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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있는 교회 (사 6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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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있는 교회 (사 61:4~11)


오늘 2009년 두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면 어제보다는 내일이, 올해 보다는 내년이,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좋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들입니다. 같이 따라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 받은 자손이니 작년보아 올해 더 나은 삶을 삽시다.” 작년보다 더 나은 올해가 있는 교회, 과거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가정, 올해보다는 더 좋은 내년이 있는 기업, 지난 세월보다는 더 좋은 올 세월이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바로 어제보다 더 나은 미래를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더 좋은 미래를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나라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모하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나라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약속을 해주시고 있습니까?

1. 하나님은 더 좋은 신분의 회복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5,6,9). 

유다 나라는 바벨론 포로 시절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포로의 신분입니다.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종교적 자유가 없는 신분입니다. 400여 년 동안 애굽에서는 어떤 신분이었습니까? 노예의 신분이었습니다. 노예의 신분인 그들을 불어 하나님은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라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심으로 그 약속을 지켜 주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네 가지 것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첫째가 가나안의 모든 신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나 외에 위하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신5:7)”라였습니다. 
둘째가 중앙 성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신12:10-11). 하나님이 택한 한 곳입니다. 
셋째가 가나안의 문화, 종교, 생활을 거부하고 순수한 신앙을 지킬 것을 말씀했습니다. 
넷째가 사랑과 정의의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레위인, 고아, 과부, 나그네같은 약자를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이 모든 것을 지키지 않습니다. 결국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였습니다. 남쪽 유다는 70년 동안 바벨론 나라의 포로로 잡혀가 자유를 잃어버린 백성이 되었습니다. 비참한 포로의 신분으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이사야를 통하여 무엇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까?

5절을 보세요.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남은 자들을 위한 약속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시킬 신약 성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외인들이 서서 너희의 양떼를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예의 신분, 포로의 신분으로 그들이 양떼를 치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양떼를 쳐 주는 종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이방인 종의 신분이 아니라 이방인을 부리는 주인의 신분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이 너희의 농부와 포도원 지기기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부리는 주인이 된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레위인 만이 성전에서 봉사하고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가 있는 유대인들이 다 제사장이 되고 하나님의 봉사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씀하는 내용이겠습니까? 일차적으로는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신분이 될 것을 말씀하는 내용이지만 더 본질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될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말씀합니다. 

1-3절에 나오는 내용이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해 주시고 있습니다. 4절부터 나오는 말씀은 바로 그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베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우리도 과거 예수 믿기 전에는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고, 세상 풍속을 쫓고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에베소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2)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3)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4)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5)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6)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엡 2:7)” 

이제는 사망 권세에 지배받지 않는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자아관이 중요합니다. 자존감이 중요합니다. 거지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탄의 자식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가난하다고 병들었다고 무식하다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가치를 비하해서는 안됩니다. 비교의식으로 초라해져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은 진리 안에서 참 자유인된 것입니다. 이제는 양심과 율법의 노예가 아닌 복음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기도의 권세,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 죄 용서의 권세 등을 누려야 합니다.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열방이 여호와께 복받은 자손이라 인정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나 뿐만아닙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의 후손이 그렇게 복받은 자손으로 인정된다는 말입니다. 그 자손을 열방 중에, 그 후손을 만민 중에 알려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복받는 자손이라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더 좋은 기업의 회복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4). 

바벨론 포로 시절 그들의 기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려 70년 동안입니다. 열 살 때 포로로 잡혀갔다면 지금 80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동안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얻은 축복의 땅 가나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오래 황폐하였던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예로부터 무너진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황폐한 성읍,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가나안 땅의 단순한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공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서 선물로 주어진 땅입니다. 가나안 땅은 중요한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선물로 받은 땅입니다. 땅 한 평 없는 노예 생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결핍함이 없는 땅, 부족함이 없는 땅입니다. 광야에서는 전혀 맛볼 수 없었던 풍요가 있는 땅입니다. 노예의 강압이나 속박이 없는 회복과 안정의 땅입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내 땅이라고 말씀합니다(렘2:7; 16:18) 하나님께서 잘 관리하라고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더럽히고 마음대로 독점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확신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땅을 선물로 받기 위한 조건입니다. 이 땅에 들어가려면 믿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확신과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광야의 불안정성과 정착지의 확실성 사이의 경계선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요단강 앞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도 그것을 요구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무기력으로 자신들은 메뚜기라고 원망하며 불평하다가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셋째는 약속의 땅을 완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약속의 땅을 받은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각 지파별로 제비를 뽑아 골고루 나누어 주었고 땅의 경계석 옮기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땅을 팔았을 때는 독과점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희년이라는 제도를 두어 사람이 죽기 전에 50년 만에 다시 원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이 땅의 불균등한 분배가 심각합니다. 미국 CNN 창업자 테드 터너는 무러 200만 에이커(80만9385㎡)의 땅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면적은 미국동부의 로드 아일랜드주와 델라웨어주 등 2개주를 합한 것보다 넓은 면적이라고 합니다. 2위인 알키 앨디스 에머슨 회장 120만 에이커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약 1%인 50만명이 소유한 토지가 전체 사유지의 56.7%에 달한다고 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그 땅에서 쫓겨났고 그 땅은 황폐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 어떻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래 되어 이제 다시 재건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할 만한 성인데 다시 쌓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겠다는 것입니다. 황폐한 성 대대로 무너진 성을 다시 중수하겠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세요. 외인들이 서서 너희의 양떼를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양떼를 쳐 주는 종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이방 사람들이 너희의 농부와 포도원 지기기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래 황폐하였던 곳, 예로부터 무너진 곳이 무엇이겠습니까? 일차적으로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황폐해진 유다 본국 팔레스틴 땅과 성읍을 가리킵니다(렘 20:6;28:6). 나아가서는 본장 전체의 문맥상 메시야의 도래가 있기 전 혹은 메시야를 영접하기 이전의 이 세상의 상태를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이 재림하기 전에 이 땅의 상태를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황폐해진 인간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황무한 마음을 더 좋은 기름진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의 황폐한 마음에 대하여 로마서 1장 28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8)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롬 1:29)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 1:30)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 1:31)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롬 1:32)”

