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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오 신실하신 주 (애 3: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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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신실하신 주 (애 3:19~26)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애가 3:19-26)

오늘은 2008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를 멋지게 마무리해야 할 때인데, 지난 1년을 돌아보면 나라와 교회, 가정 공동체 중에서 우리의 가정들이 한 해를 비교적 잘 보낸 것 같아요. 제 개인적으로도 1년 동안 저와 아내, 자녀들과 사위, 손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참 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할렐루야 교회도 주님께서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셔서 원만하게 한 해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형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난 1년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10년 동안 계속 되었던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당이 절대 다수당이 되면서 가장 많은 표수의 차이로 당선된 새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국민들은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장관을 뽑는 첫 시점부터 삐거덕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장관 후보자들의 불법이 드러나면서 국민들은 실망을 하게 되었고, 얼마 전까지 가졌던 엄청난 기대에 찬물을 뿌리는 듯했습니다.

게다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로 4개월을 허송세월했습니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시위대들은 새 정부가 숨을 쉴 수조차 없게 매일 촛불시위를 했습니다. 그 와중에 언론은 편파적인 보도를 했습니다. 언론은 국민들에게 사실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언론은 국민들이 정확한 정보를 얻고, 각 가정과 사업체가 그 정보를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도와야 하는데, 옳지도 않고 과학적으로 맞지도 않는 보도를 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출발이었습니다. 

촛불시위 중에는 이념적인 편향성이 드러났습니다. 시위 주도자들은 불교 사찰로 숨었고 불교는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그런 과정 중에 현 정부의 종교적 편향을 주장하는 불교도들의 시위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들이었습니다. 저는 현 정부나 대통령이 정책적으로 기독교적 편향성을 드러내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과거 30년 동안 군사정권의 불교 편향적 대통령이 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청와대에 불상까지 들여놓았습니다. 그것을 놓고 기독교가 시위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기독교는 현 대통령과 정부가 기독교 편향적이 되는 것을 절대 원치 않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글이나 말로써 대통령이 기독교 장로이기 때문에 기독교 편향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고, 심지어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는 “대통령 근처에도 가지 마시오!”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몇몇 실수한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조심하고 조심했습니다. 대통령이 기독교 편을 드는 것은 기독교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대통령 때문에 기독교가 기독교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인 것입니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이 나라가 잘 되고 예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뜻을 담은 장문의 글을 써서 대통령께 보내기도 하고, 정책을 걱정하는 분들이 저에게 그것을 받아가기도 했습니다. 

한국은 그동안 천주교, 불교, 기독교, 이 큰 세 개의 종교가 서로 다툰 적이 없습니다. 아마 세계역사 가운데 여러 종교가 서로 존중하며 가장 평화롭게 살아온 몇 안 되는 국가일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좋은 분위기속에서 국민들이 종교생활을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지난 여름에는 금강산을 여행하던 남한의 여성이 북한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때부터 남북 관계가 어려워지고 6자회담도 결렬되었습니다. 

가을부터는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파탄으로 전 세계에 경제공황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자기 능력보다 비싼 집을 무리하게 사서 집의 모기지를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욕심을 너무 많이 내는 바람에 빌린 돈을 갚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돈을 빌려준 모기지 회사들은 돈을 상환 받지 못하게 되자 파산을 하였고 관련 회사들도 줄줄이 무너졌습니다. 그 영향이 우리나라에까지 미쳤고 우리의 직장이 흔들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직장을 얻지 못하는 불행이 닥쳤습니다.

