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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사 60: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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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사 60:15~22)


2009년 첫 주일입니다. 올 한 해도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올 한 해의 경기를 전망하면서 어려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에 희망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희망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사람이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희망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 십니다. 

이사야가 사는 시대에는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어렵고 힘든 때였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남북이 분단되어 있었고 그가 활동하던 시대(BC 740-700년경)에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B. C 722년). 남쪽 유다도 북쪽에 있는 앗스르와 남쪽에 있는 애굽, 신흥 바벨론 사이에서 언제 나라가 망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때 이사야는 계속 하나님보다 동맹국을 의지하면 멸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예언대로 유다는 바벨론에게 처참하게 멸망당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유다가 회복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금융 위기 정도가 아닙니다. 나라를 잃어버려 모든 경제가 초토화된 백성입니다. 실업 정도가 아닙니다. 부모를 잃고 포로로 잡혀간 백성, 전쟁으로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노예처럼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교회의 초라함이나 갈등, 교회 생활의 시험이 문제가 아닙니다. 거주 이전의 자유까지 잃어버리고 성전이 파괴되어 예배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는 백성입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고 자랑하는 민족이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조롱받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가깝게는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올 유다 민족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고, 동시에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완성될 영원한 천국, 영광스런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2009년 첫 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 오셔서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1. 희망이 되신 하나님(15-16)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주시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희망이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금융 위기를 통해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경제가 희망이라고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사단은 빠져 나오기 힘든 덫을 놓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사탄의 덫에 한 번 빠져들면 빠져 나오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세계인들은 한 목소리로 ‘경제가 희망이다.’라고 합창하고 있습니다. 경제만 잘되면 세상은 행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경제만 잘되면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합니다. 이런 경제 위기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일까요? 경제가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확성기에 대고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과거 세계적인 대공황이 있었습니다. 실업률 25% 네 집 중 한 집이 실직이었습니다. 1929년부터 33년까지 약 4천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전까지 경제가 인류의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공황 직전인 1928년은 경제는 호황이었지만 미국에서 20세기 중 소득 불균형이 가장 극심했다고 합니다. 금융시장 붐으로 부를 쌓은 상위 5% 부자들의 수입이 미국인 전체 수입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계 대 공황이 왔습니다. 최근 2, 3년간도 상위 5%의 수입은 미국인 전체 수입의 38%에 달했다고 합니다. 

경제가 희망이라고 경제는 급속히 부흥했는데 빈부격차는 더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탐욕의 극치를 보여준 것입니다. 경제 부흥은 심각한 부의 편중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더 심화시킨 것입니다. 경제 발전이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사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양식이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경제발전이 인류의 희망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 이래 최고의 경제 발전을 이룬 지금 세계는 어떻습니까? 전 세계 상위 2%에 속하는 부자들이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하위 50%가 차지하고 있는 부는 전체의 1%에 불과합니다. 상위 10%가 전 세계 부의 85%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가장 경제가 발전된 나라라고 하는 미국에 빈곤선 이하의 수입으로 살고 있는 국민의 비율이 17%이고 빈곤층 가정의 어린이 비율도 21.9%나 됩니다. 

세계적으로 먹지 못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이 한 해 2,000만 명이고, 하루 1달러 미만 생활자가 12억 명나 된다고 합니다. 경제발전이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입니다. 경제 발전이 없는 동물보다 못하지는 않습니까? 글자를 읽지 못하고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20억 인구가 있습니다. 2달러 미만의 식비로 하루를 연명하는 빈곤층 인구가 전 세계 인구의 45%에 해당하는 28억 명에 이릅니다. 

