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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 삼는 거룩한 습관 (마 9:3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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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삼는 거룩한 습관 (마 9:35~10:1) 


  “우리는 만나면 힘이 됩니다.”에 나오는 이야기다. 제1장은 ‘고슴도치 딜레마’인데, 고슴도치는 약 3만 개의 가시를, 몸에 지니고 있다. 그 가시는 다른 짐승의 몸을 뚫을 만큼 강력하다. 가시가 몸에 박히면, 곪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고슴도치들은, 서로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고슴도치는 외로운 동물이다. 떼로 다니지 않고, 늘 혼자 다닌다. 늑대와 양, 코끼리, 까마귀마저, 떼로 다니지만, 고슴도치만은 무리를 짓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고슴도치가 언제나, 혼자 있지 않는다. 늦은 가을, 젊은 고슴도치의 마음에 사랑이 싹튼다. 

  그런데 고슴도치의 사랑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암컷은 1년에 딱 한 번 데이트를 허락하는데, 그 기회는 눈 깜짝할 새, 닫아버린다. 게다가 한 번 닫힌 고슴도치 아가씨의 마음을 열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사실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익히 알려졌다. 가시로 똘똘 뭉쳤기에, 가까이 할 수 없다. 

  이것이 고슴도치의 딜레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딜레마다. 인간은 두려움과 분노의 가시로 똘똘 뭉쳐있기에, 가까이 할 수 없다. 인간들이 지닌 가시는 거부, 비난, 분노, 오만, 시기, 경멸로 불린다. 어떻게 해야 상처를 입지 않고, 고슴도치와 같은 상처받은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나? 

  가시를 잘 숨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여지없이 가시가 보인다. 가까이 하면 이 가시는, 사람들의 피부를 깊숙이 파고든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고, 곪게 만들며, 심하면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우리도 외로움을 타면, 이웃에게 다가가지만, 문제는 이웃들과 함께 있는 순간,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입기 시작한다. 그래서 다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이, 바로 고슴도치의 딜레마요, 인간의 딜레마이다. 우리 인생 주변에는, 가시투성이 고슴도치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만 고슴도치 인생이 아니라, 나도 역시 누군가에게 고슴도치가 된다. 그러면 끊임없이 상처주고 상처받는 인생, 과연 이런 인생도,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기적 중의 기적은, 고슴도치들 사이에도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가시를 누그러트리고, 고슴도치처럼 춤을 추면된다. 서로 등을 보이지 말고, 앞발을 서로 맞대고, 뒷발로 서고, 안아주는 고슴도치의 사랑을 나누면 된다. 이것을 고슴도치 춤이라 한다. 등을 돌리지 말고, 보이는 그대로 와서, 하나님을 향해 서고, 서로 맞대고 사랑을 나누면 된다. 

  상처를 무서워하지 말라. 상처는 우리에게만 있지 않고,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도 있었다. 예수님은 상처투성이로 십자가를 지셨다. 배신당하시고, 무시당하시고, 버림받으셨다. 상하고 찢기셨다. 이처럼 상처 받으신 예수님이기에, 상처받은 자의 아픔을 아신다. 

  예수님의 상처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상처에서 거룩한 피가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피가 나왔다. 그래서 헨리 나우엔은 예수님을 ‘상처받은 치유자’라 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로 상처를 치유 받은 사람은, 상처 받은 이웃의 치유자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상처받은 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제자 삼는’ 사역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공생애 대부분은 (35)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셨다.’ 여기에 주님의 삶을 투자하셨다. 바로 이런 사역을 위해, 제자 삼으셨고, 항상 여기 3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사역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3년 동안 함께하시며 훈련하셨다. 또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처럼 제자 삼는 습관을 가지라고 부탁하시고, 세상을 떠났다(마28:19-20).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 삼는 거룩한 습관’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상처받은 이웃들을 주목해야 한다(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고 기진한 사람들의 모습을 늘 바라보셨다. 

  상처받은 이웃의 치유자가 되려면, 우선 그들의 고생하고 기진하는 모습이, 내 눈에 보여야 한다. 그러나 이 땅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자신들의 문제 속에만 너무 깊이 빠져 살아가기에, 고통 받는 이웃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너무 많다. 

  사실 이웃이 우리 시야에 들어오려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마음의 여유, 곧 공간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웃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없이 ‘쫓겨 다니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말이다. 고든 맥도날드(Gordon Mcdonald)목사는, 이런 현대인의 삶의 유형을 2가지로 나누었다. 

  (1) ‘소명에 의해 살아가는 삶’이고, (2) ‘쫓겨 다니는 삶’이라 부르고 있다. 오늘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인식한지 못한 채” 그날그날을 충동적으로 쫓겨 다니며 산다. 이런 사람들에게, 고통 받는 이웃들이 보일리가 없다. 

