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자신의 주인은 누구인가? (눅 16:8~13)

  • 잡초 잡초
  • 317
  • 0

첨부 1


자신의 주인은 누구인가? (눅 16:8~13)


• 남용된 위임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재산을 믿음직한 청지기에게 맡겨 관리하게 했습니다. 그 청지기는 아마 오랜 세월 동안 주인의 수족이 되어 성실하게 일했기에 그런 신뢰를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의 처지를 잊은 것 같습니다. 자기를 주인의 자리에 세우고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이런 걸 ‘합일화’(incorporation)라고 한답니다. 권력의 단맛에 취한 그는 공사의 구별을 잊은 채 주인의 재물을 조금씩 축냈고, 또 사람들을 다소 거칠게 대한 것 같습니다. 

성경은 그의 행실에 대한 소문은 마을 한 바퀴 휘돌아 마침내 주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고 말하는데, 이 때 사용된 '소문이 났다'는 말의 그리스어 '디아발로'(diaballo)의 원뜻은 '비난하다', '고소하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대목을 "청지기가 부당하게 고발되었다"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는 주인의 의심을 샀고, 주인은 마침내 청지기를 해고하게 됩니다.

뒤늦게 후회해보아야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봅니다. 거친 들 일을 놓은 지 오래 되어 손은 곱상하고, 팔과 다리 그리고 허리와 가슴 근육은 다 물렁해져서 노동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밥을 빌어먹기도 부끄러웠습니다. 몸이 힘든 것은 고사하고, 그는 사회적으로 몰락한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딜 자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도무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앞에서 망연자실하던 그의 머리에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내가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지 않는가?’ 그는 주인에게 빚을 지고 있던 사람 하나를 은밀하게 불러 묻습니다. “당신이 내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기름 백 말입니다.” 청지기는 그에게 빚 문서를 내놓으면서 “어서 앉아서, 쉰 말이라고 적으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는 “밀 백 섬”을 빚진 사람도 따로 불러 빚 문서에 “여든 섬”이라고 고쳐 적으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가 청지기의 자리에서 떨려날 때에, 사람들이 자기를 맞아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요? 왜 기름은 50%나 탕감해주고, 밀은 20%만 탕감해줄까요?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관행을 반영하고 있는 수치입니다. 올리브 기름은 변질의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50% 정도의 이익이 적정 수준이었고, 밀은 20% 정도의 이익이 적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청지기의 회계조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주인의 이익을 없애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름대로의 저항이었나요?

• 정하고, 끊으라

하지만 청지기가 한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반응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는 우리의 예측과 달리 그는 청지기를 칭찬합니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덕 감정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청지기의 행동이 칭찬을 받다니? 윤리고 도덕이고 다 팽개치고 제 살 궁리만 하면 그만이라는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일까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비유라는 사실입니다. 비유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비유가 윤리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비유가 드러내려고 하는 지점이 무엇인가입니다. 이것을 '비유점'이라고 합니다. 

에두르지 말고 직접 말하자면 여기서 주인이 칭찬한 것은 청지기의 불의한 행동이 아니라, 살 길을 찾기 위해 그가 보인 지체 없는 결단과 실행입니다. 해고를 통보받고, 상황의 엄중함을 정확히 파악하고, 살길을 모색하고, 지체 없이 실행에 옮기는 청지기의 모습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기대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두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그렇게 단호하게 행동하기를 원하십니다. 즉 너무 늦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지체하지 말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결단하고, 실행에 옮기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살던 땅, 태어난 곳,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두 손을 모으기 위해서는 손에 든 것을 일단 내려놓아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옛 삶의 방식을 포기해야 합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자기의 전 재산을 다 팔아 진주를 샀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스한 삶을 구하는 이들은 주님의 제자라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맨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 돈의 지배 뿌리치기

주님은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조금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런 불편함은 이중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재물에 ‘불의한’이라는 형용사를 쓰고 있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이 다른 하나입니다. 돈이 무슨 죄가 있기에 ‘불의한’이라는 오명을 써야 한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돈은 교환의 매개이기 때문에 잘만 사용하면 참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옳은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한계 또한 분명한 말입니다. 사실 돈은 매혹적입니다. 그 매혹을 떨쳐버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뇌물이 올무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번번이 그 올무에 걸려듭니다. 

