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는데도 그 고통을 대하는 사람에 따라 어떤 사람은 심각한 고통이 디딤돌이 되어 일어서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작은 고통도 걸림돌이 되어 넘어져 버렸습니다. 

사지마비의 중상을 극복하고 세계 최고의 재활의학 의사로 거듭난 이승복 박사의 간증을 들어 보았습니다. 현재 존스홉킨스 의과대학병원 재활의학과 전문의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약사였는데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서 아버지는 병원 청소부를 하고 어머니는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참으로 힘든 생활을 하였답니다. 

여덟 살 나이로 이민을 가 영어를 못하니까 미국 아이들에게 무시를 당했답니다. 미국 아이들에게 천천히 큰 소리로 말하면 알아들을 줄 알고 말했는데 미국 아이들은 비웃고 상대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조 선수가 되어 금메달을 따 어렵게 사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었지만 연습 도중 거꾸로 처박혀 사지마비의 중상을 입었답니다. 고통과 분노, 두려움, 혼란, 죄의식으로 나날을 보내었지만 그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답니다. 한동안 절망감과 패배감에 젖어 있었지만 그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 후 그에게는 대단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련의 일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걸 확신했다고 합니다. 초자연적인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등을 짓누르고 있던 산더미 같은 벽돌이 한순간 사라졌답니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답니다. 하늘에선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렸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신을 발견했답니다. 

그는 꿈을 가지고 공부하여 뉴욕대를 거쳐 컬럼비아대학에서 공중보건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다트머스대에서 본격적으로 의학공부를 시작, 수석졸업한 뒤 하버드대 인턴과정도 수석으로 마쳤다고 합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내 인생의 여정에는 고통과 불확실함, 두려움, 혼란, 죄의식, 분노 등이 늘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향한 지극한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소진시켜 결국 자신의 품으로 이끌었습니다. 나를 향한 치밀한 하나님의 계획을 확인합니다.” “제게는 금메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 오랜 갈망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기도에 응답해주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우리 성도님과 저를 사랑하십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올해 들어 우리가 주일 날 계속 묵상하고 있는 이사야서를 보면 하나님은 유다 민족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난 그들을 징계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그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61장에서 보았듯이 반드시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네 하나님이 너희를 기뻐하시리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비록 버림받은 것 같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철저히 실패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너희를 기뻐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우리 옆 사람 보면서 인사하겠습니다. “집사님 하나님이 집사님을 기뻐하십니다.” “성도님 하나님이 성도님을 기뻐하십니다.” “아들아 딸아 너는 하나님의 기쁨이란다.” “내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십니다. 나 무시하지 말아요.” “우리 성도님의 자녀의 하나님이 우리 성도님의 자녀를 기뻐하십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4,5).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 형편이 어떤 처지에 있던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너’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유다 백성들, 남은 자들을 말합니다. 나라를 잃어 버렸습니다. 정치적, 경제를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포로 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 중에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국땅에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장애를 둔 자식으로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 늙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이런 처참한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기뻐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처녀성을 잃어버린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모든 과거를 불문에 붙이고 처음 결혼한 처녀 신부처럼 기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을 결혼식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다를 어떻게 불러주신다는 것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해를 돕기 위해 공동 번역을 보면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여자" 라 하지 아니하고 너의 땅을 "소박데기" 라 하지 아니하리라. 이제는 너를 "사랑하는 나의 임"이라, 너의 땅을 "내 아내" 라 부르리라. 야훼께서 너를 사랑해 주시고 너의 땅의 주인이 되어 주시겠기 때문이다. (사 62:4)]

과거 ‘버리운 자(아주바)’ ‘버림받은 여자’라 칭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비참한 신분에 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헵시바’ ‘사랑하는 나의 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아주바’가 아니라 ‘헵시바’라는 말입니다. ‘버림받은 여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나의 임이’라는 말입니다.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유다를 신랑 신부와 비유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고 그녀는 유다입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죄로 말미암아 마귀의 자식, 진노의 자녀였는데 이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요 3:29; 계 21;2,9).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비록 많은 것 가지고 있지 않아도, 비록 뛰어난 실력이 없어도, 비록 아름다운 외모가 없어도, 비록 장애가 있을지라도,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실패하고, 망하고, 조롱받고, 비난받고, 절망하고, 열등감과 우울증에 사로잡혀 살아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 개념(self-concep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화된 이미지인 '자기개념'은 아동기와 성인기를 통해 발달합니다. '나는 쓸만한 사람이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 ‘나는 버림 받았다’'나는 못 생겼다.' '나는 할 수 없는 존재다' 등과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고 느끼는 내용을 말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결정되냐에 따라 인생은 많은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식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조건을 과소평가하면서 부정적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를 넘어야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고 하나님의 눈으로 자녀들을 보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인도의 갠지스 강가에 살면서 그물로 생계를 유지하던 어부가 있었습니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자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작은 돌이 가득 든 가죽 주머니가 발부리에 채였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돌을 꺼내 강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부자가 되면 큰 집에서 살아야지." 어부는 이렇게 말하면서 돌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을 꺼내 던지며 말했습니다. "하인들을 거느리고 산해진미를 먹어야지." 돌이 마지막 한 개만 남을 때까지 그는 계속해서 던졌습니다. 어부가 마지막 돌을 강에 던지려는 순간 달빛을 받은 돌이 이상하게 반짝였습니다. 어부는 그제서야 그 돌이 무척이나 귀한 보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가치를 잘 못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석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이 거센 강을 건너게 하려고 큰 돌을 줄 수 있습니다. 그 돌만 바라보며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9:29)”고 말씀하십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인생은 믿음대로 되어 진다는 말입니다. 내 마음에 회의, 절망, 낙심, 의심, 불평, 불만, 비난을 집어넣으면 그런 사람이 되어 집니다. 그러나 소망, 아름다움, 격려, 용기, 열의를 넣으면 인생은 풍요롭고 충만해 집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그들이 거하는 유다 땅을 ‘쁄라’라고 칭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결혼한 자', '결혼한 부인'이라는 말입니다. 유다 땅이 하나님의 신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조금 이상하고 이단의 소리처럼 들릴지 몰라도 시적인 표현이고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남으로 황무한 상태,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나 이제는 그 땅이 결혼한 부인과 같이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너의 땅이 ‘소박데기’가 아니라 ‘내 아내’ 부를 것이라는 말입니다. 버림받은 사람이 정상적으로 회복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쉬마마’가 아니라 ‘쁄라’라는 말입니다. 

