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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의 축복 (창 49: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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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축복 (창 49:22~26)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아닌가요? 저는 그런데 요. 그렇죠! 괜히 점잔 빼느라고 안 그런 척 할지 모르지만, 누구든지 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특히 새해가 되면 복을 기원하는 열망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은 복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복(福) 자를 곳곳에 붙여놓습니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대문에도 이부자리에도 베개에도 밥상에도 수저에도 옷에도 오만 데 복(福) 자를 붙여놓습니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즉석복권 긁을 때 본래는 벅벅 긁는 것인데 복복 긁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복을 받고 싶다는 이야기죠. 중국인도 우리와 비슷한데, 좀 재미있습니다. 설날(春節)에 복(福) 자를 붙이는데 거꾸로 붙여 놓습니다. 복이 쏟아지라는 뜻에서 혹은 복이 이미 왔다는 뜻에서 그런다는 겁니다. 서양 사람들도 사실은 마찬가지이죠. 새해가 되면 “Happy New Year!”하고 서로 축복하며 인사합니다. 이렇게 보면 복을 구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인지상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아주 좋은 복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설교 제목대로 ‘요셉의 축복’입니다. 성경에서 많은 인물들 가운데 큰 복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새해에 요셉과 그 후손들이 받았던 그 축복을 저와 여러분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본문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임종을 앞두고 열 두 아들들을 차례로 축복하며 기도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기원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축복하며 기도한 것입니다.(창49:1~2,28 참조) 그러므로 여기 나오는 모든 축복은 수천 년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었고, 또 앞으로도 성취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를 가리켜 ‘예언적 축복 기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야곱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예언하며 축복 기도한 내용을 살펴보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 중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내용이 두 아들(더 나아가 두 지파)에 관한 내용입니다. 누구누구죠? 유다와 요셉입니다. 본래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 앞에 아버지 야곱 앞에 많은 죄를 지은 결과 장자권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 대신 그 장자권이 다른 아들 다른 지파에게 옮겨집니다. 

4남인 유다는 ‘영적인 장자권’을 이어 받습니다. 그 내용이 창49:8~12에 있는데, 거기 보면 이스라엘의 왕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유다 지파에서 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자는 왕(다윗과 그 후예들)을 상징하고, 실로는 평화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11남인 요셉은 ‘육적인 장자권’을 이어 받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 다른 지파들보다 많은 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대상5:1~2에 이런 사실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1 ...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주권자는 왕을 가리킵니다. 유다 지파에서 왕(궁극적으로 메시아)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리고 육적인 장자 명분은 요셉에게 넘어갔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축복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장자의 축복’입니다. 


[1] 요셉이 받은 축복 : 무성한 가지   

그러면 요셉에 받은 그 축복은 과연 어떤 것인가요? 본문 22절을 보면, ‘무성한 가지’라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 ”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사막성 열대 기후의 지역에서 샘물은 문자 그대로 오아시스입니다. 그곳에 심겨진 나무에서 가지(덩굴 같은 것)가 뻗어 무성해진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축복에 관해서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은 아마 없을 겁니다.   

시1:3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 은유법이죠. 물이 계속 공급됨으로 항상 잎이 푸르고 열매가 맺힙니다.  

23절 이하를 보면, ‘무성한 가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축복인지 언급합니다.   

① 풍성한 축복 :  

첫째로, 요셉의 축복은 풍성한 축복입니다. 25절(하)을 보십시오! “ ...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하늘의 복’은 비와 햇빛, 공기 등을 가리킵니다. ‘아래의 복’은 물의 근원 샘의 원천을 가리킵니다. 우기가 짧고 건기가 긴 사막 지방에서 이런 복은 정말 귀중한 축복입니다. 그리고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은 짐승과 자손이 번성하는 복을 가리킵니다. 지금이야 분유가 있어서 괜찮지만 옛날 우리나라도 어머니 젖이 안 나오면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었잖아요. 젖이 안 나오면 옆집 아주머니에게 가서 얻어 먹이고, 미음을 끓여 먹이고 그랬습니다. 젖이 나오는 것도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짐승이 새끼를 낳는 것도, 사람이 자식을 낳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특히 고대 농경사회에서 다산(多産)은 정말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하늘의 복’은 1차적으로 샘물의 원천을 얻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위해 부으시는 신령한 복을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축복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풍성한 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이라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② 월등한 축복 :   

둘째로, 요셉의 축복은 월등한 축복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비해 더욱 큰 축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26절.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야곱이 지금 축복하는데, 자신이 이전에 아브라함과 이삭으로부터 받은 것보다 큰 축복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아들들에 비해 월등한 복을 받을 것임을 증거합니다.   

실제로 요셉과 그의 자손들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두 몫을 받았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땅을 분배할 때 두 지파 분량의 기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요셉 지파라고 하지 않고 요셉의 두 아들 이름을 따서 므낫세 반(半) 지파, 그리고 에브라임 반(半) 지파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각각 한 몫씩 차지합니다. 이스라엘의 장자는 다른 형제들보다 두 몫을 얻게 되는 규정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겁니다.   

