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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2009년 소의 해에 주시는 말씀 (출 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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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소의 해에 주시는 말씀 (출 32:1~7)
 
 
1. 소의 해

올 해는 소의 해, 즉 기축년(己丑年)입니다. 다들 힘들어 하는 때에 우람한 황소처럼 우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힘차게 일어서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직장과 우리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십이간지(十二干支)에 따른 그 해의 상징 동물을 성경에서 찾아 그 의미를 살펴왔습니다. 물론 십이간지(十二干支)나 그에 해당하는 동물로 한 해를 설명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경이나 기독교적인 전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성경이 침묵하면 모르되 성경이 그 동물이나 그 의미에 대해 말하는 이상, 이런 기회를 빌려 그 의미를 새겨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고 보아,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금은 소에 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우리나라 같은 농경사회에서는 소는 아주 친숙하고 유용한 가축이었습니다. 우선 소는 농촌이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이었습니다. 즉 소를 이용해서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였다는 말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소는 시골에서 살림 밑천이자 자녀 학자금을 위한 투자였습니다. 

대학 시절, 안동 근처 산골에서 상경한 한 학생이 한 한기 등록금을 위하여 부모님이 소 한 마리 잘 키워놓으면 그 다음 학기 등록금이 올라버려서 소 한 마리로는 등록금을 충당할 수 없어서 학교를 다닐 형편이 못된다고 한탄하던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렇게 친숙하고 유용한 소를 관리하던 것은 보통 그 집안의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저희 집은 가난해서 돼지나 치고 남들 소 몰고 산에 갈 때 그 뒤에서 염소나 몰았습니다만! 아무튼 소에게 풀을 뜯어 먹이려 산에 오르고 들판에 나가고, 또 소죽을 끓이고 그 소죽을 퍼주는 것은 대부분 아이들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소는 아이들의 친구였고 그 집의 가족과도 같았기 때문에 저희 세대에게 소와 관련된 이야기는 참 공감이 가고 친근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소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특히 오늘 본문은 이 소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요? 


2. 소

소는 초식 동물로서 사람이 길러온 대표적인 가축이었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약 14억 마리의 소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이 소를 ‘칼 폰 린네’라는 사람이 세 종(種)으로 구분을 했습니다. 하나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 서식하는 소(Bos taurus)이고, 또 하나는 등에 커다란 혹이 있는 인도의 혹소(Bos indicus)이며, 그리고 멸종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된 오록스(Bos primigenius)입니다. 

사람이 소를 기른 것은 아주 오래 전으로서 신석기시대부터라고 합니다. 가장 오래 된 가축이지요. 그래서 인지, 소의 용도는 아주 다양했습니다. 우선 소는 농사를 짓는 동력원이자 짐을 실어 나르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고기, 우유, 가죽을 얻기 위해서 길러졌습니다. 또 투우나 로데오 같은 스포츠로 즐기기 위해서도 길렀습니다. 

그런데 이 소를 기른 아주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재산 증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 상 가장 오래 된 절도는 ‘소도둑’이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영어에서 소를 뜻하는 “Cattle”은 원래 소과(牛科) 동물을 지칭하는 낱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 ‘caput’에서 유래했는데요, 여기에는 “움직이는 재산”이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이 단어는 ‘동산’을 뜻하는 “chattel”, 또 경제학 용어인 “capital”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에 관한 상식을 전제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비상식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송아지 우상

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지 3월, 즉 2개월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 도착하여 거기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의 나라로 공식적으로 탄생하는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내 산으로 올라가서 언약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인 출애굽기 32장은 시내 산 정상으로 올라간 모세가 40일이 다 되어가도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이 어처구니없게도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금으로 만든 송아지를 하나님을 대신해서 숭배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대단히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을 진멸하려 하셨으나,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로 3천 명 가량이 불행을 겪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일은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 기가 막힌 사건은 오늘 우리만이 아니라 오고 올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입니까? 특히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애굽에서 해방되었으며, 어떻게 홍해를 건넜으며, 그리고 어떻게 해서 시내 산까지 올 수 있었습니까? 400년 넘게 애굽에 거주하면서 노예에 지나지 않았던 그들이 오직 여호와의 은혜와 그 도우심으로 시내 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불과 3개월 만에 이렇게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습니다. 설사 다른 신을 섬겨도 그럴싸한 신이 아니라, 자신들이 바친 금패물로 부어 만든 송아지를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숭배한 것은 사실 하나님 대신 다른 신을 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만들고자 하여 형상화한 것이 송아지 형상이었고, 그렇게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는 그것을 향해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4)”, 즉 여호와라고 하면서 숭배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그들은 다른 형상이 아닌 하필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놓고 “하나님”이라고 했을까요? 

