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름에 합당하게 (엡 4:1~3)

  • 잡초 잡초
  • 385
  • 0

첨부 1


부름에 합당하게 (엡 4:1~3) 


샘터의 편집자였던 정채봉(丁埰琫)의 생각하는 동화시리즈 중 7집 '참 맑고 좋은 생각'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미 소가 두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자라난 송아지들에게 고삐를 매기 위해 코뚜레 할 때가 되었습니다. 
맏 송아지가 농부에게 사정합니다. 
"제발 저에게 코뚜레를 하지 말아 주세요." 

농부가 대답합니다.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망아지처럼 되고 말텐데" 
"아닙니다. 그것은 옛날 생각입니다. 두고 보세요. 코뚜레를 하지 않아도 곱절이나 일을 잘 할 테니까요." 
그래서 농부는 동생 송아지에게만 코뚜레를 했습니다. 
맏 송아지는 약속대로 코뚜레 없이도 스스로 멍에를 메고 쟁기도 끌었습니다. 
코뚜레를 한 동생 송아지가 지쳐 쉴 때도 힘을 내어 달구지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차츰 꾀가 나기 시작한 맏 송아지는 일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고 자신을 잡으러 오는 농부에게 뒷발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맏 송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행방을 묻는 동생 송아지에게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일도 하지 않고 꾀만 부려서 도살장으로 보냈지." 

코뚜레가 있어야만 일하던 모습이 혹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언제까지 코뚜레를 해야만 끌려 다니겠습니까? 코뚜레 이전에 부르심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이, 어떤 사람은 늦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름의 시기가 아니라 얼마나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였느냐 입니다. 

헬라어로 '부름'(Calling)은 '클레이시스' 로 소명을 의미합니다. '일' (vocation)의 의미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움 속에서 불러 내셨습니다. 놀라운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러내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소명도 주셨습니다. 새로운 과업을 맡기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 부르심을 알 때 감격적인 신앙이 가능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는 이유도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감격스럽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으려면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된다고 강조합니다.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다함께 찬양합니다.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내 모든 정성 내 모든 정성 주만 위해 바칩니다. 주님 주님 나의 기도 들으사 영원토록 주님만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주님 나를 사랑했으니 주님 나를 사랑했으니 이 몸 바쳐서 이 몸 바쳐서 주만 따라 가렵니다. 주님 주님 나의 기도 들으사 언제까지 주님만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주님 나를 구원했으니 주님 나를 구원했으니 소리 높여서 소리 높여서 주만 찬양하렵니다 주님 주님 나의 기도 들으사 할렐루야 주님만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부르신 부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려면, 


첫째로 겸손으로 일해야 합니다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도시로 나가려고 뜻한 적이 있었습니다. 출석하던 교회 목사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충고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목사는 말없이 프랭클린만 쳐다보십니다. 그래서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고 나오다가 그만 문지방을 들이받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프랭크린은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목사는 프랭클린에게 말합니다. 
"여보게, 앞으로 어디를 가든지 고개를 숙이고 다니게. 그리고 아무리 언짢은 일을 당해도 인상쓰지 말고 환하고 밝은 표정을 잃지 말게나. 그러면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수 있을 걸세". 

그때 프랭클린은 결단합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 항상 먼저 고개를 숙이자. 겸손한 자세를 취하자. 그리고 아무리 언짢은 일을 당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도 기쁜 표정, 밝고 환한 표정을 잃지 말기로 하자." 이것을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프랭클린은 미국 역사상 위대한 사람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여기의 '겸손'은 부름 받은 성도들의 내면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도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셨지만 동등됨을 포기하고 종의 몸으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예수의 인격은 겸손입니다. 부름 받은 자들의 품격도 예수의 겸손을 닮으려 힘써야 합니다. 겸손이 복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름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낮아진 자, 겸손한 자에게 임하십니다. 자신의 부족과 결함, 되지 못한 면을 붙들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겸손한 삶이 됩니다. 

