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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그리스도 예수의 종 (빌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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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의 종 (빌 1:1~2)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오늘부터 빌립보서 말씀을 연속해서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빌립보서는 대표적인 옥중서신, 곧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옥중에서 썼지만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 예로 ‘기뻐하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빌립보서는 짧은 4장인데도 불구하고 16번이나 이 단어를 동사나 명사 형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즘 경제위기나 정치 위기라는 상황으로 인해 국민들이 답답해합니다. 마치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이 막막합니다. 이러한 때에 빌립보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이 기쁨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립보는 바울이 유럽 곧 그리스 지역에 최초로 세운 교회입니다. 그곳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지하 감옥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여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방시켜주었더니 이 귀신을 이용해 점을 치던 주인이 그 일이 어렵게 된 것을 알고 바울을 고발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관청에 끌려가 옷이 벗겨진 채 많은 매를 맞았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채찍 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맞은 후 지하 감옥에 갇혔고 그 발에는 차꼬가 단단하게 차였습니다. 바울은 생각하면 억울했을 것입니다. 많이 아프기도 했을 것입니다. 절망감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순간에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행16:25) 어떻게 이 순간에 찬송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이 순간에 찬송이 나오는 것이 신앙의 위대함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아무리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게 만드십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옥문이 열리고 그 매였던 것들이 다 풀렸습니다. 여러분 찬송에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기뻐할 때 우리를 얽어매던 좌절의 사슬이 풀릴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우리가 빌립보서를 묵상하려는 이유입니다. 몸은 감옥에 갇히고 발은 차꼬에 차였지만 기쁨이 넘치는 것. 마찬가지로 우리 상황은 빌립보 감옥처럼 답답하지만 빌립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우리가 읽은 본문 1절과 2절은 서신의 첫인사에 해당합니다. 첫인사에는 서신을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문안 인사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의례적인 형식들 같지만 단어 하나하나에는 기독교 신앙의 깊은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먼저 서신의 발신인에 해당하는 1절 전반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규정합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서 1장 1절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밝힙니다. 바울은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종은 어떤 존재입니까? 종은 자기 생각이 없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따라서 행할 뿐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유대교를 연구하다 천재적으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종은 자신의 판단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만 따를 뿐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종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종은 자기를 부르신 자를 기쁘게 하려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몸은 감옥에 갇혔지만 이를 계기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활발히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종은 자기가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종은 그 주인을 영화롭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였듯이 바울은 자신은 죽고 자기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이 그 인생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리스도는 어느 위치에 있습니까? 나의 축복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연약하거나 내가 신음할 때 나를 도우시는 분. 내가 물질적으로 어렵거나 곤란한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 내가 외롭고 상처받을 때 나를 위로해 주시는 분. 물론 이런 신앙도 훌륭합니다. 

하나님이 마치 우리 아버지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우리의 왕이시요 우리의 주인이심을 인정하십니까? 나의 부탁만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 자신이 왕이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종임을 인정하십니까? 우리의 신앙이 이제는 어린아이 신앙에서 보다 어른의 신앙으로 성숙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 이것을 이루어주세요!”식의 간구에서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무엇을 원하십니까?” “주님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당신은 저의 주인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주님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금년 한 해가 무엇보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은 사실 왕자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복종하고 주님의 노예가 될 때 우리는 가장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크신 분은 없고 하나님처럼 참되신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하나님보다 작은 것에 매이고 연연해하다 부자유함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교회의 주인 또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시라는 것은 모든 영광은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모든 소유가 주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치리와 지도 원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물론 입술로는 예수님이 우리 주님이시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우리는 예수님을 교회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요즘 교회 이름 중에 ‘주님의 교회’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처음 이런 교회 이름을 지었던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 이유가 수많은 교회들이 주님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뜻과 욕심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철저히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실제 교회의 현주소가 그렇습니다. 주님이 영광을 받아야 할 자리에 인간이 영광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이 높아지는 경우가 많은 것을 주변에서 쉽게 봅니다. 교회가 주님의 소유라고 하면서도 인간의 소유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어렵게 개척했으니까, 내가 이만큼 봉사하고 내가 이만큼 헌신하고 내가 이만큼 헌금했기 때문에 이 교회는 자기 교회라는 생각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의 분란은 항상 자기가 주인이라는 소유의식에서 나옵니다. 교회의 지도 원리가 과연 하나님 말씀대로 운영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작은 소자를 중요하게 여기고 대우하는 교회가 되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를 더 높이는 교회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운영 방식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세상의 경영 방식을 닮아 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치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욕심이나 이해나, 자기 사상이나 이념을 좇아서 행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 명령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대계명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우리 안의 교제의 즐거움에만 빠져 있고, 건물을 세우고, 교회의 몸집을 불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찮은 종일뿐입니다. 교회에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은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님이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말씀 외에 어떤 다른 절대적인 것을 우리의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나 주의가 우리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정치적 논리가 교회의 주인이 되려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컨대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의 교회가 그랬습니다. 독일은 1차세계 패망이후 좌절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기에 1929년 대공황이 덮쳐 극심한 경제 침체와 공산주의의 위협에 처했습니다. 이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사람이 히틀러였습니다. 히틀러는 아리안 민족주의를 들고 강력한 독재정치를 펴기 시작하였을 때 독일 사회는 히틀러를 정말 정치적 메시야처럼 환영하였습니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억압하는 법률들을 만들었을 때도 대부분의 독일 기독교는 이를 지지하였습니다. 그때 소위 주류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은 히틀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히틀러가 독일 국민에게 때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구원자 그리스도가 히틀러를 통해서 우리들 가운데 강하게 임한 것과 같다. 나치스야말로 행동하는 적극적인 기독교도들이다.”  

