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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 6: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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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라 (신 6:4~15)


1. 지금은 민법제도에서 이혼 사유로 전혀 인정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말로 여기는 유교의 칠거지악(七去之惡),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이른 바 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이유들입니다. 그 7가지는 

1). 불순부모(不順父母),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내쫓는다. 
2). 무자(無子), 아들이 없으면 내쫓는다. 
3). 부정(不貞), 음탕하면 내쫓는다. 
4). 질투(嫉妬), 질투하면 내쫓는다. 
5). 악질(惡疾), 나쁜 병이 있으면 내쫓는다. 
6).다언(多言), 말이 많으면 내쫓는다. 
7). 절도(竊盜), 도둑질하면 내쫓는다. 등입니다. 

그러나 칠거지악에 해당하는 잘못을 지었더라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에는 내쫓지 못하도록 한 삼불거(三不去)가 있습니다. 

1). 내쫓아도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 
2). 함께 부모의 삼년상을 치른 경우 
3). 전에 가난하였으나 혼인한 후 부자가 된 경우 등입니다. 

칠거지악 중 하나였던 ‘질투’(嫉妬, jealousy)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사랑의 한 형태로서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자기 이외의 인물을 사랑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대인 감정 같은 것을 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질투는 칠거지악 가운데 하나였고, 수치심으로 여겼었습니다. 또한 심한 질투는 병적인 현상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미국에서는 질투가 남녀관계를 공고히 해주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한다는 심리학자들의 새로운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질투는 수 백만 년에 걸친 인류의 역사에서 사랑의 결합관계를 보호하고 간통과 버림받음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진화해 왔다. 

질투는 괴로운 감정이지만, 관계를 위협하는 라이벌이 나타나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닥치기 전에 미리 대처를 하게 하는 경보장치”라고 텍사스대의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부스 교수는 말했습니다. 그는 질투는 공히 남녀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며 남자에게 질투가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가 남편 몰래 다른 남자의 자식을 잉태한 것도 모르고 결국 남의 자식을 키우는 뻐꾸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아내를 감시하는 측면에서 남자에게 질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여자는 남자가 자식이 클 때까지 자신과 자식에게 사랑을 바칠 충성심 있는 존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질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부스 교수는 ‘질투가 전혀 없는 것은 오히려 사랑하는 파트너에게는 불길한 징조이고, 정서적인 파탄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연인 시절에 질투를 많이 했던 남녀들이 결혼에 골인하게 되는 확률이 높다는 조사도 최근에 나왔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부부 150쌍을 조사한 데 따르면 여성의 40%가 남편의 사랑을 시험하려고 질투를 자극했고, 38%는 관심과 애정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남편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이밖에 여성의 8%는 자신의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 10%는 다른 사람과 놀아나는 것에 대한 복수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2. 오늘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 배불리 먹게 되었을 때 ‘삼가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잘 살게 되었다고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면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므로 진노하여 지면에서 멸절시켜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이란 말씀은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8:6-7)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나를 인장 반지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도장처럼 팔에 새겨 두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무력하고 죽음의 부름에 누구도 거역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한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인류에게 보여주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시킬만큼 모든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 사랑의 ‘질투’는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불길 앞에 살라지지 않는 것이 없는 것처럼 그 어떤 것,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 사랑의 불길을 끌 자가 없다,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홍수조차도 그 사랑의 불길을 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죄와 죽음까지도 정복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는 말씀에서 처럼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천국’과 같이 최고의 가치,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3:44-47)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절대적으로 사야만 하는 최고의 가치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처럼 온 천하를 다 내어주고도 살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속죄의 제물로 희생된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로 ‘보배로운 피’라고 한 것입니다. 피흘리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3.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신명기10:12-13을 보겠습니다. 

(신명기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2009년, 성도 여러분의 행복한 삶을 위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다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을 ‘음란’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신부, 아내로 표현했습니다.

(사54:5-10)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이렇게 사랑하는 신부처럼, 아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우상숭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렘3:20)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같이 너희가 정녕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배신하고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 ‘음란한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을 멀리하는 지금 이 시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부르셨습니다.

(마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하면서(엡5:24-28)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면 간음하는 여자로 불렀습니다.