우리는 일 년 술값으로 14조, 성매매로 24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의 실직자, 취업준비자, 구직 포기자, 불완전 취업자를 합하면 317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공식빈곤층, 가장이 실업자인 가구, 노인 혼자 사는 가구를 합하면 600만 가구를 헤아린다고 합니다. 나라마다 기업을 살리는 데는 수조, 수십조 원씩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굶주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책을 강구하고 있습니까? '따뜻한 국정'이리고 말만하지 효과적인 대책이 없습니다. 경제발전은 소수에게 희망을 주고 있고 다수의 많은 사람에게 환경 재앙이라는 절망을 안겨 준다면 그것이 희망이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경제가 발달되어 자동차가 잘 팔이어 65억 인구가 자동차를 다 타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구 환경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고 제가 경제 발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긍극적으로 떡이 희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떡으로만 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마 6:33)”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학이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과학은 결국 인간의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하여 파라다이스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류는 과학에 의해 그동안 네 차례의 혁명적 변화를 이룩해 왔다고 합니다. 농업혁명, 산업혁명, IT 혁명, BT 혁명 등을 말합니다. 농업 혁명에 이어 산업화 시대에는 공간을 정복했고, IT 시대에는 빛의 속도로 시간 정복에 다가 섰으며, BT 시대에는 물질을 정복하면서 인간의 생명 현상까지 바꾸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바이오는 21세기 번영의 나라로 가게 할 것이고 생명공학은 모든 질병을 정복하는 희망을 인류에게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희망입니까? 과학의 발달로 만들어 낸 것에 의해 편리함을 누리기도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술 문명의 발달로 희생되고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과학이 만들어낸 핵으로 인류는 언제 잿더미로 변할지 모릅니다. 제가 과학 발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이 선하게 사용되면 인류에게 많은 유익을 주지만 긍극적으로 과학 역시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시인은 인간이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얼마나 악합니까?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은 결코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가서 경제를 희망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풍요의 신, 바알을 섬깁니다. 사람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앗수르와 애굽, 바벨론이 자신들의 안전을 보호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되어 버렸습니다. 땅을 잃어버리고 성전은 파괴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포로로 잡혀가 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15절을 읽어 보십시오. 전에는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희망으로 삼지 않고 그것들을 희망으로 삼을 때 버림을 입었습니다. 미움을 당하였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떻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영영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실 것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내가”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나의 은혜로 너희를 긍휼히 여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그 일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시적인 표현입니다. 사람이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다 나라가 예상치 못한 열방이 도움을 준다는 말입니다. 고레스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닥사스다의 도움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합니다(스1:1-3; 7:21-26). 그들을 통하여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이방인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여 도움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신약의 하나님의 교회가 이방 사람들을 통하여 흥왕될 것을 말씀합니다. 초대교회가 부흥되는 데는 이미 통일된 헬라의 언어와 문화가 있었습니다. 잘 정비된 로마의 법과 교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용하여 교회는 급속하게 부흥되었습니다. 인간 경제와 과학이 만들어내 것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하나님을 희망으로 삼으로면 근본적으로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백성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여호와가 구원자, 여호와가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이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희망이 있습니다. 인류의 희망, 대한민국의 희망, 교회의 희망,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말을 하면 예레미야처럼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노아의 홍수 때처럼 홍수를 외치는 노아를 사람들이 조롱한다 해도 방주를 지은 것처럼 하나님이 희망이라고 외쳐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을 떠난 거대한 바벨론 문명은 결국 멸망한다고 외쳐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없은 화려했던 수많은 문명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께 돌아오는 길이 인류의 살 길이라고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길이 인생의 살 길이라고 외쳐야합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시 71: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46:5)”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렘 17:13)”라고 했습니다. 2009년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선택받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 말씀합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2. 하나님을 희망으로 삼는 자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17-20)

하나님을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해 주십니까? 회복시켜 주십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될 나라, 회복될 완전한 교회의 모습, 천국을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희망으로 삼은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회복시켜 주십니까?

1)풍성함이 있게 해 주십니다(17).

바벨론 포로 시절 때 성전이 다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성전에 있는 것을 다 빼앗아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합니다. 건축 재료가 무엇입니까? 금을 가져 놋을 대신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은을 가져 철을 대신하고 놋으로 나무를 철로 돌을 대신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부요함과 풍성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빼앗기고 갈하고 배고픔이 없다는 말입니다. 경제로 희망을 삼고 살 때 누리지 못한 풍요로움이 유다 모든 백성에게 임하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모습(계21:9-22:5)입니다.

2)화평과 공의가 통치하는 세상으로 만들어 줍니다(17). 

