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장벽을 허문 로마군 백부장 (눅 7:1~10)

  • 잡초 잡초
  • 571
  • 0

첨부 1


장벽을 허문 로마군 백부장 (눅 7:1~10)


2009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는 '장벽을 허무는 교회'입니다. 이 세상에는 높은 장벽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장벽이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배운 사람들과 못 배운 사람들 사이의 장벽도 만만치 않습니다. 세대 간의 장벽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 성적인 장벽도 높습니다. 남성 못지않게 유능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정당한 대우를 못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종간의 장벽, 민족 간의 장벽도 허물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는 눈에 띄게 다인종 다민족 국가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다문화 상황이 현실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인종 어떤 민족에 대한 멸시나 편견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파간의 장벽, 종교 간의 장벽도 심각합니다. 같은 기독교임에도 불구하고 교파 간에 담을 쌓고 지내는 경우가 많지요. 아니, 같은 감리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별반 친근감을 못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불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타종교와의 장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높다 할 것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우리는 이런 장벽들을 허무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오해와 편견, 증오와 갈등만 증폭시키는 장벽은 무너뜨려야 합니다. 이해와 공평무사함, 사랑과 화해를 증진시키는 다리를 건설해야만 할 것입니다! 


 <장벽을 허문 사나이: 한 백부장의 이야기> 

본문은 예수님 시대에 높은 장벽을 허문 한 이방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가버나움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 백부장의 이야기이지요. 백부장은 휘하에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로마군의 기간(基幹)장교였습니다. 우리나라 군대 편제로 한다면 중대장 급에 해당되는 지휘관이었지요. 이 백부장이 아끼고 사랑하던 종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 부탁해서 고침을 받았다는 내용이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 당시 좀처럼 극복하기 어려웠던 여러 가지 장벽들을 허문 사람이었습니다. 

첫째로, 백부장은 신분과 계급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2절을 보세요.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여기 백부장의 종이 등장하지요. 이 종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도대체 이 병이 어떤 병인지 알 수 없지만 이와 거의 비슷한 버전이 마 8: 5-13절에도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이 종이 중풍에 걸려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했다고 했습니다. 틀림없이 불치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맸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백부장 정도의 신분이었으면 용하다는 의사, 좋다는 약을 다 써 봤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종이 유대인인지 로마인인지 성경은 밝히지 않고 있지만 유대인이 아닌 것이 확실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동거하는 경우는 드물었던 시대였기 때문이지요.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백부장이 이 종을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백부장의 인격으로 볼 때 물론 다른 종들도 사랑했겠지만 이 종을 특별히 아꼈던 것 같습니다. 새번역 성경을 보면 이 종은 주인에게 '소중한 종'이었다고 번역했습니다. 종이니 마음대로 다룬 것이 아니고 한 인격체로 존중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용하다는 의사, 좋다는 약을 다 써서라도 그 종을 살리려고 했겠지요. 그럼에도 다 실패하게 되자 그 당시 갈릴리의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귀신을 내쫓으시고 각색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자기 집 종의 죽을병도 거뜬히 고치실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유대인 장로 몇 명을 예수님께 보내어 부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여기 백부장과 종 사이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양자 사이의 신분과 계급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천년 전에 노예 제도는 합법적인 제도였습니다. 그 당시 로마법으로 볼 때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요 살아 있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짐승이나 마차와 같은 기계나 농기구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자기나 자기 집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노예를 함부로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 당시에 기록된 로마의 문서에 보면 농부들이 매년 낡고 부서진 농기구들을 폐기 처분할 수 있듯이 병들고 힘없는 노예 역시 함부로 버리는 일이 허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이 노예가 중풍에 걸렸다면 일도 할 수 없고 거동도 힘들었기 때문에 거추장스러운 짐만 되었겠지요. 이렇게 얼마든지 법적으로 버릴 수도 있고 그냥 죽게 방치할 수도 있었던 노예를 주인이 어떻게 해서든지 살리려고 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주인과 노예라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신분과 계급의 장벽을 무너뜨린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의 재산이나 도구처럼 여길 수 있었던 노예를 깊이 사랑하고 존중했습니다. 그 당시의 엄격한 신분질서로 볼 때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신분과 계급의 장벽은 만만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왜 자녀들을 명문대학에 보내시려고 안달이십니까? 학연을 통해서 신분질서를 상승시키려는 생각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종교에 있어서도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가 출세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할 수 있으면 높고 낮음의 장벽을 허물어야 할 것입니다. 백부장이 자기의 종을 끔찍이 사랑하고 존중했던 것처럼 모든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어 이웃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 인디아나 주의 작은 마을에 한 15세의 사춘기 소년이 뇌종양에 걸려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된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으로 머리카락이 다 빠졌습니다. 너무도 부끄러워 학교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대머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반의 학생들이 모조리 삭발을 했습니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자기 친구가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다 똑같이 되고자 했던 것이지요. 오늘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사회적인 신분이나 계급의 장벽은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내가 신분이나 계급이 높다고 해서 밑에 있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지시하고 권세를 휘두를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겸손히 섬겨야 할 것입니다. 

