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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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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마 5:13~16) 


몇 년 전 중국산 먹거리가 값싸게 국내에 쏟아져 들어왔을 때입니다. 그런데 손님의 건강과 아주 독특한 맛을 생각하면서 값비싼 국내산을 고집하며 식당을 경영하던 한 분이 엄청난 타격을 받고 문을 닫게 될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는 손님마다 맛은 있지만, 이 불황에 너무 비싸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식당 주인의 손님을 사랑하는 철학을 알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중국산 식품의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된 소비자들이 이 주인의 고객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문정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의 건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물질에만 눈이 어두웠던 식당은 하나 둘 이 깊은 불황에 문을 닫았지만, 생명을 사랑하고 맛의 독특한 비결을 자랑하던 이 음식점은 오히려 손님들의 마음마져 훈훈케 해주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이 ‘맛’이라는 것은 음식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살이 전반에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등산가는 힘들게 높은 산을 오른 후에 정상정복의 맛을 느끼고, 축구선수는 힘들게 골을 넣은 후 골 맛을 느낄 것입니다. 지난 북경 올리픽 야구경기에서 이승엽선수가 오랜만에 홈런을 이틀 연속 날렸습니다. 그 전까지 6게임을 뛰는 동안 홈런은 커녕, 겨우 안타 세개(?)를 쳤는데, 오랜만에 홈런 두방을 치면서 한국이 금메달을 따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틀림없이 이승엽 선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홈런 맛을 보았을 것입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여 어려운 대학에 들어간 후 합격의 맛을 느끼고, 직장인은 열심히 일한 후에 휴식의 맛을 느낄 것입니다.

반대로 사업가가 열심히 노력했지만 사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실패의 맛을 느끼기도 하고,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이 뼈를 깎는 훈련을 했지만 메달을 따지 못하면서 패배의 맛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많은 맛이 있는데, 그 맛 때문에 즐거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맛은 우리 삶에 엄청난 영향력을 줍니다.

특별히 교회는 40주년을 맞아 올해 표어를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로 한 해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전에는 이 세상이 얼마나 썩었고, 얼마나 어두운가를 잘 몰랐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앞으로 조금씩 다가가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영적으로 썩어 냄새나는 곳인가, 또 얼마나 캄캄하고 어두운 곳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눈에 그렇다면 예수님의 눈에는 오죽하겠습니까? 캄캄한 세상을 앞에 놓고, 또 썩어 냄새나는 세상을 앞에 놓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 여기에 너희라는 말은 굉장한 강조형입니다. 

이 말은 “너희만이 세상의 소금이야,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 아무리 세상이 썩고 어두워도 나는 너희만을 믿어. 왜냐하면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만 믿어.” 하는 의미가 이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소금은 비록 그 자체가 화려하지도 비싸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도 아시지만, 소금은 평범한 것입니다. 소금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소금이 얼마나 흔합니까? 이처럼 소금은 평범한 것이지만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력은 평범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여기서 너희는 세상의 우라늄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지극히 평범하지만 지극히 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부러 자신의 삶을 다르게 살려고 애써서 꾸미는 모습은 불신자들의 눈에 비칠 때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그렇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평범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다 사는 것처럼 인생을 사십시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이 내 삶을 관찰하면서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어떠한 매력이, 향기가, 아름다움이, 삶의 독특한 맛이 내 삶의 질을 형성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하신 이 본문 말씀 속에는 적어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세 가지 명령이 들어 있습니다.

첫 째, 소금이 음식 썩는 것을 방지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이 썩는 것을 방지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땅에서는 소금에 절인 물고기가 식용으로 아주 많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냉장고가 없는 시절, 열대지방 황무지에서 소금이 하는 역할을 여러분은 가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소금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없는 사회를 생각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오늘 날 수많은, 소위 그리스도인들이 부패해 있다는 가정 사실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땅에 최후의 진실한 성도까지 사라져 버린 사회를 상상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복음의 빛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그런 역사를 상상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그리스도 없는 문명, 그리스도인인 없는 사회, 복음이 없는 역사를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 부패한 문명과 사회와 역사 속에서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해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기독교를 그렇게 핍박하던 로마가 AD313년에 기독교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자그만치 300여년 동안 교회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거의 씨가 말랐는줄 알았는데 거대한 로마가 복음 앞에 무너진 것입니다. 당시 놀라운 사실은 로마 안에 기독교 인구가 불과 2.7%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당시에 무서운 핍박과 고난 앞에서도 얼마나 아름답게 살았든지 콘스탄틴 황제마져 십자가 앞에 자신의 왕관을 내려놓고 예수를 영접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다가 그렇게 싱싱하고 푸르름을 유지하며 각종 물고기의 요람이 되는 것은 불과 3.4%의 염분이 바닷물 속에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믿을 만한 사람, 그 인격이 진실하고 하나님을 향한 자세에 있어서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가르켜서 “소금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약속을 했을 때에는 그 약속이 변하지 않는 약속이 되기를 원하면서 이런 약속을 가르켜서 “소금언약”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실한 약속, 변함이 없는 약속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주님께서는 이 시대에 이런 소금과 같은 존재를 얼마나 요구하고 계십니까?