특히 '모든 겸손' 이란 구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전적인 겸손을 해야만 합니다. 부분적 겸손은 안됩니다. 즉 사람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대하여도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만 합니다. 본능적으로 인생은 강자 앞에서 약해지고 겸손한 척하나, 약자 앞에서는 강해지고 교만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겸손은 모든 겸손입니다. 누구에게나 겸손해야 됩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시인하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일 할 때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겸손한 자의 모습이 가능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사랑으로 용납해야 합니다

주일 아침에 설교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목사 사택의 문을 두드립니다. 열어 보니 남루한 차림의 아이 셋이 문 밖에 서있습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파괴된 결손 가정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처음 왔다며 교회를 구경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목사는 바쁜 시간이었으나 교회의 이곳 저곳을 보여주었습니다. 한참 구경한 후 큰 아이는 예배가 언제 시작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양말 짝이 달라도 예배당에 들어갈 수 있나요?" 예배당이 마루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는 물론 그럴 수 있다고 안심시켰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다시 묻습니다. 
"만약 양말을 신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목사는 여전히 괜찮다고 말합니다. 아이는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제 양말은 짝이 틀리고, 동생은 아예 양말이 없거든요". 

잠시 후 강단에 올라선 목사의 양말짝이 서로 달랐습니다. 우스꽝스러운 목사의 모습을 본 교인들이 수군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잠시 후 예배에 참석한 아이들의 양말 짝이 서로 다른 것을 본 교인들은 조용히 서로 양말을 한 짝씩 바꿔 신기 시작하였습니다. 남루한 모습을 가진 아이들을 사랑으로 용납하기 위한 교인들의 배려였습니다. 따뜻한 사랑을 체험한 아이들은 교인들의 도움으로 훗날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부름 받은 자들이 행할 대인관계의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용납' 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약점을 포용하는 관용을 의미합니다. 비록 내 의사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넓은 마음을 가지고 감싸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용납이 있고,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마음에 안 맞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용납하면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모습은 상대를 이해하며 사랑으로 받아줌에 달려 있습니다. 이기선 목사는 "하나님이 내 꼴 보고 나를 사랑하시나, 내 꼴은 그 꼴 보다 더 못하다" 라며 모든 사람을 용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용납은 일방적이 아니라 '서로' 임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방적 용납으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서로 받아주는 관계가 될 때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자의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평안으로 하나되야 합니다

크리스천 작가인 마크 퇴니(Mark Twany)의 말입니다. 
"나는 개와 고양이를 한우리 안에 넣어 보았습니다. 뜻밖에 그들은 기대와 달리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음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습니다.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들도 잘 어울릴 수가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장로교인과 침례교인과 감리교인을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잘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풍자한 글입니다. 교파는 달라도 예수 믿는 성도들은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신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도 하나 되어야 함이 자녀를 향한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부르심에 합당한 자들의 공동체 생활을 정의합니다. 여기의 '평안' 은 '평화, 화평' 과 같은 뜻입니다. 평안은 하나되게 하기 위해 매는 줄입니다. 하나 되게 만드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될 때 평안합니다. 마음이 나누어지면 염려, 근심, 걱정이 찾아옵니다. 가정의 평안도, 교회의 평안도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이루어집니다. 고 한경직(韓景職)목사는 "교회는 싸우지만 않으면 부흥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싸우고 갈라지게 하는 것은 마귀의 전략입니다. 따라서 부름 받은 자들은 평안으로 하나 되기에 오로지 힘써야 합니다. 누구와도 화평을 도모하는 일에만 힘써야 합니다. 

1967년에 이스라엘 총리로 당선된 골다 메이어(Golda Meir)수상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녀가 죽은 후 발간된 책에서 메이어는 고백합니다. "내 얼굴이 못난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못났기 때문에 기도했고 못났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나의 약함은 나라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실망이 곧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메이어는 12년 동안 백혈병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모든 고통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믿고 수상직책을 잘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할 때에 부르심의 목적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겸손과 온유로 주어진 직분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며 일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평안으로 힘써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한 해 동안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하심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