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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계를 넘는 사람 (요 1: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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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넘는 사람 (요 1:45~51)

 
인간은 예외 없이 본성의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이라도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그침 없는 자기와의 싸움을 싸웁니다(롬 7:22-24). 그렇지만 성도가 자기의 한계를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시도하면 성령께서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여기 빌립의 친구 나다나엘은 지금까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식의 주관적인 장벽에 갇혀 있어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친구의 권유에 못 이겨 예수님께 나왔을 때 한순간 자기의 벽을 허물고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1. 인간 세계의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머리털 하나도 희고 검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마 5:36). 세상을 사는 사람은 다 자기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한계점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1) 외부적인 한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습니다(창 1:26-28). 그렇지만 자기의 의사와 상관없이 여의치 못한 외부적인 사정 때문에 기본적인 생존권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같은 국가 간의 분쟁이나, 또는 오랜 기간 그침 없는 내전으로 포화 속에서 목숨을 지키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독재권력의 횡포로 자유와 권리를 유린당한 채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똑같은 지구상에서도 자연적인 악조건 때문에 극심한 가난과 목마름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온갖 불합리한 요소를 안고 있으면서도 자기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한계에 좌절할 뿐입니다.


2) 신체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첨단 문화의 이기를 누리면서 인간의 가능성이 끝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세계 올림픽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는 경기자들을 볼 때마다 모두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찬사를 보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과학문명에 대하여 신(神)의 경지에까지 이른다고 경탄해 마지않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인간일 뿐 그 이상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신체적 악조건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동양 사람들은 서양 사람에 비하여 체구가 작습니다. 
피부 색깔을 자랑하는 백인들은 유연성과 순발력이 뛰어난 흑인들을 못 당합니다.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는 질병과 사고의 위협에 노출된 상태로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3) 사고(思考)와 인격의 한계가 있습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Francis Bacon)은 그의 유명한 우상론(Idola)을 피력하면서 사람마다 자기중심의 사고와 개인의 편견, 언어, 권위, 전통과 같은 굴레에 갇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사고의 한계와 고정관념의 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벽이 두꺼운 사람일수록 외부 세계에 접근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방인들도 그들이 자랑하는 철학적 지식의 교만에 갇혀 십자가의 복음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고전 1:22-23). 바울은 이들을 향해서 “너희 마음을 넓히라”고 하였습니다(고후 6:13). 누구나 다 자기 중심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허물게 될 때 그리스도의 이상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2. 신앙세계의 한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신비성(神秘性)을 말합니다(마 13:11). 인간의 상식이나 과학적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믿음의 세계에서는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히 11:1).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1) 믿음의 한계입니다. 

보통 때는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말하던 사람도 결정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면 자기의 벽에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결국 믿음의 한계가 거기까지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을 가지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먹고 입고 사는(衣食住)문제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새를 먹이시고 꽃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보장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마 6:30).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그의 보장을 믿는 사람은 불가능을 모르는 사람입니다(막 9:23).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오직 믿음만으로 불의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연약한 가운데서도 강하여지고 온갖 시험과 죽음을 이겨낸 경험이 있습니다(히 11:33-38). 믿음에 어떤 이유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한계입니다.

2) 순종의 한계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논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거기에 순종하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히 11:8). 건전한 믿음은 그의 삶을 통하여 실천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음을 아는 것과 고백하는 것으로 그치고 실천하는 데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말씀을 순종할 때 믿음의 능력이 행사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못하고 마는 한계에 부딪치곤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마 19:20-22). 참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사람에게는 신앙의 한계가 거기까지였기에 순종으로 옮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3) 축복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무궁무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지만 성도가 세상에서 누리게 되는 축복은 그 사람의 수용할 수 있는 용량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하늘나라에서 받게 되는 영광도 해와 달과 별과 별들의 영광이 있다고 했는데 이 역시 세상에서 행한 일과 정비례 하는 것입니다(고전 15:41). 그릇의 한계가 있는 사람은 그 용량 이상의 복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똑 같은 상황에서도 신앙의 용량에 따라서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손에 잡은 장자의 축복을 놓쳐버린 에서처럼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은 축복의 현장에서도 이를 피해갑니다(창 25:34). 요셉처럼 큰 그릇이 되는 사람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혜성처럼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창 50:20).


3. 참 이스라엘로 거듭나야 됩니다.

 “이스라엘”은 축복의 대명사입니다(신 33:29). 옛날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즐겨 쓰던 이름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문벌과 신분을 자랑하면서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빌 3:5).

1) 편견의 벽을 허물어야 됩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민족주의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외부 사람들과의 벽을 쌓고 살았습니다. 형식적인 율법에 사로잡혀
그 고정관념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 역시 그런 사람입니다. 빌립이 찾아와서 율법이 소개한 메시야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을 때, 그는 첫말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하고 일축하였습니다. 그렇던 나다나엘도 “와보라”고 하는 빌립의 권유에 못 이겨 결국 자기의 고집을 꺾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나다나엘로 하여금 이름뿐인 이스라엘에서 명실상부한 참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하였습니다(창 32:25-28).

2)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선언하실 때 나다나엘은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즉각적으로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하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은 그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고린도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요 1:12-13).

3)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51-52절). 이후부터 그가 성령에 사로잡히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처럼 자기중심의 사람이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으로 그 삶의 패턴을 바꾸게면 새로운 세계관이 열리게 됩니다. 능력 있는 사역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를 거듭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였습니다(눅 22:32).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전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되고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의 열매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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