③ 안정된 축복 :  

셋째로, 요셉의 축복은 안정된 축복입니다. 여기서 ‘안정되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고난이나 풍파가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노라면 누구나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됩니다. 물론 누구나 안정을 희구하죠. 하지만 아무런 고난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가장 안정된 곳이 있기는 하다고 ... 무덤! 그렇죠. 그곳에는 아무런 고난도 없죠. 그러나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요셉과 그 후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할 정도로 큰 힘을 주신다는 겁니다. 23절~24절.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 ” 활 쏘는 자는 대적을 의미합니다. 요셉을 핍박하는 자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형제들은 그를 미워하여 노예상인에게 팔아버렸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살이,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살이, ... 그러나 요셉은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냈습니다. 더 나아가 그 고난을 이기고 나니까, 그런 고난들 때문에 오히려 잘 됐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끌려갔던 것도 감옥에 들어갔던 것도 나중에 보니까 그가 대제국 애굽의 총리가 되는 지름길이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그의 축복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중단시키지도 못했습니다. 

26절(하). “ ...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 ” 여기서 ‘영원한 산’ 같다는 것은 항상 변함없이 서 있는 산처럼 사라지지 않고 영원무궁하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요셉이 받은 안정된 축복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영적으로 육적으로 풍성한 축복, 조상보다 형제들보다 월등한 축복, 그리고 고난이 와도 이겨내고 영구히 지속되는 안정된 축복! 요셉의 축복이 이런 것이라면 우리도 받고 싶지 않습니까? 아무쪼록 금년에, 아니 남은 생애 내내 이런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요셉이 축복을 받은 비결 : 하나님의 임재  

그럼 과연 요셉과 그 후손들이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임재’ 때문이었습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 그 비결입니다.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 ” 무성한 가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샘 곁에!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게 아닙니다. 샘 곁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샘에서 흐르는 물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축복의 원천이신 하나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복은 인간이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24절(하)~25절 보세요! “24 ...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 ” 요셉이 받은 축복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의 인생 가운데 임재하시면서 도와주시며 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기록을 잘 살펴보면, 요셉의 생애 기록 가운데 계속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더라.” 마치 음악에서 교향곡에 테마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잘 아시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 교향곡(運命交響曲) 있죠. 그 테마가 뭔가요? “딴-딴-딴- 딴~ 딴-딴-딴- 딴~” 이 테마가 중간 중간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요셉의 인생 테마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구체적인 성경 구절을 인용해 드리죠. 먼저 창39:2~3 보면, 그가 형제들의 미움을 사서 노예상인들에게 팔려간 후 애굽 왕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가 있을 때의 기록이 나옵니다.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또 하나 창39:23을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추파를 던지다 거부당하자 겁탈하려 했다고 모함해서 감옥에 갇혔을 때 기록이 나옵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표현이 계속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게 요셉이 축복을 받은 유일한 비결입니다. 말하자면 요셉 자신이 대단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하신 겁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주시면 모든 게 풀리게 됩니다. 여러분, 인생이 꼬이고 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겁니다. 죄는 영적인 절연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단절시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란 말이 바로 영적인 사망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본문 22절에서 ‘무성한 가지’라는 표현을 다시 생각해 보세요! 나무가 아무리 크고 좋아 보여도 샘물 곁에서 멀리 떨어져 보세요! 어떻게 됩니까? 점차 시들어 죽고 마침내 말라 죽습니다. 결코 무성한 가지가 뻗어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까? 죄 문제를 해결해야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소통함으로 모든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저절로 이뤄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소통을 더욱 더 원활히 하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신령한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럴 때 인간관계도 회복되고, 물질관계도 회복됩니다. 이게 바로 형통의 원리, 일명 3통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신통(神通)이 이뤄지면, 사람과 소통하는 인통(人通)이 이뤄지고, 마침내 물질과 소통하는 물통(物通)이 이뤄집니다. 이 원리를 잘 담고 있는 성경구절이 바로 요삼2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신경 써야 될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 유지 발전시킴으로 영혼이 먼저 풍성해 지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혹시 고난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축복의 역사가 중단되지 않습니다. 거꾸로 매달아놓아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결국은 축복이 됩니다. 요셉을 보세요! 노예가 되어도 죄수가 되어도 오히려 더 잘 됐잖아요. 이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롬8:28)의 뜻입니다. 