둘째,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내는 것처럼, 우리도 살맛을 잃어버린 이 세상 한복판에서 참된 인생의 살맛을 창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십니까? 소금의 화학 원소가 Nacl입니다. 이 na나 cl은 다 독입니다. 이것을 먹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합하여 지면서 톡득한 맛을 내는 소금이 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독소가 합치니까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귀한 맛을 내는 것입니다.

「인형의 집」의 저자인 입센은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했습니다. “그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면밀히 살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음푹한 눈, 창백한 얼굴, 미소가 사라져 버린 어두운 얼굴, 속여진 힘없는 머리, 태양이 그들을 비추고 있으나 태양을 잃은 사람들, 내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타인들이 여러분을 보면서 그렇게 진단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매력을 던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있는 곳에서 나를 접촉하는 사람들 마다 삶이란 살 만한 맛이 있는 것이라고 고백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한마디로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칭찬과 박해를 함께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칭찬을 받든지 박해를 받든지 둘 중에 하나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질(quality), 내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말씀을 사랑하며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이 사실 때문에 내 삶을 사람들이 칭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삶이 같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나를 박해합니까? 그들은 나를 박해하면서 내 삶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처럼 살 수 없기 때문에 내 삶을 비판하고 고발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칭찬과 박해를 함께 받던 사도행전의 성도들이 풍겼던 향기와 맛이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 소금이 제대로 맛을 내기 위해서는 음식 속에 들어가서 그 자신이 녹아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녹지 않는 성도들, 그들이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은 절대로 녹아지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 이름, 자기 견해, 자기주장, 자기 생각 속에 꽁꽁 묶여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은 음식 속에 들어가서 푹 녹아 버립니다. 그리고 단맛, 쓴맛, 신맛 등 온갖 유형의 맛들과 어울려서 독특한 새로운 맛을 창조해냅니다.

셋째로, 소금은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갈증을 일으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의 삶을 보고 갈증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당신을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당신을 접촉하는 사람들 가운데, 당신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나도 알고 싶다. 당신이 소유한 그리스도, 당신의 삶을 그렇게 생동하게 만드는 그 예수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나도 알고 싶고, 그 그리스도를 배우고 싶어 하는 그런 목마름이, 배고픔이 그들의 영혼 속에 창조되고 있습니까? 여러분 평생에 이런 기억이 있습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을 찾아와서 “당신의 삶을 보니 그 예수님을 나도 알고 싶은데 내게 당신이 믿는 그 신앙을 좀 얘기 해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는 사건이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지나갈 때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그 분에게 보였던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의 태도를 살펴봅시다. 거듭남에 대한 갈증- ‘어떻게 하면 거듭나는 것인가, 내가 참으로 거듭날 수 있단 말인가?’-을 가진 니고데모입니다. 선생님! 이 거듭남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다시 한번 태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이 중생에 대한 갈증이 목이 타도록 그 속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한번 만나자 마자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싶어 하는 갈증이 이 여인의 목마름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사기치고 세리로서 살아왔던 지나간 날의 자기의 삶이 역겨워지며, 구토하고 싶은 자기의 삶에서부터 돌아오고 싶어 하는 이 끝없는 갈증이 일어났던 삭개요,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보여주었던 반응은 “내 삶이 과연 변할 수 있을 것인가?”였습니다. 눈 먼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예수님의 소리를 듣자마자, 자기의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그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달려가기를 원했던 사건을 여러분은 성경에서 기억하십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과연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목마른 갈증과 배고픔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분문 말씀을 보면, 주님은 맛 잃은 소금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심판하십니다. 13절을 보세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 하면서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성도 새롭게 하는 영적 감화력을 상실한 성도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인 것처럼, 맛을 잃은 성도는 하나님께도 쓸모가 없고, 사람들에게도 따돌림을 받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마지막 때에 가장 두려워해야 할 저주입니다. 진실로 두려워해야 합니다. 있으나 마나 한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사모해야합니다. 맛을 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해야 맛을 낼 수가 있습니까? 막9:50절에 보면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고 하셨습니다. 화목입니다. 오늘도 사람마다 하나 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런 화목과 일치는 독재자일수록 더 외치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진실이 없으며, 사랑이 없으며 용서가 없기 때문에 하나 되지 못합니다. 야합하는 것과 화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야합은 내 이익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화합은 내 이익을 포기하면서 이루려고 할 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화목의 가장 성숙은 어디에 있는 줄을 아십니까? 바로 자기희생에 있습니다. 내가 죽어지지 않고서야 어떻게 화목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지금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정말 이 땅에서 진정한 희생이 무엇인지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이 십자가의 희생에는 예수님의 땀과 피와 눈물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이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름을 짜듯 몸에서 땀방울을 짜낸 기도였습니다. 씨름하는 기도요, 강렬한 기도요, 목숨을 내건 기도였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미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중에 죽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로 나아가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죽으셨기에 험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기도 중에 흘린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하면서 까지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 희생은 우리에게 생명의 맛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우리 인류의 죄를 씻는 유일한 은혜의 도구는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검은 죄 위에 예수님의 피가 임한 순간, 죄는 깨끗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가 사라지는 순간, 정죄도, 심판도, 저주도, 그리고 재앙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용서하는 능력, 깨끗케 하는 능력, 죄인을 자유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은 자신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희생하지 않으면 영원히 저주와 심판 아래서 고통당할 영혼을 끌어안고 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시는 위로의 눈물이었습니다. 눈물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한 눈물에 감동을 받습니다. 사랑이 담긴 눈물 때문에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필립 얀시가 말한 것처럼 십자가의 희생을 깨닫게 되면, 그 사랑에 우리가 한번 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전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 사랑 때문에 텅텅 비었던 가슴에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차오르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두려워하던 사람이 담대함을 갖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불만족에 휩쓸렸던 사람들이 날마다 찬송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죽음은 능력이 있어서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안겨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고 헌신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꼭 사로 잡혀 살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9세기말 캐나다의 죤 맥켄지라는 젊은 신학도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비참한 한반도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지, 저 불쌍한 민족에게찾아가 예수님을 전해야지. 캐나다 장로교회에 가서 한국교회 선교사로 가겠다고 신청을 했으나 아직까지 캐나다 장로교회에서는 한국 선교사 파송계획이 전혀 없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맥켄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마다 찾아다니며 한국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 것인가 하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약간의 여비를 모금하여 1893년 한국 땅을 찾아옵니다.