유린당하고, 황폐하고, 황량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이 보장하시고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땅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거하는 가정이, 우리가 하는 기업이, 우리가 근무하는 직장이, 우리가 공부하는 학교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가 신앙 안에 거하면 그곳은 이제는 회복된 땅이 되어 황폐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 되어 집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곳이 됩니다. 의와 사랑이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이 보장받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있는 곳입니다. 내 기업이 하나님의 쁄라게 되게 해야 합니다. 내 공부가 하나님의 쁄라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내 사업이 하나님의 뿔라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나가는 흔적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편지를 쓰고 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맨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기도처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므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가 하는 일마다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2.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케 씻어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까?


2.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포기하지 않는 열심을 가지고 계십니다(1).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사 62:1)”

공동번역은 “시온을 생각할 때, 나는 잠잠할 수가 없다. 예루살렘을 생각할 때,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정의가 동터 오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르기까지 어찌 잠잠할 수 있으랴? (사 62:1)”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나’는 이사야일 수도 있고, 하나님일 수도 있고, 61장에서 이미 예언한 것처럼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일 수도 있습니다. 

‘나’가 이사야라면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나기까지 이스라엘을 위한 사역의 수고와 중보기도를 쉬지 않고 하겠다는 이사야의 결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를 하나님으로 보신다면 구속사역을 성취하기까지 그의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각오입니다. ‘나’를 메시야 중보자인 여호와의 종 그리스도로 보면 시온의 구원을 위해 여호와의 종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이며 선언입니다. 

‘나’를 누구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조금 달라질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시든, 메시아 여호와의 종이든, 이사야든 유다의 구원을 위해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유다 너희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바벨론에서 유다 백성을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이고 메시아를 통해 택한 백성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드러나게 하고 열방이 볼 수 있듯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에게 비롯된 구원이 마치 아침 태양이 가까운 언덕, 들, 그리고 더 높은 산을 향해 그 빛을 펼쳐 나가듯이 온 세상을 향해 그 영향력을 펼쳐 나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종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되고 결국 그 사실을 믿는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구원받아 의롭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이 구원의 복음이 빛처럼 횃불처럼 열방으로 퍼지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하신 메시야를 통한 구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반역과 거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악한 죄를 짓고 타락하여도 인류 구원사역을 하나님이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일을 하시는데 하나님은 잠잠하지 않으시며 쉬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에덴의 축복을 주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반역하고 수치스러워 도망가 숨었을 때도 끝까지 찾아가셔서 가죽 옷을 해 입히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첩을 얻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하나님은 그리 버리지 않고 끝까지 약속을 지키어 기적적인 방법으로 100세에 아이들 낳게 하여 주었습니다. 야곱이 사기를 치고 도망가도, 모세가 수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거절해도, 다윗이 충성을 다하는 부하의 아내를 범하고 부하를 죽였을 때도 하나님의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찾아가 그들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사명을 다 이루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 정죄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어진 사명 중간에 감정적 판단으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을 근거로 추정하고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나의 시각에 대한 느낌만 알려줄 뿐입니다. 그것은 불완전합니다. 부정적 감정은 사실적인 증거로 맞서야 합니다. 믿음으로 맞서야 합니다. 사명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한 번의 실수나 실패가 모든 것을 망쳤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패의 두려움에 굴복하면 할수록, 두려움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실패로 인한 걱정에는 끝이 없으며 경계도 없습니다. 걱정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우리의 단짝이 되어 버립니다. 실수와 실패는 우리에게 훌륭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를 바르게 볼 수 있게 하고 우리의 행동을 바로 잡아 줍니다. 불완전함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물을 끓여 증기라는 에너지를 얻기 까지는 100도 이상 끓여야 합니다. 섭씨 0도에서도 99도의 물에서도 에너지를 얻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차이가 자그마치 99도나 되는데도 말입니다. 99도에서 100도까지의 차이가 불과 1도입니다. 99도까지 올려놓고도 마지막 1도에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는 사탄이 사용하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 시험들지 말아야 합니다. 같은 음식도 환자에게는 맛이 없고 노인에게는 딱딱합니다. 같은 빛, 같은 소리라도 뇌에 이상이 있는 환자에게 고통이 됩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탈이 많다'라는 뜻입니다. 좋은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대통령제를 정착시킨 사람입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연방국을 만든 사람입니다. 당시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 국가로 훈련된 정예군과 강력한 재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단지 영국에서 5,000km 떨어져 있다는 사실 외엔 유리한 점이 없었습니다. 쓸 만한 군함도, 훈련된 병사도, 넉넉한 재정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인은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과 무관심하는 사람이 미국인의 2/3가 되었습니다. 워싱턴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1/3을 이끌고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전혀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44세였던 워싱턴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했습니다. 무엇보다 워싱턴은 영국군보다 미군과 더 힘겨운 싸움을 하였습니다. 지루한 전쟁이 계속되자 군인들은 도망을 갔고, 밀린 봉급 투쟁이 벌어지는가 하면 아예 전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본국에서 5,000km 떨어져 물자 보급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렵다는 영국군의 약점을 이용하였습니다. 깊이 숨어 적과 전투를 피하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러다가 1776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 갑자기 델라웨어 강을 건너 트렌턴 요새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다시 9월 19일 새러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두 번의 대승은 결국 프랑스의 지원을 이끌어 냈고 에스파니아, 네덜란드의 지원도 이끌어 냈습니다.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워싱턴은 굴복하지 않고 1781년 10월 9일 요크타운에서 영국군 사령관 콘윌리스 장군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미국은 드디어 독립을 쟁취하였습니다. 