(약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우상숭배만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것 역시 하나님 앞에 음란, 간음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란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는 예수님 말씀처럼 마음에 하나님을 생각지 아니하고 세상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영적으로 ‘음란’이며, '간음하는 여자‘인 것입니다. 로마서 8:7-8을 보겠습니다. 

(롬8: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의 전형적인 죄악이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들은 모두 사탄으로부터 온 것들입니다. 하와가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가 이미 ‘육신의 정욕’에 기울어진 것이며, “보암직도 하고” 가 벌써 ‘안목의 정욕’에 빠진 것이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가 ‘이생의 자랑’에 정신 못차린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에 빠진 아담과 하와는 결국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정욕’은 영적인 것과 전적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육체의 만족을 채우고자 부패한 도덕과 더러운 죄악을 따라 추구하는 탐욕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의 타락의 대가로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거나,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남의 인격을 무시하거나, 자기의 안전과 야심을 신(神)으로 섬기는 사람은 모두 육신의 정욕의 종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 수 없습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보는 눈을 통하여 유혹을 받는 죄악으로 사치, 향락, 허욕, 색욕 등을 말합니다. 이는 오로지 보이는 대로 쾌락을 추구하려는 생각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황금만능주의와 물질 중심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이 ‘안목의 정욕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물질적 가치보다 영적인 것에 비중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개달아야 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헛된 이 세상의 것들을 높이고 과장함을 의미합니다. 또 없는 것을 있는 체,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인 양 허세를 부리는 것을 뜻합니다. 헛된 물질의 풍요함을 믿고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만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만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 가운데 죽음보다 더 강하고 홍수라도 끌 수 없는 불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걸려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모압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모압 왕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아주 강력한 아모리 족속을 너무나 쉽게 섬멸하고 요단 강변까지 진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의 위세에 눌려 큰 두려움에 휩싸였고 이스라엘을 물리칠 묘책을 찾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스라엘은 모압이 형제 민족이라는 점에서 모압에 대해 아무런 적대 감정이나 싸울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요단 강을 건너가기 쉽게 길을 내달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모압 왕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냥 지나갈리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힘으로는 안될 것 같아 찾아낸 묘책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 위해 찾아낸 인물이 발람이었습니다. 

발람은 당대 유명한 복술가였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엄청난 뇌물을 주고 발람을 고용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이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훤히 보이는 산에 올라가 저주를 퍼붓고자 했지만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에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 말을 담아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도록 했습니다. 무려 4차례나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도록 했지만 그 때마다 발람의 입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축복이 터져 나왔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참다못해 이렇게 따집니다. 

(민23:11-12)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온전히 축복하였도다.

뇌물을 잔뜩 받아먹은 발람이었지만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 자신도 어찌할 수 없다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민23:12) 

결국 발람의 저주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 뇌물을 받아먹은 발람은 발락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계책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하여 모압 여자들 중에 가장 빼어난 몸매에  가장 섹시 댄스를 잘 추는 여자들을 동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모르고 발락의 초청에 응해 섹시 댄스에 취해 모압 여자들과 음행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광야 40년 생활에 피곤하고 지쳐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뜻하지 않은 육체적 향연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하나님 말씀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이성마저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행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우상의 제물을 거침없이 먹고 마시며 심지어는 우상을 숭배하기까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버가모 교회가 당한 죄악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내용이 발람의 교훈에 따른 것입니다. 

(계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육신의 정욕’을 충동질하는 섹시한 모압 여자들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안목의 정욕’을 간질이는 섹시 댄스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책 없이 눈이 멀었습니다. 결국 발람의 술책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모세를 불러 명령하십니다.

(민25:4) 너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을 잡아다가 대낮에 내 앞에서 처형시켜라. 그러면 이 백성에 대한 나 여호와의 분노가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음행 끝에 우상숭배한 사람들을 모두 처형토록 했습니다. 이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늦게나마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고 울며 회개하고 있었는데 시므온 지파의 족장인 시므리란 자가 음욕을 채우기 위해 모세와 백성이 보는 앞에서 모압 여자를 데리고 버젓이 자기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이방 여자와 음행을 하고 우상을 섬긴 대가로 지도자들이 교수형에 처형되고 백성들이 염병으로 2만 4천명이 죽어가고 있는, 그야말로 민족의 운명이 위태한 형편입니다. 

