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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히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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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히 10:22)


(히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황해도 해주에 이목교회가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자유를 빼앗긴 슬픈 시절이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일본사람으로 만들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사람들의 정치를 따를 수 없었습니다. 우상을 섬기게 하는 것을 따를 수 없었고, 주일에 일을 시키니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많은 피해를 당하면서도 일본사람들과 맞서야만 했습니다. 

주일에는 교회당에서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드리는 것으로 주일을 다 지킨 것은 아닙니다. 이 날은 종일 하나님의 일만을 하고 세상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에게는 주일이 없습니다. 그냥 매일같이 일, 일, 일입니다. 

주일 아침 8시에 순사(순경)가 교회에 왔습니다. 이 교회는 작은 교회라 목사님도 계시지 않습니다. 순사는 장로님을 만나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늘 길 닦는 데 나와서 일을 하시오!' '오늘은 주일입니다.' '예배 시간이 몇 시오 ?' '11시입니다.' '그럼, 10시까지 두 시간만 일 하시오.' '오늘은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배시간 전 두 시간만 길을 닦으라 하지 않소 !' 

강한 일본 사람들의 세력에 눌려 교인들은 하나 둘 일하러 나갔습니다. 마음이 매우 무거운 가운데 땅을 고르고 자갈을 날랐습니다. 10시가 넘어 교인들이 일을 마치고 교회당에 들어오니, 이게 웬일입니까 ? 교회당 안에 가마니 짜는 기계가 죽 들어앉아 있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노한 소리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이게 무슨 짓이오? 이 가마니틀을 밖으로 끄집어내십시다.' 이리하여 교인들은 힘을 합하여 가마니틀을 모두 밖으로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몇 날이 지나고, 순사가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가마니틀이 모두 교회당밖에 있는 것을 보고 노하여 소리쳤습니다. '누가 이렇게 하였나 ?' '교인 모두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교인들 다 모이라고 해 !' 결국 장로님을 비롯하여 교인들이 다 모였습니다. 순사가 소리쳤습니다. '어찌하여 나라에 시설한 가마니틀을 마음대로 끄집어내었는가? 여러분은 나라의 명령을 거절하는 거요!' 

이때, 장로님이 대답하였습니다. '교회가 귀합니까? 잘못된 나라의 명령이 중합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예배하는 장소인데 가마니틀을 넣어도 됩니까? 우리가 이 교회당을 지을 때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려고 지었지, 가마니틀을 놓으려고 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사가 더욱 큰 소리로 악을 썼습니다. '나라가 지금 비상시국인데 예배가 다 뭐요? 나라를 위해 일을 해야지! 비어 있는 교회당에 가마니틀을 넣은 게 잘못이란 말이요?' 

장로님은 더욱 큰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그래, 일본법은 남의 집에 억지로 가마니틀을 넣어도 되는 거요? 넣을 자리가 없으면 당신 방에 갖다 넣으시오!' 순사는 어이없이 장로를 노려보다가 교인들을 보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오?' '우리도 장로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결국 순사는 60명 가까운 교인들을 장로님과 함께 유치장에 가두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음식을 넣어 주었지만 모두 안 먹고 금식을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3일째 금식을 하고 나니 간수가 와서 말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다 나가세요. 일본이 손을 들고 여러분은 해방되었습니다.' 교인들이 밖으로 나와 보니, 서장도 순사들도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구약의 제사 의식을 끝마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방식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삶의 궁극적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뿌림을 받아'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피를 뿌림으로 깨끗하여진 것을 연상케 합니다

(출 29:21) 제단 위의 피와 관유를 가져다가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 그와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

(레 8:30) 모세가 관유와 제단 위의 피를 가져다가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에 뿌려서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을 거룩하게 하고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새 언약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옛 언약하에서 깨끗게 할 수 없었던 양심이 온전히 깨끗게 되어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맑은 물'(휘다티 카다로)은 70인역에서 정결 의식에 사용되는 물을 가리킵니다

(민 5:17) 토기에 거룩한 물을 담고 성막 바닥의 티끌을 취하여 물에 넣고

(겔 36: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맑은 물(휘다티 카다로)은 육체의 외적인 더러움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적 정결을 통해서 깨끗게 된 양심에서 비롯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나타냅니다(Bruce).
따라서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성취된 내적 정결을 나타내는 외적인 표징으로 '세례'를의미합니다(Windisch, Bruce, Morris, Spicq, Dahl).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내적인 정결을 경험하고 세례를 통해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해 고백을 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참마음은 하나님께서 새 언약하에서 자기 백성에게 '새 마음'을 창조하시겠다는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렘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러한 약속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성취되었으며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의 더럽혀진 양심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정결케 되었습니다

(히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앞에 나아갈 때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양심 곧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Bruce, Morris, Hewitt).
  
밝은 태양이 떠있지만 구름에 가리워져 있으면 그 태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먹구름이 가리워 있으면 대낮인데도 온 세상이 어둡게 보입니다. 우리에게는 찬란하게 우리를 조명해주시는 하나님이 늘 우리 곁에 계시지만 죄악의 먹구름, 불신앙의 먹구름이 가로막혀 있으면 하나님을 가까이 만날 수 없게 됩니다.

온전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창조된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성과 확실성을 가리킵니다(Morris, Lane).
그리스도인들은 대제사장이시며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나나가야 합니다.