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평은 살롬이라는 말입니다. 안녕, 평화, 번영, 건강, 완전, 안전 등의 뜻이 있습니다. 누리는 부요가 살롬이 관원이 되고 의가 감독이 된다는 말은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인류가 실현하려고 했던 희망의 나라 자유와 평등, 박애 어우러진 평화스러운 나라를 우리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다시는 강포하는 일이 있지 않을 것을 말씀합니다. 완전한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황폐와 파멸이 없을 것을 말씀합니다. 부의 횡포, 경제적 불평등으로 오는 갈등과 번민, 전쟁으로 인한 황폐와 파멸, 기아가 없는 세상입니다. 

3)구원받는 자의 찬송이 있는 나라가 됩니다(18). 

성벽을 구원이라 네 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찬송이 넘칠 것을 말씀합니다. 불신자의 비난과 조롱이 없습니다. 완성될 하나님이교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은 백성이 되고 그곳에서는 영광스런 찬양을 부르게 됩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하나님 보좌에서 구원받은 모든 백성이 찬양하는 천국의 모습입니다. 

4)하나님이 영영한 빛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19) 

마지막에 임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말씀합니다(계21:23; 22:5).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비치기 때문에 해와 달이 필요가 없습니다. 

5)슬픔의 날이 마치는 세상이 오게 됩니다(20).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심으로 죄로 인한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고 슬픔과 불행은 끝이 나는 세상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경제도 인간도 과학도 주지 못하는 희망의 나라, 천국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가면 우리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이런 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땅에 이루어 졌습니다. 61장 1절 이하를 보십시오. 이미 예수님의 오심을 통하여 이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마음 상한 자를 고쳐 주십니다.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해 주십니다. 갇힌 자를 놓여 주십니다. 슬픈 자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재 대신 희락을 주십니다. 슬픔 대신 찬송을 입혀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올 한해 이런 복을 우리가 누려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미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게 했습니다.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사탄이 결박되지 않은 이 땅에서 살기 때문에 유혹이 있고 갈등이 있고 번민이 있고 가난이 있고 질병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회복시켜 주신 것을 누려야 합니다. 누리고 못 누리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미 집안 까지 설치되어 있는 수도꼭지를 틀지 않고 물을 먹지 못하고 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기도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이미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이미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14: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과 죄와 유혹에 지배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녀의 권세를 모든 것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회복된 희망을 누려야 합니다. 

슬퍼하며 낙심하며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트러블 메이커로 불화를 심어주고 의심과 갈등을 심어 주는 삶이 아니라 피스 메이커가 되어 이미 주신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아직 우리가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불완전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천국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회복해주신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2009년 올 한해 하나님이 주신 풍성함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화평과 공의가 지배하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구원의 감격과 찬송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영영한 빛 안에서 매일 매일의 삶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나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3. 희망의 하나님을 전해야 할 희망의 사람들(17-20)

그 회복된 나라에서 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네 백성입니다. 이사야가 속한 유다 백성입니다. 나의 심은 가지입니다. 나의 손으론 만든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열매를 맺는 참 성도입니다. 오늘날 말하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은 가지입니다.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꺾어 접붙인 사람들입니다. 친히 하나님의 손으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밖에 없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존감 넘치는 희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경제를 희망으로 삼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을 희망으로 삼는 사람이 아닙니다. 과학을 희망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심으시고 접붙여 구원하신 하나님을 희망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제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앗시리아를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바벨론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애굽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나에게 앗시리아는 무엇이고 바벨론은 무엇이며 애굽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이들 나라에 비하면 너무나 작고 초라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작다고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하며 낙심하고 포기하여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때의 일입니다. 당시 최강대국 블레셋이 쳐들어 왔습니다. 블레셋엔 골리앗이란 거구의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 앞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겁에 질려 벌벌 떨며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소년 다윗이 나아갔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가만히 놓아둘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목동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막대기를 집어 들고 개울가에서 자갈 다섯 개를 골라 목동 주머니에 넣은 다음 돌팔매 끈을 가지고 그 블레셋 장수 쪽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다윗은 평소 갈고 닦은 실력으로 주머니에서 돌 하나를 꺼내어 팔매질을 하여 갑옷과 투구를 쓴 그 블레셋 장수의 이마를 향해 정확히 쏘았습니다. 골리앗은 쓰러졌습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5-47)” 

다윗은 절망하는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시골 목부의 아들입니다. 이름도 없는 목동입니다. 