어제는 내년 상반기 경제가 1920년대 최악의 경제 상황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는 영국 정부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영국 한 나라만 그렇겠습니까.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예견입니다. 경제가 끝없이 성장할 줄만 알고 돈에 인생을 걸었던 전 세계의 사람들은 큰 낙심과 상처와 손해를 보면서 불안에 떠는 한 해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어떻습니까. “사회가 어렵고 회사가 부도나고 실직자가 늘어나니 우리 모두 힘을 모아 국민들의 아픔과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줍시다!”라며 여야가 힘을 합해야 할 이 때에 이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오히려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아픈 상처에 소금을 바르는 것처럼 심적인 고생, 실망과 분노, 짜증으로 국민들은 가슴이 아픕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머리를 맞대고 국민을 위해 마음을 모으고 토론하고 방법을 찾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는 좋은 한 해였으나 국가적으로는 어려운 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3장은 예루살렘과 성전이 완전히 붕괴된 후 예레미야 선지자가 쓴 내용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모두 5장으로, 1장은 남편과 자식을 잃은 한 과부가 주저앉아서 목 놓아 한탄하는 내용입니다. 2장은 나라가 망하게 된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백성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채찍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남과 북으로 나뉘었던 이스라엘과 유다는 BC 586년, 남쪽 유다가 망했습니다.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성전은 모두 훼파되어 나무 한 그루 남지 않았습니다. 성전 안에 있던 은그릇, 금그릇 같이 좋은 것들을 다 가져가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유대 민족을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BC 722년에 이미 있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2에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10개 부족이 모두 노예로 잡혀가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남쪽도 북쪽이 걸었던 악한 길을 갔습니다. 불의와 죄가 성하고 위선이 넘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소리를 높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회개하라, 돌아와 하나님을 섬겨라.” 그러나 백성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북쪽이 망할 때 남쪽을 향해 경고했으나 유다는 그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모두 멸망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북쪽은 망했습니다. 국민이 먹지 못하고 굶어죽는 나라가 우리와 같은 민족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전 세계가 도와주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남쪽은 유다처럼 아직 괜찮지만 우리도 범죄하고 불의를 행하고 싸우면 언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북보다 낫다고 영원히 그럴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평화! 평화! 평화로울 때 재난이 일어나고 재앙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남쪽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옷깃을 여미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당하면 낙심합니다. 힘들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 나라, 민족이든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의 첫 반응은 낙심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어려움이 닥치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낙심이 됩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19-20절). 나라의 어려움에 낙심이 됩니다. 속이 상하고 쓰립니다. 속이 상하고, 욕하고 싶고, 책망하고 싶고, 때리고 싶은 육적인 반응은 죄성을 가진 인간의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육적인 반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번째 반응이 있습니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21절). 하나님 안에서 영적으로 생각해 보니 우리 가슴에 새로운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희망입니다. 일이나 여건 때문에 희망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즉 하나님을 생각하니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면 실망스럽지만 하나님을 보면 희망이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중심에 회상한즉” 한 번 두 번 생각해 보니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니 희망이 생깁니다.

여러분과 제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기에 우리가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분(22절)이십니다. 우리는 죄가 많고 실수가 많고 잘못하고 제대로 못하는 것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할 때에 바로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 오래 참으시면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가 돌아오도록 선지자를 보내시고, 환경과 여건을 통하여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고 하시는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신 분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부족함이 있어도 이런 하나님께서 우주와 역사와 민족과 교회를 다스리시고 우리의 가정을 다스리심을 믿습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생깁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가 하나님께 올 때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성실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23절).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이것”이 무엇입니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인간은 신실하지 못하고 꾸준하지 못하고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과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십니다. 변함이 없으십니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또 겨울이 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여러분과 저를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범죄하고 불의하고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들어도 하나님은 참고 또 참으시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끝까지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 없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늘나라 가는 그 날까지 우리를 돌봐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했습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25절).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분께 다가가고 회개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선을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 지금은 어려운 때요, 내년 상반기에는 더 어려워진다는 전망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가 되든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은 정부도 아니요 내 자신도 아니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반드시 좋은 것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선을 베풀어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26절). 당장 변화가 없어 보이고 당장 잘 되는 것 같지 않아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의 마지막이요, 우리의 능력자요,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어떤 여건과 환경도 이길 수 있는 힘과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강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주님께 바짝 다가가서 그분과 함께 살려고 결심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을 때 우리들의 언어는 달라집니다. 신앙고백이 생깁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24절). 내 가슴속에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내 가슴과 입술에 신앙고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유산이요.” 하나님은 지금은 물론 내 평생토록 나의 기업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아침에 주님의 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하나님, 당신이야말로 내 평생의 기업이요 유산입니다”라는 고백이 여러분의 입술에 새롭게 나타나길 바랍니다. 두 번째 고백은 “하나님은 나의 희망”입니다. 믿음뿐 아니라 희망을 갖게 하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희망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결과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24절)는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주시고 모든 어려움에서 반드시 건져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역사요, 우리의 경험이요,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려움 때문에 당장은 고난이 있고 쓴 담즙이 있다 하더라도 이럴 때 일수록 더욱 믿음을 굳건히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이 많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신실하시고 선을 베푸시며 구원의 손길을 뻗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대상이요 우리의 희망이라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비록 어려운 한 해를 보냈지만 새해에는 아침에 다시 뜨는 찬란한 해처럼, 하루를 은혜와 축복 가운데 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며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승리로 마무리 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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