1) 애굽의 황소 신

표면적으로 볼 때 당시 송아지 형상은 “아피스 신”이라 해서 애굽인들이 섬기던 우상 중 하나였습니다. 애굽, 특히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고센 근처 멤피스에서는 황소를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황소는 두 뿔을 가진 짐승으로서 대적을 막아줄 수 있는 힘의 상징이었고, 번식을 잘함으로서 풍요의 신이었으며, 부지런함으로서 삶에 대해 올바른 교훈을 주는 신이었습니다. 소를 이렇게 숭배하던 애굽인들 곁에서 살다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것이 의식 무의식에 베어들어 하나님을 형상화한다는 것이 송아지 모양의 신상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동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애굽에 있을 때 10 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넌 일 등을 통하여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 신이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신관’, ‘애굽의 신앙관’을 가지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생각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말이지요. 

종종 한국 교회와 한국 기독교의 신앙에 대해 “교회 안에 예수가 없다”느니, “목사가 무당 같다”느니, “목사들이 강단에서 늘 복 타령만 한다”느니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한쪽 면만을 바라본다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예수 안에 있으면서 여전히 옛 신앙관을 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한국 교회 성도들이 살아계시고 인격적이시며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신앙보다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배어 있는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송아지 우상”은 그들이 애굽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옛 사고와 옛 신앙으로 하나님의 모양을 지어내어 ‘하나님은 이렇겠거니’하고, 그 앞에 제사하고 섬긴 것이 문제라는 것이죠. 그런데도 그들은 본문 5, 6절에 있는 대로 자신들이 만든 여호와가 아니라, 진짜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했다고 생각하며 신나게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우상을 섬긴 것으로 여겨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올바른 신앙은 지난 시절 우리가 주 안에 있지 않을 때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즉 애굽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지 않으면 그의 신앙은 항상 애굽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매일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았고, 또 매일 만나를 먹고 살면서도, 끊임없이 반역하고 불순종했습니다. 항상 모세에게 대들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에게까지 대들었습니다. 애굽의 것을 버리지 않으면 진정한 여호와 신앙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애굽에서 익혔고 알고 섬겼던 신에 대한 생각과 사고를 홍해를 건넌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이어가면 안 됩니다. 애굽의 사고(思考)로 만났던 하나님과는 결별하고, 새로운 인식에 의해 경험되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호흡으로 숨쉬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며, 하나님의 입으로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발로 걸으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시기 바랍니다. 

버리지 못한 애굽의 것을 마치 하나님의 것인 것처럼, 그것이 바른 신앙인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 금송아지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는 어리석음 범했던 이스라엘 짝 납니다. 즉 그렇게 섬기는 하나님은 황금송아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도 버려야 합니다. 신앙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잘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 잘 살기 위함이요, 나 잘 살자고 예수를 희생시키기보다는 이 땅에서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기 위함입니다. 즉 신앙에서 ‘나’는 없습니다. 주님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원대한 목표와 그를 위한 계획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나를 온전히 드림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애굽적인 요소, 즉 옛 사람과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서 그것이 신앙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 이 시간도 여러분은 금송아지 앞에 춤추고 있는 이스라엘과 똑 같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현대의 황금송아지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했을까요? 이것이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스스로나 남들이 만든 우상 앞에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도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앞에서 숭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약 역사를 보면, 오늘 본문 이후로 금송아지는 우상숭배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2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된 후,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은 자기 백성들이 남 유다의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올라갈 것과 그리 되면 백성들의 마음이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결국 자신을 반역하고 자신을 죽일까봐 특단의 조처를 마련했는데(12:27), 그것이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게 한 것입니다.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들의 신이라(왕상12:28).”