워싱턴은 매 전투마다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패전과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결정적인 전투 세 번의 승리로 미국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몇 번의 실패로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처럼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의 개척자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기까지는 글라이더 시험 비행만 무려 1,000회 나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적인 마케팅 전문기관 미국 AC 닐슨에 의하면 수많은 신제품 중, 살아남는 것은 10개 중 1개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차 1대가 개발 때마다 200여대를 부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매년 3만개 이상의 소비재 관련 신제품이 쏟아지지만 이 중 80% 이상이 실패한다고 합니다. 

실패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한 길을 또 교훈해 줄 뿐입니다. 포기하는 순간 새로운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고는 자전거를 타기를 배울 수 없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고 수영을 배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땅으로 향하는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 24:16)“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들을 결국 어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3.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2,3).

2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열방으로 하여금 너의 공의와 영광을 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수치를 준 사람이, 조롱하던 사람들이, 괴롭히던 사람들이, 불의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을 통하여 공의를 시행하는가를 똑똑히 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멸망시킬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메시야 사역의 결과로 모든 나라들이 시온의 구원을 가시적으로 목격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큰 성 바벨론 불의하고 부조리한 사탄의 문화, 사탄의 질서가 통용되는 세계를 결국 완전히 무너뜨릴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이름으로 바꾸어 주겠다는 것은 존재의 완전한 변화를 이루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바뀌는 것처럼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고, 심판받을 자가 변하여 상급받을 자가 되고, 저주 받을 자가 변하여 축복받을 자가 되고, 수치 가운데 살아야 할 사탄의 종이 영광 가운데 살아야 할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마지막 날 주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야할 새 이름을 말씀하십니다. 수치와 가난, 압제로 대변되는 삶의 상황 속에 처해 있지만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면 번영과 영광으로 삶의 상황이 바뀌게 될 것인데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을 새 이름을 얻을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 2:17)”

마지막 날에 결국 모든 눈물과 슬픔과 고통을 거두어 주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1)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3)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3절에 보십시오. 회복된 시온의 가치와 지위가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우리의 가치와 지위가 어떻게 됩니까?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라고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사는 수치스러운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손 안에 있는 면류관처럼, 왕관처럼 보호받는 영광스런 가치와 지위를 지닌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진 면류관처럼 가치 있는 존재, 왕의 위엄을 상징한 왕관처럼 왕같은 제사장으로 지위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하시고 죄를 정복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고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천사도 흠모할 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니 “한국인 부자(父子) 백악관 차례로 입성”이라는 신문 기사가 있었습니다. 시각 장애인 강영우 박사의 아들이 버락 오바마 차기 미 대통령의 백악관에 들어가 그의 지근거리에서 일하는 입법 보좌역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부지 정부에서 4성 장군에 해당하는 백악관 국가장애인위원회 정책 차관보로 봉사하였습니다.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시각 장애인이지만 예수님을 믿어 인생이 바뀌어 지고 두 아들 역시 박사로 양육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니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왕관처럼 면류관처럼 쓰임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쟎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270장 1절)”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4,5).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포기하지 않는 열심을 가지고 계십니다(1).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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