신앙을 가진 네사람이 길을 가다가 큰 산을 만났습니다. 그때 네 사람의 반응이 각각 다릅니다.  
첫 번째 사람은 큰 산을 만나니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큰산으로 인하여 내가 앞으로 가지 못하게 하시나이까"라는 원망과 불평의 기도를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하나님! 이 산을 돌아가는 방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소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합니까? 나에게 피할 길을 가르쳐 주소서."라는 소극적 기도의 사람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하나님! 이산을 넘어갈 수 없사오니 이산을 바다로 옮겨 주옵소서. 평탄한 길을 열어 주소서!"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기도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런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온전한 기도의 모형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사람은 문제 앞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산을 넘어갈 수 있는 믿음과 힘, 용기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있어 이 어려운 난관이 내게 왔으니 내가 좌절과 실망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헤쳐 넘어갈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온전한'이란 말은 '건전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건전한 믿음 위에 있을 때에 참된 신앙의 성숙이 있게 됩니다. 
  
믿음을 세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토마스 그룸-기독교 교육학자)

첫 번째 단계는 <인지적 차원에서의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쉽게말하면 내가 믿는 하나님이 깨달아 진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부터인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꼭 살아계신 것 같고 나를 사랑하시는 것 같고 그분 때문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을 ‘인지적 차원에서의 믿음단계’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두 번째 단계는 <신뢰적 차원에서의 믿음>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느껴지는 것을 넘어서서 어느날부터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이 생깁니다. 마음도 평안해 집니다. 그냥 좋습니다. 하나님 이야기 하나님 말씀만 나와도 그냥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바로 이런 단계가 ‘신뢰적 차원에서의 믿음단계’라고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세 번째 단계가 <의지적인 차원에서의 믿음>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고 믿어지니까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니까 삶에 용기도 힘도 생깁니다. 그래서 아무리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 생기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온전'이란 말은 '강하다'는 뜻도 되고, '완성'이라는 뜻도 됩니다.
세계 1차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어져 갈 때 영국군은 천년 동안을 터키가 지배하고 있는 팔레스틴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영국 사령관 엘넨이 장군은 본국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국왕 죠지 5세에게서 공격 금지령이 하달되었는데 그 이유로는, 
(1)예루살렘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성성이니 공격이 불가하다. 이는 불경죄이며, 
(2)예루살렘을 공격했던 바벨론, 파사, 로마가 멸망하였으니 공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령관은 답답해서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라고 반문할 때 회전이 오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격하지 않고 온 군대가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터키군 측에서는 갑자기 진격해 오던 영국군축이 죽은 듯이 고요한 상태가 계속 되자 오히려 답답해서 영국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 주전 골키퍼 카를로스 로아가 돌연 은퇴를 선언한 것입니다. 그 이유인 즉 축구 경기가 주일에 열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없어서 랍니다. 소속 팀 레알 말로르카 구단주인 레이네스는 200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36억을 더 주겠다고 제시했습니다. 그는 "돈이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거절했답니다.
세상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강해야 합니다. 말에 흔들리고, 역경에 흔들리고, 환경에 흔들리고, 또 소유에 따라 흔들리고, 대상에 따라 흔들리면 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끝까지 견고한 신앙, 흔들리지 않는 신앙,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신앙, 이런 견고한 신앙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민 14: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갈렙을 칭찬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에 빈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열 정탐꾼의 아우성치는 미혹의 소리에도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라본 믿음의 눈은 정말 빛이 났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본 가나안 땅은 너무 너무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어느 한 순간에 있다가 사라지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신앙에 따라서 결과가 주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역사가 있어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가 지니고 있는 신앙은 뒤에 엄청난 사건으로 이것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늘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약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영국 해군에 소속되어 있는 두 병사가 프랑스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들은 감옥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중, 탈옥을 결심하고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하나하나 해 나가기 시작했다. 감옥의 지리며 건물의 특성, 그리고 경비의 실태 등. 드디어 탈옥하기로 작정한 날이 되었다. 그들은 계획대로 어두운 밤을 틈 타 조심스럽게 탈옥을 시도했다. 탈옥은 그들의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무사히 감옥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양으로 해안까지 뛰었으나, 배가 없이는 오지도 가지도 못할 상황에 부딪치고 말았던 것이다. 두 병사는 궁리 끝에 뗏목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는 주위에서 나무들을 가져다가 열심히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겨우 뗏목을 완성하고 두 병사는 그 위에 올라탔다. 너무도 기뻤다. 그야말로, 꿈에도 그리던 탈옥이 그제서야 실현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뿐, 그들은 얼마 못 가서 해안 경비 중이던 프랑스군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감옥으로 수송되었고 그 이튿날, 나폴레옹으로부터 직접 신문을 받게 되었다. '너희 둘이서 그 뗏목을 만들었느냐?' '예, 그렇습니다.' '너희는 그 뗏목을 타고 해협을 건너 영국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예. 그렇습니다.' 두 병사의 진지하고도 자신만만한 그 대답에 나폴레옹은 잠시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나폴레옹은 부하를 불러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이들을 풀어주어 영국으로 보내주어라. 아무리 적군일지라도 이렇듯 큰 믿음과 용기가 있는 자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나 스스로도 이들의 용기에 감탄하고 말았다 !' 

영국의 스트라칸 목사님이 어느 날 서재에서 친구와 심각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딸이 들어왔습니다. 딸의 줄넘기 줄이 엉망으로 엉켜 있었습니다. 그의 딸은 아무 말도 없이 그것을 아버지에게 건네어 주고 조용히 방을 나갔습니다. 그는 친구와의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무심결에 그 줄의 매듭을 다 풀었습니다. 잠시 뒤에 그의 딸이 들어와 “아빠. 고마와요!” 하고 깡충깡충 뛰어 나갔습니다. 스트라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께 이와같은 태도를 가질 수는 없는지요.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맡겨, 주님께서 그것을 다 해결하게 할 수 있는데 왜 우리는 자기의 힘만으로 해결하려고 그토록 애를 씁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는 일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사명 감당하고 영광돌리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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