덴마크를 살린 그룬트비히 목사님이 그런 사람입니다. 1864년 덴마크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기름진 남부의 실레스비히와 홀스타인 두 주를 빼앗기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만 되었습니다. 국민 전체는 희망을 잃고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다가온 시련과 도전이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이 때 그룬트비히 목사님은 하나님께 희망이 있다고 믿고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혼란 가운데서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나라를 사랑하자, 자연을 사랑하자'라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농민학교를 세워 성경을 기초로 한 정신적인 자원을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마음에 힘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덴마크는 그후 백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낙농국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또한 자원을 개발해서 공업국으로도 번영하게 되고 오늘날 세계에서 국민소득이 가장 많은 나라 중의 하나로 성장한 것입니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워싱턴이 하나님을 희망으로 삼고 세상에 희망을 심어준 사람이었습니다. 노예해방을 하고 남북 전쟁을 통해 통일된 미국을 만든 링컨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인재가 없다고 자금이 없다고 포기하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부하 한 사람, 이 두 사람이 민족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블레셋 민족이 이스라엘을 침범했을 때, 블레셋 군대는 전차 3만, 기마병이 육천, 보병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군인은 겨우 3천, 무기도 변변치 못했습니다. 백성들은 바위틈에 숨고 떨며 흩어졌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군인은 겨우 600명입니다(삼상14:2). 백성들은 패배감과 무기력증에 사로잡혀 희망을 잃었습니다. 이 때 요나단이 말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14:6)” 요나단과 그의 호위병 두 사람이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다수가 다 반대한다고 하나님의 일에 포기하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마찬가지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후 사람들은 10명의 정탐꾼의 말을 듣고 원망하고 울며 희망을 잃어 버렸습니다.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는 것입니다.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절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9)”라고 외쳤습니다.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권력자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불의와 타협해서도 안 됩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과 대결합니다. 홀로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홀로라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불을 내려 그들을 이겼습니다. 

지지해 주는 사람이 적다고 절망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드온을 보십시오. 수많은 적군 앞에 300명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300명 용사로 적을 이겼습니다. 12제자를 보십시오. 약한 자들입니다. 대부분 어부 출신들입니다.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희망을 심어주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힘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실력이 없다고, 기술이 없다고, 능력이 없다고 낙심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 쓰시면 얼마든지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14:12)”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희망을 주시는 우리 하나님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용하면, 하나님이 엘리야를 사용하면, 하나님 요나단을 사용하면, 하나님이 12제자를 사용하면 희망을 주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면 속히 이룰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희망을 심는 사람들은 세상에 생기를 줍니다. 희망을 심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자신이 거름이 되어 줍니다. 텔레비전에 방영된 엘렌 가족 이야기를 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미국 볼티모어에 사는 니콜스 부부입니다. 자신들도 평생을 시각 장애인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정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데 한국의 시각장애인 네 명(엘렌, 킴, 마크, 세라)을 입양하여 사랑과 정성으로 양육하였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부부입니다. 

희망을 심어주는 교회, 희망을 읽어주는 독서 지도사들, 1%의 희망에도 포기하지 않는 의사, 희망을 배달하는 아름다운 가게, 희망을 나누어주는 기업 등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야 말로 이 땅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심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자로 끝이 나서는 안 됩니다. 작은 자이지만 천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약한 자로 끝이 나서는 안 됩니다. 약한 자로 강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결국 하나님의 열심으로 예수님은 재림하시고 눈물도, 고통도, 슬픔도, 증오도, 욕심도, 불의도, 경제적 아픔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임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보좌 앞에서 우리의 구원이 어린양의 피로 이루어짐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보좌 앞에 모여네”
2009년 새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삽시다. 그리고 우리가 올 한 해 내 맡은 분야에서 내 사는 자리에서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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