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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 (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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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해방의 하나님 (출 20:1~3)

 
계명은 부담스러운 족쇄가 아니라 인생의 나침반과 같습니다.
 
 목회를 시작하면서 성도님들과 반드시 나누고 싶은 두 가지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주기도문이고 또 하나는 십계명입니다. 주기도문은 산상설교 가운데 나오는 신약의 보석과도 같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입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은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면서 시내산에서 “이제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자다” 라고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작년에 주기도문에 대한 설교에 이어 새해에 십계명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십계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십계명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성경전체를 아는 것과 같다.” 그만큼 십계명에 성경전체의 메시지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명, 규율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에 거부감이 듭니다. 옛날 중?고등학교 시절에 규율부에게 걸려 곤욕을 치루었던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조금 잘못하면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계명이기에 우리 마음속에 법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이라는 말을 들으면 겁부터 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조건으로 십계명을 내세우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즐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십계명을 주셨다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십계명은 우리 인생을 위한 나침반과도 같습니다. 길 잃은 사람이 밤하늘에서 찾은 북극성과도 같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하는 가장 좋은 친구이자 동반자입니다. 이미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을 읽고 묵상한 신앙의 선배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편 19:7-8) 

 율법을 읽고 묵상하면 그것이 영을 소생시키고 기쁜 마음을 갖게 하며 눈을 밝혀 지혜를 얻게 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과 인간에 대한 계명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1계명에서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인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중 여덟 개의 계명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이고, 두 개의 계명, 즉 4계명인 ‘안식일을 지켜라’와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만 긍정적인 명령입니다.
 
십계명의 서언은 하나님의 자기소개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하십니다. 십계명 서언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애굽기 20:2)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소개서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의 하나님, 너는 나의 백성”이라고 자신을 행동하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나서 약 3개월이 지난 후 시내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는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자유자가 되었다는 것을 축복하기 위해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먼저 너희를 구했다. 내가 너희를 저 억압된 백성 속에서 건져냈다. 내가 먼저 너희들에게 선물을 주고, 내가 먼저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제 자유자가 되어 자유자로서 십계명을 지켜라.” 

신앙에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하나님의 주도권입니다. 또 다른 부분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대한 책임입니다. 이 두 가지가 늘 함께 역동적으로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우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행동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구약의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인데 우리는 특히 여기에 나오는 동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 (출애굽기 3:7-8) 

하나님은 인간의 궁핍과 비참함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귀로 들으시는 분입니다. 이 말씀에 등장하는 동사는 ‘보았다’, ‘들었다’, ‘알았다’, ‘내려갔다’, ‘인도했다’, ‘데려 가겠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고, 이 시대에 우리도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기에 주님 앞에 예배드린다는 말씀입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예근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이유는 예배공동체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제의 예배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발적인 마음, 기쁜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은혜에 감사하여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려 400여 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노예로 살았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도 일본에 36년 동안 억압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해방 된지 60여년이 지나서도 아직까지 일본의 잔재가 남아있다고 걱정합니다. 그런데 400여 년 동안 애굽의 노예로 산 이스라엘 백성들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노예근성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언어와 생각과 행동이 노예에게 붙잡힌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명령과 복종이라는 두 가지의 틀밖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노예에게는 꿈과 비전이 없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이 없다면 내가 노예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꿈을 가지더라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절망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유에 대한 책임도 없었습니다. 몸에 배어있는 것이라고는 노예근성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있던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은 잠깐의 시간에 탈출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복지라는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는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애굽을 떠나올 때도 주저했습니다. 정말 노예에서 자유자가 될 수 있을지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통해서 그들은 애굽에서떠났습니다. 그런데 광야로 들어왔을 때 그들에게 있던 노예근성은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노예의 생각과 언어와 가치관이 그들의 삶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열두 명을 가나안 약속의 땅에 정탐꾼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열 명의 정탐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고합니다. “우리는 저 땅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들어가기도 전에 죽게 될 것입니다.” 꿈과 비전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노예적인 생각 속에 묻혀버린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변화와 전진, 도전과 모험의 정신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으로 금방 끌어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광야 학교를 지나게 하면서 그들의 때 묻은 노예근성들을 벗겨버리려고 하나님은 애를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만 의지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주시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보이는 것에 절하는 어리석음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노예근성에 묶여있는 사람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자유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애굽에 있는 자리를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옛 것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합니다. 우리의 외적인 모습은 조금 변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배도 드리고 직분도 맡았지만 내면은 아직 노예근성에 묶여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돈에 집착하는 돈의 노예가 되어있지 않은가?
명예에 집착하는 명예의 노예가 되어있지 않은가?
정욕에 집착하는 정욕의 노예가 되어있지 않은가?