  이런 사람에게 이웃은, 모두 나를 귀찮게 하는 존재들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사람들은 늘 소명의 삶을 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늘 충동적인 삶을 산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인생의 그림이 아니다. 사실은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2가지 유형의 삶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실제 모습이다. 많은 분들이 읽은, 미국의 유명한 정신 의학자이며, 뉴 에이지 지도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생 수업’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분이 한번은 뉴욕에서, 1,500여명의 관중 앞에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자, 수백 명이 사인을 받고자 기다리고 있었다. 사인을 서둘러 했지만, 공항 갈 시간이 임박해서, 사인을 다 끝내지 못하고, 공항으로 떠났다. 그는 헐떡이며 공항 청사에 들어가, 화장실 변기에 들어가 앉아 있는데, 갑자기 화장실 문틈으로 누군가가, 자기가 쓴 책과 펜을 들이밀며 

  “박사님!, 죄송하지만, 사인 좀 해주세요!”라고 했다.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로스 박사는 서둘러 볼일을 마치며, 밖으로 나와 이런 무례한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얼굴을 보고자 했는데, 뜻 밖에 수녀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하자, 갑자기 그 수녀가 말을 가로채며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더란다. “하나님의 은총이라니요?”하고, 약간 퉁명한 소리로 반문했더니, 수녀가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고 한다. 

  “사실은 박사님, 제 동료 수녀가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는데요. 박사님을 너무나 만나고 싶어 했고, 박사님의 강연장에도 오고 싶었는데, 몸이 너무 아파서 불가능하기에, 그 친구에게,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선물로, 강사님의 강연을 녹음해서 들려주고, 

  박사님 친필 사인이 담겨있는 책을 선물하려고 했는데,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서, 사인을 받지 못하고 공항으로 왔는데, 박사님이 저와 같은 비행기 출구, 같은 화장실에 들어올지 누가 알았나요? 그러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때 로스 박사는 화냈던 것을 후회하며, 이웃을 치유하는 진정한 힘은, 어떤 상황에서도 어려운 이웃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임을 깨우쳤다고 고백한다. 이웃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제자 삼는 삶은, 무엇보다 상처 받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모습을 주목하는데서 시작된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고생하고 기진하는 모습이 보이나요? 고생하고 기진하는 인생들이 보일 때, 그것을 바로 사명으로 알기 바란다. 우리 주변에 고생하고 기진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상처받은 이웃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36).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웃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하면, 이웃들을 주목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 우리는 얼마든지 이웃들의 고통을 보고도, 그 곁을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눅10:25-) 말씀같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속의, 제사장과 레위사람처럼 지나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힘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다. 사마리아 사람을 행동하게 한 힘도 바로 긍휼의 마음이었다. 

  (눅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불쌍한 마음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에게 다가가서, 긍휼히 여기는 행동을 했다. 이 긍휼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양을 기르는 목자의 심정이요, 제자를 양육하는 마음이다. 

  제자훈련은, 단지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한다. 목자의 심정은 ‘불쌍히 여기시니’(스플랑크니조마이) ‘내장이 뒤틀릴 정도로 아프다’는 말이다. 히브리어로 불쌍히(여기다)’는 말이 ‘라함’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태, 즉 자궁’은 ‘레헴’이다. 

  불쌍히 여긴다는 단어는 ‘자궁’이라는 명사에서 나왔다. 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어머니의 태를 의미에서 나왔는가? 함께 할 동안, 가장 좋은 양식을 공급하며, 피를 흘리며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compassion으로, com(함께) + passion(고통)이란 말의 합성어다. 

  불쌍히 여김은, 함께 고통을 나누는 마음이다. 함께 고통을 나누려면,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동안, 단순히 사람을 보고 지나치지 않고, 불쌍히 여기셨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이른 아침 어떤 식당에 갔는데, 얼마나 종업원이 불친절하던지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잠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그녀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무슨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평소 5불이면 될 팁을 10불을 놓고 나왔다. 

  막 식당에서 나오는데, 그 종업원이 좇아오며 “손님, 10불이 팁은 아니니, 잘못 놓고 나오셨어요?” 그래서 “팁이다. 당신 얼굴이 안 돼 보여서, 용기를 드리고 싶었다.”고 하자, 갑자기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 

  “죄송하다. 제가 오늘 아침 무례했다. 제가 어제 남편에게 이혼을 당해서 그랬으니, 이해해 달라”고 했다. 그날 아침 목사님은 그녀 곁에 앉아 복음을 전하고, 그 영혼을 구원했다고 한다. 이처럼 “제자 삼는 마음”은, 바로 불쌍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어떤 수도사가, 인도의 좁은 시골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소리와 동작이 멎은 듯한, 정적 감을 느꼈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살펴보니, 얼마쯤 떨어진 곳에, 코브라가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흔들거리면서, 무언가를 뚫어지게 쏘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보니까, 옆에 있는 나무 가지 제일 아래 부분에, 새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그런데 이 새는 뱀의 눈빛 최면에 걸려, 꼼짝 못하고 가만히 뱀만 쳐다보았다. 수도사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조금 있으면 잡아먹히게 되는데, 저 불쌍한 새는 날아가지 못하는구나. 어떻게 살릴 수 없을까? 

