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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배고픔의 채움 (요 6: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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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배고픔의 채움  (요 6:22~35) 


어느 날 한적한 갈릴리 바닷가의 작은 동산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각종 병자들을 고친 일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교훈이 어느 서기관들의 교훈과 같지 않고 힘이 있고 권세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있는 곳에 나아 왔습니다. 주님께서 바닷가의 어느 작은 동산에 올라앉아 계실 때에 큰 무리가 주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것입니다.(요6:5)
주님은 무리들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유리하고 방황하며 가련하고 불쌍한 모습입니다. 온갖 죄와 사망의 고통에 매여 고생하는 불쌍한 인생들을 보셨습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을 까요?

질병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질병의 문제는 어제나 오늘이나 인류에게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질병과의 싸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억압의 문제입니다. 
로마의 정치적인 속국이었습니다. 그들이 자기 땅에서 자기 나라 말을 하고 살았지만 힘이 없어 외국인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특히 선민사상을 가진 유대 민족에게 이방인들의 군대가 하나님의 성도인 예루살렘에서 활보하는 것을 보는 것은 치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울분을 속으로 삭여야 했습니다.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난의 문제입니다.
로마인들은 식민지에서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세관을 세우고 세리들을 앉혔습니다. 정부로부터 할당받은 세금 위에 부정직한 세도들은 추가로 징수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었습니다. 그들은 국민들의 혈세를 착복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일반 서민들은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습니다. 
세리들은 로마의 정권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타락한 종교 귀족들의 횡포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세라는 명목으로 그들은 가난한 서민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가난했습니다. 기본적인 먹을 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배고픔의 문제는 심각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문제를 잘 아셨습니다. 
주님은 자기에게 나아 온 사람들을 위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무슨 수로 그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겠습니까? 계산이 빠른 빌립은 대답했습니다.
각 사람이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 데나리온의 돈이 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장정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오늘날 장정 한 사람의 품삯을 10만원으로 계산한다면 200데나리온은 2천만 원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합니까? 설령 돈을 구한 다할 지라도 어디서 그 많은 떡을 사 오겠습니까? 제자들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어디서 그 많은 돈을 구할까? 아니 돈을 구한다고 해도 그 많은 떡을 어디 가서 사 온다는 말인가? 그때 고민하고 있는 제자들 앞에 작은 소년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 아이의 손에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덩어리 다섯 개가 들려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소년의 손에서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드리면서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이까?” 라고 말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나 잡수세요”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주님께 드리면서도 그들은 의심했습니다. 주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작은 떡덩이 다섯 개를 아무 말씀 않으시고 제자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을 잔디밭에 앉게 하라” 

주님은 소년이 바친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제자들은 저마다 떡덩이 하나씩을 들고 다니면서 앉아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떡을 떼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도 그렇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떼어 내고 또 떼어 내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의 손에서 자기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 풍성히 받았습니다. 

그날 오랜만에 떡과 고기를 마음껏 풍성하게 먹었습니다. 
떡 잔치와 고기 잔치가 벌어진 것입니다. 걱정 없이 식사했습니다. 근심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맛있게 배불리 먹었습니다. 나중에 음식 값 계산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① 이 사람이 바로 구약 성경에 예언된 오실 그 선지자가 아니냐? 하는 생각입니다.(요6:14) 
② 그리고 이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우리의 왕이 되게 하면 우리가 배고픔과 질병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요6:15절에 보면 몇몇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강제로라도 추대해서 임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마 “예수 임금 만들기 후원회” 같은 것을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이 부질없음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그 밤에 제자들을 먼저 갈릴리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가게 하시고 한적한 산에 가셔서 기도하시다가 한 밤중에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튼 날 사람들은 예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전날 바닷가에 놓여 있던 배 한 척이 없는 것을 보고(요6:22) 제자들과 예수님이 바다 건너로 가신 줄 알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요6:24) 그들은 애타게 찾던 예수님을 만나 얼마나 기뻤는지 “선생님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 오셨느냐는 질문에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고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아니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찾았다고 하는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들의 배고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떡을 먹고 열광되어 있는 이들에게 생명의 떡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썩지 아니하는 양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도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고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왜 사람들에게 이런 기적을 행하셨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이적을 보임으로서 믿음으로 인도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떡을 먹고 배가 불러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있는 예수님을 임금 만들면 식량 걱정 안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피상적으로만 보았습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지난밤에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왔다는 이야기나 해주었다면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실적으로 육신의 배고픔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당장의 육신의 배고픔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즉 육신적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크리스소톰은 “사람들은 현실 생활에만 집착하여 산다” 고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나 21세기를 사는 오늘날 우리들이나 사람들은 모두 배고파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이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배고픔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 적인 배고픔이요 또 하나는 심령의 배고픔입니다. 육신 적인 배고픔은 먹을 양식을 주어 먹게 하면 해결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육신의 배만 채운다고 해서 만족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짐승과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짐승은 물질로만 채워 주면 만족해합니다. 다른 고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은 본능대로 살고 본능을 충족시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물질로 심령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부귀와 권세를 한 몸에 지녔던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도서 1:2절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 되도다” 세상의 모든 것은 바람 잡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심은 전적으로 물질적인 것에 있었습니다. 뜻 밖에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을 통해서 넉넉한 음식을 공급받고 또 공급해 주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옛말에 사람의 욕심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도 만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물질만 가지고 만족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짐승처럼 육체로만 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배부름을 얻기 전에는 육신 적으로 배가 불러도 여전히 배고픈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령의 배부름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합니까? 