금송아지 우상에 관한 것은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소설로서 <금송아지전>이라는 것이 있는데, 들어보셨습니까? 이것은 불전(佛典) 《지행록(地行錄)》의 설화를 소재로 한 것인데요. 왕의 셋째 왕후인 보만(普滿)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왕자가 다른 두 왕후의 시기로 인하여 사나운 암소에게 잡아먹힌 후, 금송아지로 다시 태어나 겪는 고행담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금송아지는 석가여래의 전신(前身)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이렇게 금송아지는 아주 오래 전부터 동양과 우리나라에서 우상으로 여겨져 왔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금송아지 우상이 지금도 교회 안에와 성도들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노라 하고,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의 기독교’,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따른 신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그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기독교,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숭배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오늘의 우상은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성경대로 살고 믿으려하기 보다는 불신자들의 사고방식을 따르려 하고, 어찌하든지 세상의 조류와 맞추어 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첨단과학(尖端科學), 철학, 유흥적 문화 등과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조화롭게 살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애굽의 우상종교를 따라가는 금송아지 숭배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현대인의 우상은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 우상이고, 학력과 학벌이 우상이고, 권력이 우상이고, 건강이 우상이고, 외모가 우상입니다. 만일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한다면 자녀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가장 애지중지 사랑하는 것, 하나님처럼(?) 떠 받드는 것이 있으면 곧 그것이 우상숭배이라는 것이죠. 또한 성경은 “… 탐심은 우상숭배(골3:5)”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오늘날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세상의 것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뿐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여겨도 사실은 다른 무언가를 그리고 누군가를 섬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섬기는 그 ‘다른 무엇’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우상들’입니다. 

여기에 대해 프란시스 베이컨은 “현대인은 4 가지 우상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향락주의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극장의 우상’이 있는가 하면, ‘시장의 우상’이라는 것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손익을 따지는 것도 일종의 우상숭배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경험 자기 철학에 집착하여 자기 경험과 자기주장만 옳다고 고집하는 ‘동굴의 우상’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삶만 살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또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묻어서 대충 넘어가려는 사람들, 책임을 회피하는 ‘종족의 우상’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의 전부를 차지하실 분, 여러분이 가장 사랑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하심은 우상숭배만을 금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이 말은 아내나 자녀들이나 가족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살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아내나 자식이나 부모나 사업을 첫째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둘째로 생각하는 것이 곧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금송아지는 사람에게 구원은 커녕 어떤 복도 줄 수 없는 지극히 무능한 것입니다. 보이는 우상이든, 보이지 않는 우상이든 우상은 거저 우상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이 아무 것도 아니고, 또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우상 때문에 여러분의 삶을 어리석은 데로 몰아넣으시겠습니까? 

영국의 한 시골 노인이 난생 처음으로 런던으로 왔습니다. 그는 그림에 조예가 있어서 유명한 화실에 들러 이 그림 저 그림을 구경하다가, 신앙이 독실한 어느 화가가 필생의 역작으로 그린 예수님의 상을 보고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한참 그림을 쳐다보던 노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던 노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오! 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모습을 곁에서 같은 그림을 보고 있던 어느 부인이 보았습니다. 그 부인은 노인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장면을 보고 있던 한 학생이 “할아버지,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그 세 사람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삽시간에 칠 팔 명의 사람들이 그 그림 앞에 모여 마치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면서 “주님 사랑합니다”를 고백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주님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 안과 밖에 있으며, 온 세상 사람들과, 이 세상에 가득 찬 유무형의 우상을 몰아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4. 황금소 우상은 오늘의 거울

말씀을 맺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6절은 오늘 본문의 금송아지 사건을 오늘날 성도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점이 그렇다는 것입니까?

첫째로 예전의 모든 것,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모든 것, 그리고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것이 신앙과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장기간 출장가고 없으니까 마치 하나님이 자신들 중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철저히 뿌리박은 신앙이 아니라 사람과 환경에 의존한 신앙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애굽적인 사고와 신앙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것, 세상의 것, 인간적인 것을 버리고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송아지 형상으로 만들어 숭배하려고 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 감각적인 것, 이익이 되는 것을 자신의 신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변하고, 사라지고, 흔들리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너무나 분명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로 경험함으로서 올바른 하나님 지식 위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과거의 것과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믿으려는 사람과, 하나님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정의를 내리는 사람은 본질적으로는 ‘금송아지 숭배자’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으려는 금송아지 종교에 미혹 받지 말고,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늘 만나면서 그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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