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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신앙인의 두가지 장벽 (출 1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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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두가지 장벽 (출 14:1~14)
      
  
신앙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도 있습니다. 신앙이 우리에게 짐이 되고 부담이 될 때가 있습니다. 차라리 신앙이 없었다면 없었을 부담이 신앙이 있기 때문에 우리 어깨에 지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는 분은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려고 할 때 한쪽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말과 병거를 거느리고 쫓아오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를 상징합니다. 건강문제, 자식문제, 돈 문제 등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의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그런가보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반대쪽에는 넘실거리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홍해가 뜻하는 것은 신앙으로 말미암는 번민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았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여기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면 여기에 큰 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데 길은 없고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쪽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것도 고민거리이지만 반대쪽에 홍해가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들에게 더 큰 번민을 제공하는 것이고 영적인 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계시기나 한 것이야?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 것이냐? 신앙이 우리를 속인 것이 아니냐? 모세가 우리를 속인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이 사람에게 번민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애굽 군대의 손에 의하여 멸망할 수도 있지만 홍해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조금만 있으면 모세가 지팡이를 바다로 내밀어서 홍해를 가르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사이에 난 길을 걸어서 애굽 땅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 십계에서 봐서 잘 압니다. 찰턴 헤스턴이 지팡이를 내밀었더니 그 당시 컴퓨터 그래픽이 없었던 시대에 이 특수효과를 사용해서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그것이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되는 장면이지요. 그러나 홍해가 갈라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갔을지는 충분히 상상을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분들은 이와 같은 번민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살려고 조금이라도 노력을 해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압니다. 

신앙으로 말미암는 번민에는 추가로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우리가 겪게 되는 실존적인 패닉 상태입니다. 공황상태입니다. 홍해 바닷가에서 아, 이제 우리는 죽는구나, 우리는 망했구나, 큰일 났구나, 하는 패닉 상태에 빠지는 것, 하나님을 믿었더니 내가 큰 손해를 보는구나 이런 종류의 염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는 신앙 자체에 대한 회의입니다. 홍해 물에 빠져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신앙이 홍해 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홍해 바닷가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와 같은 신앙적인 번민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신앙의 존립에 대하여 투자를 한 것과도 같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포스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이런 회사의 주식을 사셨다면 그때부터는 그 회사들이 남의 회사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투자한 회사가 잘되는 것이 여러분의 유익이 되고 반대로 여러분이 투자한 회사가 잘못되는 것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때부터는 그 회사의 경영에 대해 응원을 하게 되고 잘되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일단 한번 기독교인이 된 다음에는 어느 누구도 기독교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잘되는 것, 여기서 잘된다는 말은 융성한다는 뜻인데 그 의미는 여러분이 알고 계실 줄로 믿기 때문에 추가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기독교가 잘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득이 되고 기독교가 잘못되는 것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영혼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 전체를 기독교 신앙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금세와 내세에 걸쳐서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교회생활에 우리의 시간과 정성과 물질과 애정까지고 맡긴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존립을 해 줘야지 만약에 그렇지 하지 못한다면 거기에서 발생하는 영혼의 위기를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애굽 군대의 손에 맞아 죽는 것은 감당할 수 있어요. 홍해 바다에 빠져 죽는 것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홍해 바다에 빠지는 것은 그건 제일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홍해 바다를 건너지 못하더라도 누군가 건너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내 믿음을 건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모세가 본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더라도 그 다음 세대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마음에 위로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다 홍해를 건너지 못하더라도 누군가가 건너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누군가가 하나님의 역사하는 것을 보는 것을 알 수 있다면 내가 건너지 못해도 그것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지요. 

아마 여러분 중에는 제 이 말씀을 들으시고 ‘와, 목사님도 그런 생각을 하실 때가 있습니까. 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줄 알았는데 목사님도 합리적인 분이시군요.’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무턱대고 믿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맹목적인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진정한 번민 위에서 탄생합니다. 그런 번민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믿음이 한 번도 테스트를 받아본 적이 없고 그리고 그 믿음이 한 번도 검증돼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어디에서 생기느냐? 홍해 바닷가에서 생깁니다. 마치 기독교 신앙이 예수님의 무덤가에서 생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모든 것이 끝난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난 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그들의 믿음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어부들은 고기 잡는 일도 돌아갔고 끝난 줄로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가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이 발생합니다. major incident-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 또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다는 사실, 그것을 막달라 마리아와 여성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목격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주 희한한 일이지요. 그래서 죽은 줄로 알았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뿐만이 아니고 다 끝난 줄로 알았던 믿음이 되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 시작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 신앙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최초의 고백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를 고백하면서 기독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가 시작된 것이고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믿음의 고백이 되어서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그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아주 중요한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믿음의 고백에는 신빙성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패턴은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당신의 백성을 그와 같은 패닉상태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성령이 예수님을 마귀에게 시험받는 광야로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는 꼴을 못 보십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패닉상태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실존적이고 영적인 위기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만약에 이것을 인간의 삶에서 비슷한 경우를 찾는다면 새로 시집온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기에 시자가 네 번 등장하지요. 시집, 시어머니, 시집살이. 시키다, 의도적인 것입니다. 또 새로 군에 입대한 신참들에게 얼 차례를 시키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버릇이 없고 응석받이인 남자들을 군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른을 공경하지 못하고 아직 시집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며느리에게 충성심과 소속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알게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우리를 홍해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쪽에서 다가오는 위기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실존적인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와 신앙의 위기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신앙 자체가 물에 빠질 수 있는 그런 지경까지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이러다가 내가 신앙까지 잃어버리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하시는데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하나님이 거기까지 인도하신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경험해야 그제서야 제대로 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신념이 아니고 인간적인 의지도 아니고 결단도 아니고 사람의 어떤 풍습도 아니고 버릇도 아니고 진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까지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나의 말과 전도함이 사람의 권하는 말에 있지 않고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에 있어 너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니이라’고 한 것처럼 그는 성령의 능력과 사람의 지혜를 비교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지만 똑같은 원리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고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믿음을 갖게 하시는 방법은 결국 인간적인 상식이나 신념이나 이런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경험함으로써 진짜 믿음을 갖게 하시는 것인데 이것은 각 사람과 하나님만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할 수도 있고 설명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심슨(Simpsons)이라는 TV 만화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에피소드를 말씀드리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바트 심슨이라는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에요. 그가 학기말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밤은 깊었고 시험 준비는 되지 않고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아주 위기상황이지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래서 바트 심슨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느냐? 밤사이에 눈이 하도 많이 와서 길이 막혀서 학교가 하루를 쉬게 되었습니다. 이게 우연입니까? 바트에게는 우연이 아니에요.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래서 그 위기상황에서 하나님이 그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남들에게 말한들 남들이 알 리가 없지요. 이건 바트와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압니다. ‘아, 하나님이 나에게 긍휼을 베푸셨다’ 위기 상황에서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도와줄지 몰랐어요. 

아마 우리는 갑자기 바트 심슨의 머리가 좋아진다든가 자기가 공부한 문제가 나온다든가 이런 걸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시험을 하루 연기하는 방법을 사용했지요. 아마 다음번에는 이런 요행을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홍해 바닷가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적인 위기 + 영혼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애굽 군대도 피하고 홍해 바다고 건너고 이 두 가지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애굽 군대도 피하지요, 홍해 사이로 길이 생기지요. 현실적인 문제도 해결 받고 그리고 이제는 진짜 믿음을 갖게 되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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