심령의 배부름을 위해여 ...

① 생명의 양식을 취하여야 합니다.

생명의 양식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55:2절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살려고 하면 육의 양식도 필요하지만 마음과 영혼의 건강을 위해 영적인 양식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영적인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명기 8:3절에 보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사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는 방법은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성경을 근거로 한 설교를 자주들을 때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입으로 말한 말씀입니다. 
딤후3: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하였고 벧후 1: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생명의 책입니다. 

이탈리아의 시실리 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전도자가 산 속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돈은 다 뺏겼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소지품은 다 불 속에 던지라는 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전도자는 다 불 속에 넣을 수 있었지만 성경책만은 불 속에 넣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불 속에 넣겠는데 당신은 이 책 속에 무슨 글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소? 그러니 내가 여기서 한 두 구 절만 읽고 불 속에 넣어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무 곳이나 펼치니 시편 23편이 나왔습니다. 강도 앞에서 읽었더니 “아하 좋구먼! 그 책은 여기다 놓으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권을 펼쳤습니다. 그랬더니 마태복음 5장이 나왔습니다. “아하 그것도 좋구려! 그것도 여기 놓으시오” 하더니 그 강도는 성경책을 싸 들고 가 버렸습니다. 

그 후 수 년이 흘러갔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한 분이 그 전도자를 찾아왔습니다. “날 기억하시겠습니까?” “아뇨” “그러면 수년전 산 속에서 성경을 빼앗긴 사실을 기억하시나요?” “예, 그 사실은 기억합니다” “내가 바로 그 강도입니다. 내가 빼앗은 당신의 물건들 속에서 주소를 찾아보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 책을 가지고 와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나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학 공부를 하여 이제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전에 강도였던 그 목사님은 그 성경책을 들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성경은 강도를 목사로 만들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② 심령을 채워 줄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심령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누가 우리의 심령의 배고픔을 채울 수 있을 까요?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심령을 채워 줄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물입니다. 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가 성의 여인은 다섯 명의 남편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남성들도 그의 영적 만족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사람의 심령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사람의 심령의 배고픔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영적 지도자입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일들을 지도하는 영적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진실하게 구하는 삶의 태도를 가진 영적 지도자로부터 영적 갈급함에 대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영적 지도자가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면 아주 바람직합니다. 

히13: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 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③ 심령의 갈급함을 채울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심령의 배고픈 사람들에게 요6: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 일이 어떤 일입니까?

곧 하나님의 보내신 이를 믿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심령의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힘써 해야 합니다. 그것은 영혼의 목자 되신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부탁하신 일을 우리가 이루는 일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입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에 보람이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전도요 선교인데 그 일을 할 때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생명도 풍성해 집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며 선교해야합니다. 신령한 일을 할 때에 우리의 영적인 배고픔이 채워짐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심령의 갈함이, 배고픔이 채워집니다. 참된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배고픔은 성경, 즉 말씀을 통해 영적 배고픔이 채워집니다. 영적 갈급함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을 사람을 찾아서 그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령한 일을 할 때에 영적 배고픔이 채워집니다. 주님의 은혜로 영육간의 배고픔이 만족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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