군에 가서 군목으로 복무를 해보니까 지휘관들 중에도 참 존경할만한 인격자들이 많았습니다. 계급이 중위 밖에 되지 않는 군종 참모임에도 대령인 연대장이 꼬박 꼬박 '목사님' 하고 존칭어를 쓰며 존대합니다. 그런가 하면 계급이 소령밖에 되지 않는 참모임에도 불구하고 '어이, 군종 참모'하고 하대하고 반말을 지껄이는 장교도 있습니다. 장기복무를 했던 제 친구 군목 가운데 한 사람은 계급이 대위였을 때 중령인 참모장한테 구타를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요. 주일 아침에 연대장님이나 사단장님이 교회 앞에서 작대기 하나인 이등병들에게 주보를 나눠주고 환영할 때 그 부대의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는 아주 알량한 신분이나 계급 때문에 아랫사람을 함부로 학대하고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백부장은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유대인 지도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들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님께 부탁할 때 백부장을 극찬합니다. 4-5절을 보세요.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유대인 지도자들은 백부장을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의 부탁을 꼭 들어주셔야 할 만큼 그는 유대민족을 깊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유대민족을 위해 많은 선행을 베풀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회당을 지어준 일이라는 것이지요. 

백부장은 로마군의 지휘관입니다. 정복자이지요. 유대인은 식민통치를 받는 피지배자입니다. 아무리 사이가 좋다고 할지라도 양자 간의 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을 것입니다. 유대민족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개나 소처럼 여겼습니다. 인사도 하지 않고 교제를 끊었습니다.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장벽이 너무도 높았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백부장은 이런 장벽을 허물고 가장 많이 멸시받을 수 있는 위치에서 가장 많은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록도에는 한센씨 병, 즉 나병을 앓는 환우들이 모여 삽니다. 일제 강점기에 문을 연 탓에 초대부터 5대에 이르는 원장이 모두 일본인들이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정반대되는 원장이 두 사람 있었습니다. 2대 원장 하나이(花井善吉, 1921-1929)는 한국의 풍습과 전통을 존중했고 무엇보다도 환우들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습니다. 민족 감정과 종교적인 장벽을 뛰어넘어 한국 나환자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극진히 돌보아 주었습니다. 하나이 원장이 아직 살아있었을 때 환우들이 직접 돈을 모아 창덕비를 세우고자 했지만 본인이 고사해서 못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하나이가 과로로 순직하자 그 이듬해 소록도 환우들이 자발적으로 송덕비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4대 원장 수호(周防正秀, 1933-1942)는 달랐습니다. 나환자들에게 벽돌 굽기, 가마니 짜기, 숯 굽기 등의 강제 노역을 시켰고, 도주하는 자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엄동설한에 바위 낭떠러지에 순찰도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수호 원장은 욕심이 끝이 없어서 환자들의 3개월 간의 임금을 강제로 거두어 3.3 미터 높이의 자신의 동상을 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달 20일을 '보은 감사일'로 정해 환자 6,000 여명을 자신의 동상 앞에 모아 놓고 절을 시키곤 했습니다. 결국 수호 원장은 동상이 세워진지 2년 후에 자신의 동상 앞에서 비참히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은 민족과 종교적인 장벽을 허물어서 오늘까지 존경을 받고 있고 또 다른 이는 장벽을 높이 쌓다가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는 '러브 인 아시아'라는 TV 프로를 가끔 볼 때가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자매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프로이지요. 저 역시 외국에 나가 오래 살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타국에 시집온 자매들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낯선 문화에 적응하고 어려운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 애쓰는 자매들의 생활상을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많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지 참 정답게 대해주는 가족들이나 이웃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한국인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모두 한 조상에서부터 나왔습니다. 조부라운 민족 감정으로 인해 우리와 피부색깔과 언어문화가 다른 이들을 멸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처럼 인종적이고 종교적인 장벽을 뛰어넘어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백부장은 불신앙과 불순종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백부장의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대목은 그의 놀라운 믿음에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본문에서 강조하려고 하는 핵심 메시지는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과 순종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의 믿음이 선민인 유대인의 믿음보다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9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이 이방인인 백부장만큼 큰 믿음을 가진 이를 만나지 못했다는 극찬이지요. 