이제나 그제나 돈은 유사 신(pseudo-god)입니다. 주님은 돈/재물이 어떻게 사람들을 지배하는지를 꿰뚫어보셨습니다. 건강한 노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두운 거래를 통해 획득한 돈은 우리 정신을 타락시키게 마련입니다. 나는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돈을 쓰는 종교인들을 존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 실현을 위해 주위 사람들을 돈으로 타락시키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돈을 ‘맘몬’이라고 하셨습니다. 게다 ‘불의한’이라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합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딤전6:9-10)

그러면 우리도 무소유를 선언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돈의 지배력에 저항하라는 말입니다. 저항의 가장 좋은 방식은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바로 이런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몇 해 전에 태백에서 목회를 하던 후배 목사가 희한한 일을 겪었다면서 들려준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그는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밭을 임대해서 옥수수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기울인 정성만큼 옥수수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했고, 탐스럽게 열린 옥수수를 보면서 뿌듯했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사꾼이 와서 옥수수를 팔라고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을 생각이었는데 하도 집요하게 졸라대서 할 수 없이 밭떼기로 팔았습니다. 500평에 심긴 옥수수를 40만원에 넘겼던 것입니다. 서울 장사꾼은 값을 잘 쳐줬다고 엉너리를 치며, 옥수수를 거둬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 정도면 120만원은 넉넉히 받을 수 있다며 혀를 찼습니다. 이 순진한 목사가 세상의 아들들에게 속은 것이지요. 생각할수록 분해서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면 농약을 먹고 자살하는 농부들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습니다. 자는둥 마는둥 하다가 새벽기도회에 나갔는데, 자꾸 ‘네 주머니에 있는 것을 주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그는 하나님이 자기 삶에 개입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옥수수 판 돈 40만원을 지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기왕에 나누어 먹으려던 옥수수 아니었던가? 다 나누어주고 나니까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내가 소유하려니까 액수의 많고 적음이 내 마음을 흔들었지만, 나누어 주려니까 그게 문제가 안 되는구나.’ 그는 그런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나누어줌으로써 돈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지요.


• 충실한 삶을 향하여

다시 한번 본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9)

여기서 우리는 아주 급진적인 사상과 만납니다. 우리가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용한 돈이야말로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이끄는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의한 재물’은 가난한 이들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일컫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提喩法). 주님께서는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25:4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다가 그동안 제가 주목하지 않았던 한 단어가 송곳처럼 예리하게 제 가슴에 파고들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천더기 신세를 면치 못하는 이들을 가리켜 ‘내 형제자매’라고 일컫고 계십니다. 그저 해보는 말이 아닙니다. 그게 예수의 진정입니다. 그들을 살붙이처럼 여기셨기에 그들의 배고픔과 목마름, 헐벗음, 외로움, 두려움, 고통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영성가였던 이신(1927-1981) 목사님의 글을 읽다가 이런 구절과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를 믿어달라고 요청하시는 것보다 내 속을 좀 알아달라고 하십니다.”

‘내 속을 좀 알아다오’. 저는 이 구절을 읽고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살붙이처럼 여기시면서 어찌하든지 그들을 돕고 싶은 주님의 그 속마음을 알아드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다 하셨습니다.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돈이 많아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만 있으면 우리는 이웃들에게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일주일 중 다만 1시간만이라도 다른 이들을 위해 비워두십시오. 외로운 이의 말벗이 되어주거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쓰거나, 삶의 벼랑에 내몰린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홀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속을 좀 알아드리며 살 때 우리 삶은 하늘의 빛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던 삶의 비애는 줄어들고, 평안과 감사가 찾아올 것입니다. 


• 돈 세상 넘어서기

지금 우리 삶을 지배하는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돈입니까? 주님은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잘못된 주인을 모시면 인생이 고단해집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이해하고, 그것을 더욱 필요한 이들에게 주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소속을 바꾸게 됩니다. 

이것은 개인도 그렇지만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지향하는 것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주님의 탄식을 들은 이사야는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사6:8) 하고 응답했습니다. 

우리가 주어야 할 것, 또 줄 수 있는 것은 돈만이 아닙니다. 사랑과 우정에 굶주린 이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누군가가 내밀어 줄 연대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결단해야 할 시간입니다. 주님은 샬롬의 세상을 열어가라고 우리에게 꿈을 심어주셨건만 우리는 그 꿈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는 참극은 인류의 양심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100여 명의 피난민들을 한 건물에 몰아넣고 그곳을 폭격해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더 이상 침묵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분명한 어조로 전쟁에 반대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그리고 나의 삶의 가능성을 누구에게 바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은 달라집니다. 지금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재능과 건강과 시간과 물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께 봉헌되어야 할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