  만약 내가 저 새를 살리려고, 무슨 행동이라도 하면, 저 코브라가 나를 보고 달려들 텐데, 어떻게 하면 좋지?’ 조금 망설이다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이놈아!”하며, 소리를 지르고 팔을 휘두르면서, 뱀을 행해 달려갔다. 그러자 코프라가 한번 쳐다보더니, 그 다음에 고개를 숙이고, 유유히 사라졌다. 

  정신을 차린 새는 창공을 향해, 다시 푸드득거리면서 날아갔다. 오늘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은, 뱀으로 상징되는 마귀의 눈빛에, 최면이 걸려 있다. 그들은 자기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꼼짝 못하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와야 한다. 그렇다면 뱀의 눈빛을 깨뜨리고, 우리를 구원하실 자가 누구인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사탄의 권세를 짓밟으시고 승리하셨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대속해주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신 구원자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수도사가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가자, 뱀이 도망간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하며 나아가면, 사람을 최면에 빠뜨린 사탄의 권세가 물러가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우리 주변을 잘 보면, 아직도 뱀의 눈빛에 최면이 걸린 채,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무심코 넘기면 안 된다.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 우리가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희생해주고 봉사해주면, 그들의 영혼은 구원 받게 될 것이다. 


3. 상처받은 이웃을 제자로 섬겨야 한다. 

우리가 상처 받는 이웃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다면, 우리는 제자 사역이 출발할 준비가 되셨다고 할 수 있다. 제자사역을 목자사역이라고 달리 표현할 단어가 있다. 

  우리가 한번 세상에 태어나, 가장 존귀한 사역이 있다면, 고생하며 괴로워하는 영혼들을 보듬어 안고, 돌보는 목자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동안 교회는 이런 사역은, 안수 받은 목사들만 할 수 있는 사역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하나님은 평신도사역 운동을 세계적으로 일으키시며, 이런 사역의 주인공이 되라고, 모든 성숙한 성도들이어야 함을 깨우치고 계신다. 이런 하나님의 운동에,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계시는지요? 

  오늘 우리 교회 안에는, 여러 많은 직분이 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여러 위원장님, 모두 다 주님이 주신 귀한 직분이다. 그러나 정말 귀한 직책은 목자들이다. 그들이 주님의 의도하신 대로, 그 중요한 일을 매주 마다 감당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들이야말로, 바로 고생하고 기진하는 영혼들과 씨름하며, 그들을 돌아보는 일을 하고 계시는, 진정한 주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마9:36)절에서, 고생하고 기진한 영혼들, 즉 목자 없이 방황하는 영혼들을 불쌍하다고 하신 주님은, 

  (37-38)절에서 이런 영혼들을 거두어 드리도록, 추수할 일꾼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하라고 기도를 부탁하신 후, (10:1)절에서 열두 제자를 부르셨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9장 마지막 부분과, 10장 1절과 연결하는 교훈의 핵심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고생하며 기진하는 영혼들을 위하여 제자들을 세우셨다는 말이다. 그러면 제자의 할일이 무엇인가? ‘목자로서 양떼들을 잘 돌보는 일’이다. 이 세상에 고생하고, 기진해 있는 영혼들이 한 둘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12명을 책임지라고 모범을 보여주셨다. 12명도 많다면, 우선 3명만 책임져 보라. 누구든지 우리 주변에 힘들어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세분을 만나 기도하며, 목장모임을 시작해 보라. 그리고 그 3명에게, 각각 3명만 데리고 오도록 격려해 보자. 그렇게 두 번만 하면, 12명이 된다. 

  셀 교회 운동가들은 12명을 가르쳐, 기독교 기초 공동체라고 부른다. 어쩌면 12명은 우리 인생이, 진지하게 책임질 수 있는, 최대 인원이라고 생각된다. 예수님도 12명을 돌보셨는데, 그 이상을 책임지겠다고 하면, 예수님의 모범을 넘어서려는 만용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목장모임을 통해, 12명을 늘 책임져 보자. 3명으로 시작하자. 그들과 함께 고통하며 함께 기뻐하며, 말씀과 기도로 삶을 나누어 보자. 거기서 함께 치유를 경험하고, 함께 비전을 회복하고 함께 일어나,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때, 민족은 치유되고 세상은 변할 것이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비전이요, 우리 교회의 존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모든 다운가족은, 목자가 되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나누어 줄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주변에 상처받은 3명과 함께 모이고, 12제자 비전을 갖자. 

  외로움은 문둥병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하나님은 외로움을 싫어하신다. 천국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지옥은 외로움과 상실의 도시이다. 진실하자. 용서는 영적 수술이다. 우리는 어울림과 따돌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같이 함께 기뻐하는 어울림을 통해, 잃어버린 영혼들을 건져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이런 꿈을 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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