링컨 대통령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809년 켄터키 오두막에서 태어나 가난과 궁핍 가운데 수없는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9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겨준 작은 성경책과 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끈을 놓지 않은 겁니다. 1980년 2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실린 공익 광고는 그의 생애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는 초등학교를 9개월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는 잡화점을 경영하다 파산했는데, 그 빚을 갚는 데만 무려 17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는 주 의회 의원 선거에서 낙선했고, 상원 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했으며, 부통령 선거에서도 낙선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이름을 항상 A. 링컨이라고 서명했다.” 그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심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고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격려하십시오! 링컨이 자신에게 A를 주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믿음으로 자신에게 A+를 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요셉이 축복을 받은 목적 : 나눔의 사명  

대개 많은 사람들은 여기까지 관심이 있습니다. 축복받았다, 성공했다, ...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끝낼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성도들은 다릅니다. 사실은 ‘그 다음’(Next)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더 높은 차원의 축복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하나님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복 주실 때 분명한 뜻과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요셉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을 축복하신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 목적은 ‘나눔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겁니다. 본문 22절을 다시 잘 보십시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가지가 얼마나 무성한지 담을 넘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 축복이 차고 넘쳐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미쳤다는 겁니다. 

정말 그랬죠.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축복을 받는데, 그에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방에 펴져나갑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복이 임합니다. 보디발의 집에 복이 임하고, 감옥에 복이 임하고, 총리가 된 후에는 그를 팔았던 형들을 포함해서 온 가족을 애굽으로 이민 초청하고, 7년 기근을 잘 대비해서 여러 나라와 애굽을 구제하고, ...

이런 목적은 비단 요셉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모든 성도들에게 부여된 목적입니다. 창12:2 보면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에게 주시는 복이 흐르고 넘쳐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축복의 통로(Pipe of Blessing)가 되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마13:31~32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이게 바로 천국의 원리입니다. 겨자씨 같은 복음이지만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되고 축복을 받으면 나중에는 큰 나무가 됩니다. 새들이 깃든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 세계 만민에게 그 축복을 나눠주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복을 나누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고갈시키는 게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더욱 축복을 확대시켜 줍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주신 축복(신앙, 물질, 시간, 건강, 재능, 직업, 지위, 권세, 명예 ... )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에게 나눠주면 나 자신에게 더욱 넘치는 역사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옛날 수도가 없던 시절 여름철에 물이 마르면 펌프질을 해도 헛돕니다. 그러면 마중물을 한 바가지 붓습니다. 그 아까운 물을 왜 붓습니까? 몇 배가 더 되는 물이 퀄퀄 쏟아져 나올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전11:1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아무 계산 없이 나누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중에 생각지도 않은 때에 되갚아 준다는 겁니다. 

여러분, 미국의 프로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 아시죠? 지금은 은퇴했지만, 농구의 황제로 명성을 날린 사람입니다. 그가 시카고 불즈 팀에 소속되어 있을 때 시카고 경제를 쥐락펴락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대단한 인물이죠. 그런데 그에게 이런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가난한 무명 시절 시카고 불즈 입단을 위해 가야 되는데 비행기 삯이 없어서 친지들에게 빌려서 비행기를 탑니다. 그런데 막상 공항에서 내리자 택시 탈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택시들을 붙잡고 기사에게 사정합니다. 성공하면 나중에 꼭 갚겠다고. 그랬더니 미친 놈 취급을 하면서 가버립니다. 그런데 한참 후 한 택시 기사가 쾌히 승낙합니다. 택시가 도착하자 그는 꼭 기억하고 갚겠다고 다시 약속합니다. 그러자 기사는 웃으면서 “됐어요! 좋은 경기나 보여주세요! 내가 첫 번째 팬이 되어 주죠!” 이렇게 말하고 가버립니다. 그리고 그 기사는 잊어 버렸습니다. 

그 후 마이클 조던은 승승장구했고 방송에 나가서 인터뷰를 할 때 그 기사를 애타게 찾았습니다. 결국 극적으로 만났고, 그 기사는 덩달아 유명 인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기사가 마침 한국인이어서 교민 사회에서 회자가 되었습니다. 마이클 조던은 그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시카고 경제를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를 움직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그 택시 기사분입니다.”
  
이게 바로 ‘축복의 확대재생산’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을 위해, 이웃 사랑과 섬김을 위해 사용하면 더욱 넘치는 축복의 역사가 나에게, 이 세상에 확장되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작은 헌신이 큰 역사를 이룹니다. 

여러분! 과연 고귀한 인생이 어떤 겁니까?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 고귀함에는 의무가 수반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많은 것을 주셨는데, 자기만을 위해 천박하게 흥청망청 사용한다면 반대로 “노블레스 멜러디”(Noblesse Malady)가 됩니다. 멜로디(Malady)는 병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오히려 개인적인 사회적인 병폐로 만든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 행복이 계속 지속되고 풍성해지려면 단순히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차원의 행복을 넘어서야 합니다. 영원히 남는 가치있고 의미있는 인생(Meaningful Life)을 살아야 합니다. 나눔의 사명을 감당하는 삶이 바로 그런 겁니다. 

여러분, 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어떤 복을 구하십니까? 우리 모두 요셉의 축복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 더 나아가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가 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축복을 받고, 또 그것을 나눔으로 더욱 더 풍성케 되는 승리의 역사가 계속 확장되어 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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