그런데 이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엡 4:24)”이 된 것입니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골 3:10)”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밭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더 좋은 삶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7,8,10,11).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때 그들의 삶의 질은 어떠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수치스러운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스스로 자랑하였는데 포로가 되어 잡혀갔습니다. 겨우 생명을 부지하여 죽지 못하고 수치스럽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능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노예 생활의 수치에서 벗어나 참 자유인으로 행복자로 살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고 그곳에서 살게 만들어 주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도, 제사장 나라의 신분도 상실하고 결국 포로가 되고, 선물로 주어진 땅도 빼앗겨 수치를 당하는 백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부끄러운 백성, 얼굴을 들 수 없는 백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능욕을 당하는 업신여김을 당하는 백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 자유 잃은 백성, 집 없는 백성, 미래가 없는 백성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럽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해주신다는 것입니까?
수치와 능욕대신 배나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수치가 변하여 기쁨이 되고 능욕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게 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고통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한 순간의 기쁨이 아닙니다. 빼앗을 수 없는 영영한 기쁨입니다. 1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는 기쁨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는 메시야를 통한 기쁨입니다. 복음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복된 소식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2)” 

이 기쁨은 한 순간 있다 살아지는 단순한 감각적 기쁨이 아닙니다. 상실되면 없어지는 부자가 되고 승진하고 권력을 누리는 소유에 의한 기쁨이 아닙니다. 신랑되신 우리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기쁨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기쁨입니다. 가난해져도 병들어도 실패해도 잃지 않는 기쁨입니다. 초가 삼간도 만족하는 기쁨입니다. 

“초가 삼간도 나는 만족하네 값진 재물도 내겐 없지만 내게 주어진 하늘나라에 가면 금수정 길을 거닐겠네 내게는 하늘 저 위에 집 있네 햇빛 비치고 찬란한 그 곳 그 날이 오면 다시 방황치 않고 순황금 길을 거닐겠네 나 가난해도 외롭지 않네 천국길 가니 실망없다네 나그네로서 면류관쓰고 거문고 타는 천국가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예루살렘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구원받는 성도입니다. 적용하면 구원받은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여호와,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붙들어주시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기쁨이 된다는 말입니다. 

왜 기뻐합니까? “이는”이라는 말로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옷을 입히셨다는 말입니다. 신랑되신 우리 예수님께 우리를 신부로 단장하여 주었습니다. 가장 큰 기쁨은 예수님의 오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할 때 천사가 말합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0)”

기쁨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성취의 기쁨, 베품의 기쁨, 존재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는 기쁨은 바론 존재의 기쁨입니다. 누림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주님 한 분으로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았던 공자는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라고 말하며 인생의 단계를 지와 호와 낙의 3단계로 구분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최고의 단계는 낙의 단계라는 것입니다. 음악을 아는 사람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음악을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과 다릅니다. 

이 즐거움을 소유한 자들은 능욕을 받아도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 5:41)"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즐거워했습니다. 바울을 죽을 지라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7)" 

스데반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고후 7 : 4).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유의 기쁨 정도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베푸는 것으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존재의 기쁨이고 영적인 기쁨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시적으로 표현합니다.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으로 움돋게 함같다고 했습니다. 세계 곳곳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들이 생동력있게 나타날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열방 앞에 하나님의 의와 찬송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을 에베소서에는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엡 1:3)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4)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5)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6)”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하박국 선지자는 노래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7)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8)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합 3:19)” 큰 기쁨은 작은 슬픔을 잊게 만듭니다. 

오늘 2009년 두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면 어제보다는 내일이, 올해 보다는 내년이,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좋아지기를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우리의 기업이, 우리의 삶의 질이 작년보다 더 좋아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들입니다. 올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있는 교회, 과거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가정, 올해보다는 더 좋은 내년이 있는 기업, 지난 세월보다는 더 좋은 올 세월이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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