이러한 민족적 위경을 맞아 이스라엘 온 백성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철저한 회개를 하는 중입니다. 이렇게 음행 때문에 민족 전체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시므리는 음욕에 눈이 멀어 ‘온 백성의 목전에서’, 마치 백성들의 회개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이방 여자를 끌어들인 것입니다. 실로 그는 민족의 운명보다 자신의 쾌락을 더 중요시하는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자였습니다. 바로 눈에 보이는 백성들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가히 화인 맞은 양심의 소유자였습니다.(딤전 4:2). 

오늘날도 제 2, 제 3의 시므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남들은 어찌 살든 나만 편하게 잘 살겠다는 이기적인 인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구현되든 말든 악에 편승해서 쾌락과 방종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러한 때,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끓어오르는 의분을 끝내 참지 못해, 창을 들고 쫓아 들어가 음탕한 두 남녀를 한꺼번에 찔러 죽였습니다. 실로 이것은 의로운 분노였으며, 죄악에 대한 단호한 처벌이었고,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한 한 인간에 대한 거룩한 징계였습니다. 비느하스의 이 의로운 분노는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으며, 그 결과 염병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민25:7-9)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25:11-13)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제사장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는 말씀에서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질투심’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보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느하스는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 홍수라도 끌 수 없는 불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했습니다. 심히 타락하고 부패한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불의와 범죄를 용납치 않는 결연한 의지와 의로운 분노가 요청됩니다. 

우리에게는 정녕 철두철미하게 죄악을 도말하시는 뜨거운 하나님의 심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지닌 비느하스는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누리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받았습니다. 비느하스와 같은 불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어 속죄함을 얻는 가정과 나라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당대 가장 유명한 화가를 스승으로 모신 세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제자들은 모두 스승의 화법을 배우려고 제각기 스타일에 따라 노력했습니다. 첫 번째 제자는 화실에서 위대한 스승의 그림을 복사하듯이 그대로 모방하여 그리고자 애썼습니다. 그는 스승을 찾아가 대화를 한다거나 강의를 듣는 일은 전혀 없이, 그저 아침부터 저녁까지 화실에서 온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수 십년의 세월을 보낸 뒤 그는 누가 보더라도 스승과 자기의 작품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완벽히 스승의 그림을 모작(模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그림을 위대한 작품이라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타가 모두 공인할 만큼 위대한 그림을 남기지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반하여 두 번째 제자는 화실에서 그림 그리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스승의 강의란 강의는 다 참석하는 열심을 보였습니다. 실로 그는 쉴 사이 없이 원근법, 채색법, 명암 등에 관하여 이론적으로 연구하였으며 관련 서적을 거의 탐독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에도 불구하고 그 또한 스승의 영광을 계승할만한 그림은 한 점도 남기지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제자는 실제 그림 그리는 일에 있어서는 첫 번째 제자와 같았고, 이론적인 면에서는 두 번째 제자와 같았습니다. 게다가 앞의 두 제자가 생각지 못한 일을 하였는데, 무엇보다 그는 스승을 진심으로 사랑하였고 스승을 인간적으로 깊이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따라서 그 젊은 화가는 스승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예술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이며, 예술가들의 할 일이 무엇이냐는 주제로 스승과 격이 없는 대화를 수없이 많이 나누었습니다. 

이런 친밀한 교제로 그들은 말하는 방법이나 생각의 방식까지도 비슷해졌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얼굴 모습까지 닮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얼마간의 시간이지나자 그들의 화법은 비슷하게 되었고, 결국 그 젊은 화가의 캔버스에서도 스승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름다움과 위엄과 빛나는 예술 혼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세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또 그것을 삶에 진지하게 적용하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율법의 시작이며 율법의 마침, 율법의 완성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이렇게 사랑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1-13) 시편 기자(記者)가 고백합니다.

(시73:25-28)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몸과 마음이 비록 쇠약해질지라도 변함없는 사랑과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사모하여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생활로” 항상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는 금년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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