도대체 백부장은 어떤 믿음을 보였기에 이와 같은 찬사를 받았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유대인 장로들이 백부장을 극구 칭찬하기 전에 이미 그에 대한 평판을 다 들어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장로들의 말을 듣자마자 백부장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리하여 백부장의 집 근처에 까지 이르렀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6-8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함께 가실 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의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굳이 자기 집까지 오실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무례하게 보이기 쉽지요. 자기가 직접 나와서 말을 하지 않고 친구들을 보내어 이런 말을 하다니요. 하지만 유대인의 율법을 알면 백부장의 이러한 행위는 결코 무례함 때문이 아니라 극도의 겸손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 관습에 따르면 경건한 유대인은 이방인의 집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행 10: 28; 신 7: 3 참조). 백부장은 이와 같이 까다로운 유대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 관습을 최대한 존중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처음 부탁할 때에도 예수님과 동족이었던 유대 지도자들을 앞세워 부탁했고 자기 집을 찾아오는 예수님에게 자기의 친구들을 보내어 굳이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백부장은 타민족의 문화와 관습을 최대한 존중할 줄 아는 관대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예수님 같은 유대인이 자기 집을 찾는 것이 결례라는 사실을 고려했기 때문에 취한 겸손의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보내어 자기 집으로 모시지 않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부를 때에도 랍비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의 종에 불과하다는 신앙적인 고백이지요. 자기는 주인이신 예수님에 비하면 미말의 종에 불과하기 때문에 도저히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장교로서 특유의 군대식 믿음을 보입니다. 군대사회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데 자기에게도 상관과 부하가 있어서 명령대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굳이 자기 집에 오시지 않고서도 명령 한 마디만 내리시면 자기의 종이 낫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병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 할 수 있으면 예수님 가까이 더 접근하려고 합니다. 친구 네 명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눕힌 채 지붕의 기와를 뚫고 예수님 계신 방으로 내린 일도 그렇지요.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더 나아갈까, 자신의 병든 환부에 예수님의 손이라도 한 번 접촉할 수 있을까, 대개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말씀 한 마디로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백부장의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 불신앙과 불순종의 장벽을 넘어설 것을 가르칩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분에 대한 기록인 성경 말씀과 설교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주님, 말씀 하나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각종 불치병을 고치신 주님, 말씀으로 노한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죽은 나사로도 말씀 하나로 거뜬히 살리신 주님께서 오늘도 말씀 하나로 우리를 고치실 줄로 믿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난 적도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고, 일체의 접촉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 주님의 말씀의 권세와 능력을 믿는 믿음 하나로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믿으려고 합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의 장벽이 상상 외로 높습니다. 바로 이러할 때 우리는 백부장의 믿음과 순종을 본받아야 합니다. 보지 않고서도 만지지 않고서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장벽을 넘어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장벽들, 즉 신분과 계급의 장벽,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장벽, 불신앙과 불순종의 장벽을 허무는데 두 부류의 사람들이 큰 기여를 합니다. 먼저 백부장을 대신해서 처음 예수님께 찾아가 부탁한 사람들은 유대인 장로들입니다. 그 다음에 백부장의 집으로 오시는 예수님께로 가서 굳이 집까지 오실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사람들은 백부장의 친구들인 로마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백부장과 예수님 사이에서 양쪽 세계의 장벽을 허무는 일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들이지요. 오늘 우리도 이러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갈등과 분열이 있는 곳을 왕래하며 평화와 일치를 불러오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백부장은 훌륭한 인격자였습니다. 자신의 종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피지배 민족인 유대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나서 예수님을 흠모하고 철저히 믿었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않고서도 종의 병을 고침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이렇게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백부장의 믿음과 순종을 본받으십시오! 일체의 장벽을 허무십시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