내 속에 나를 억압하고 하나님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 들어 있지 않은지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겉모습은 쉽게 바뀝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을 떠나 광야까지 와서 자유자가 되었으나 끊임없이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애굽에 있었으면 비록 노예지만 먹고 마실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투덜거렸습니다. 의식과 내면이 변화되지 않는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닙니다. 

노예는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합니다. 노예근성은 거지근성과 비슷합니다. 끊임없이 받기만을 바랍니다. 자발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무조건 명령과 복종만 있습니다. 책임성이 없고 비겁하며 비열합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못된 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유를 가르치십니다. 해방의 역사를 몸으로 체험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주십니다.
“너는 이제 노예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다.” 

십계명을 뒤집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던 말씀은 하나님도 섬기면서 다른 수없이 많은 신들도 섬겼다는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것들은 현재 우리 속에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식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돈과 재물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명예와 권력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처럼 최고의 가치관으로 삼고 사는 모습이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십계명의 후반부는 도덕적인 관념이 사라진 노예들에 대해 말합니다. 살인하는 것, 도적질하는 것, 간음하는 것, 거짓말을 일상생활에서 하는 사람은노예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더 이상 종 된 모습으로 인생을 살지 말라. 너희는 자유자다. 하나님만 두려워 할 수 있고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가르치고 사랑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스라엘을 지배한 바로 왕은 사이코패스형 지배자였습니다.

애굽은 바로라는 임금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바로는 교활하고 자기 권력만 믿은 사람으로 시대의 어둠을 반영하는 자입니다. 바로 왕을 오늘의 심리학적인 언어로 분류한다면 어떤 인간상에 속할까요? 대니얼 골먼(Daniel Goleman)이라는 사람이 "SQ 사회지능"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를 파탄시키고 어둠을 조장하는 세 유형의 인간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결코 배려하지 않는 어둠의 사람들의 성격을 세 가지로 지적하는데, 바로 이런 모습이 애굽의 왕인 바로에게 있었습니다. 

첫째, 나르시스형입니다. 한 가지 동기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인물입니다. 자기 영광에 대한 환상을 지닌 자아도취적인 인간입니다. 사랑받기보다는 존경받기만을 원합니다. 자신의 영광에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외면하고 동정심도 느끼지 않습니다. 아부꾼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타인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나를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왕이 그런 자리에 오른 인물입니다. 자기 위에 어느 누구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광야에서 백성들과 함께 나아가서 여호와에게 예배드리고 돌아오겠다고 했을 때 바로는 거절했습니다. 자신만이 살아있는 신이고 다른 신은 어디에도 없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마키아벨리형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인물입니다. 목표달성을 위해서 부하들을 냉혹하게 착취하는 인물입니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입니다. 자기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바로가 그랬습니다. 열 가지 재앙에 고통을 받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세와 대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첫째 아들이 죽고 나서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출애굽 했을 때 다시 홍해까지 쫓아왔는데 그것이 바로 왕입니다.

세 번째, 싸이코패스형입니다. 사람을 인격으로 보지 않고 사물로 보는 인간상입니다. 통계적으로 백 명 중 한명정도 이런 증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반사회적인 성격 장애인으로 무책임합니다. 나쁜 짓에 대한 후회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겪게 될 감정적인 고통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속임수로 사람을 사용하다가 버립니다. 싸이코패스형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다른 사람이 비용을 대는 자기 만족게임에 불과합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이 그 비용으로 들지라도 행동해 나갑니다. 감정적으로 냉담하고 무관심합니다. 자기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평가합니다. 바로가 그랬습니다. 후회가 없고 자기가 세계의 지배자이고 왕이며 법입니다. 20세기에 등장한 히틀러, 스탈린은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 데도 그대로 두었습니다. 김일성과 같은 독재자가 바로 싸이코패스형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우리를 자유자로 만나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현실 속에도 애굽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서도 어둠을 만들어가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의 애굽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과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부터 용서하시고 죄책감으로부터 자유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대신 담당하시고 치유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죄악으로부터의 자유, 허물로부터의 자유를 허락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셔서 자유자로 만드시고, 자유자로서의 십계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십계명이란 노예의 계명이 아닙니다. 자유자만이 누릴 수 있는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꿈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억누르는 죄악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셔서 주님께 다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유자로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참된 복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과 같이 종 되었던 땅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생명의 양식을 통해서 다시 힘과 용기를 얻고 담대함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하면서 살아가는 복된 믿음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어둠속에서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자이시고 자유와 해방자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자유하게 되었으니 죄와 죽음의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된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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