낯설고 물설은 땅 한국 땅. 이 백성을 구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한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한국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옷을 한국 사람처럼 입었지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평생 버터와 치즈만 먹고 살았던 선교사님은 한국 사람이 되기 위해서 된장과 고추장만 먹었습니다. 위장은 불이 나는 것만 같았고 몇년이 지나 위장에 큰 탈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태양이 작렬하는 여름날 밭에나 가서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국 사람들과 똑같이 일하다가 일사병으로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서울의 언더우드가 크리스마스 날 케익과 치즈, 우유와 설탕을 보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젊은 맥켄지는 통곡을 합니다. 부모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캐나다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한국 땅에 선교가 불가능하게만 보여 졌습니다. 그래서 이것 먹고 나면 더 이상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할 수 없겠다 싶어서 케익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우유와 설탕을 동리아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 날은 더 많은 된장과 고추장을 먹었다고 합니다. 일사병으로 고열이 하늘을 찔렀고 정신착란증으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리다가 이름 없이 황해도 솔내 마을에서 죽어갔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캐나다 장로교회는 황해도에 선교사를 보냈고 함경도 원산과 황해도 솔내에 교회를 세워 캐나다 장로교회에서 보낸 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다 이 땅에 소금처럼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요구되는 사람인가? 아니면 없어지도록 기대되는 그런 사람은 아닌가? 이것을 알려면 내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빠져 버릴 때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 가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고민이 있다면 “나는 얼마만큼 더 소금다운 소금인가? 나는 어떠한 종류의 그리스도인인가? 정말 맛을 발하는 그리스도인인가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음식이 있습니다. 오래 묵힐수록 맛이 깊어지는 음식이 있습니다. 묵은지나 장독에 묻어둔 장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음식들은 오래 될수록 썩어서 먹을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그 인격이 숙성되어 푸근함이 묻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그 품에 안기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영적인 삶이 안 되면 인격이 천박해 지고 악취가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아침!! 다시 말씀드립니다.

옛날 유태교인들 가운데서 신앙을 버리고 타락했던 사람이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면, 이런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를 회당 문 앞에 엎드려 놓습니다. 그는 누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위를 밟고 지나가게 합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이 사람은 큰 소리로 이렇게 소리쳐야 합니다. “나는 맛 잃은 소금이니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 우리 가운데 이렇게 소리쳐야 할 사람들은 없습니까? 내가 참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내 속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그리스도의 향기를, 그리스도의 매력을 발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그 다름이, 내가 다르다는 그 사실이, 분명히 내 주변 사람들의 세계 속에 충격과 영향과 도전을 던지고 있습니까? 이렇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중국의 몹쓸 체형 가운데 하나는 소금을 안 주어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월말이 되면 우리는 다 월급을 받는데 월급 때마다 감격이 얼마나 큽니까? “샐러리”-이 샐러리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Salt Money(소금 돈)이라는 뜻입니다. 소금이 얼마나 귀합니까? 소금이 없는 세상은 연상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어떤 행위를 통해서, 혹은 삶을 통해서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의 소금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 힘들어하고 있는 시대지만, 모두가 힘들고 두려워하여도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하지 않아도, 황금처럼 빛나지 않아도, 빛깔 없고 볼품없는 소금이 맛을 내고, 세상에 기쁨을 주며, 모든 생명을 살려 내는 그 일에 아름다운 섬김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소금처럼 맛을 내는 일들이 우리 안에 가득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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