독일 교회에 그리스도가 아니라 민족주의와 인간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때 소수의 신앙인들이 이런 태도에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고백교회라고 부르고 그들이 당시 교회와 독일 사회를 향하여 그 유명한 <바르멘 선언>을 선포합니다. 

바르멘 선언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서에서 우리에게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 하며 사나 죽으나 신뢰하고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다. 우리는 마치 교회가 그 선포의 원천으로서 이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 이외에 그리고 그와 나란히 다른 사건들, 권세들, 형상들 및 진리들도 하나님의 계시로서 인정할 수 있고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그릇된 교설을 배격한다.”

그 내용은 단순한 신앙적 선언 같지만 엄청난 선언입니다. 당시 대두하고 있던 독일 민족주의를 향하여 그것은 “아니오!” 하고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종해야 할 절대적인 것은 하나님 말씀 뿐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세상의 정치 논리나 무슨 이념이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자본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닙니다. 교회는 좌파도 우파도, 진보도 보수도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곳이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들의 모임일 뿐입니다. 


성도들에게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을 대하여 바울은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1절 중반절입니다.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 성도는 영어로 Saints 입니다. 곧 거룩한 자들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듣기에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요즘 성도란 표현은 교회 안에서 자연스런 호칭으로 사용되지만 그 의미를 살펴보면 사실 부담스러운 호칭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더럽고 이기적인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우리보고 거룩한 사람이라니요? 물론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런 말은 사용해도 괜찮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평소 바울이 선교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도 사도 바울은 동일한 “성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고린도 교회는 이처럼 하나님의 교회요 성도라 불릴 정도로 거룩한 교회가 아닙니다. 이 교회는 아볼로 파니 게바 파니 그리스도 파니 해서 분열이 심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편 가름도 있었습니다. 아비와 자식이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음란함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며 바울의 권위를 부인하던 사람들도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교회’ ‘거룩한 자들’ ‘성도들’ 이라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히 의례적인 표현일까요? 단순한 칭찬의 말일까요?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우리는 분명 더럽고 초라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부족한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면사포에 때가 많이 묻었다 하지만 그런 신부를 받아들인 사람은 신랑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는데 누가 그에 대해서 반박하겠습니까? 거룩하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 본 정의가 아니요 하나님 편에서 본 정의입니다. 사실 인간끼리 누가 더 거룩하다 누가 더 더럽다고 규정하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인간이 선하다 악하다 하지만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오십보백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태도입니다. 영원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의롭다 거룩하다 인정하셨는데 누가 거기에 반박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는 섭섭하지만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성도”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입니다. 거기 1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문구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거룩한 성도들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관계는 이제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거룩하다 하신즉 우리는 거룩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십시오. ‘나는 거룩한 자다.’ 자기 판단으로 하면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스러운 자기 신부로 보고 계신데 우리는 가슴을 치며 ‘저는 죄인입니다.’ 하고 눈물을 짜고 있으면 예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우리 몸에는 때가 많지만 주님께서 거룩한 보혈로 우리를 깨끗이 씻기셨습니다.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들도 이 그리스도의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아니 어떻게 저런 인간을” 하며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고 그의 신부 삼으셨습니다. 그 사람을 거룩한 자라 예수님께서 받으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를 성도라 대우해주고 성도라 부름을 받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점점 진짜 거룩한 성도가 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순결한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고 대접해 주자 우리는 구약에서 이루려하였던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던 바이기 합니다. 우리는 성도이면서 동시에 성도로 만들어져 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지어져 가는 공동체라 표현합니다. 

에베소서 2장 21, 2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성전입니다. 건물이 완공되기 전에는 초라하고 더럽습니다. 건물이 위대한 것은 그 설계도가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렇지만 완공된 후에는 정말 멋있는 건물이 됩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 안에서 성도로 만들어져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이 희망을 가지고 거룩한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금년 한 해 작년보다 조금만 나아지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덜 이기적이 되고, 조금만 덜 화내고, 조금만 더 양보하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독들과 집사들

사도 바울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문안한다고 말씀합니다. 실제 기독교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감독 장로 집사의 체계를 갖춘 것은 바울 사후입니다. 바울이 쓴 서신에서 최초로 감독과 집사들이 언급된 것은 이 빌립보 서신이 처음입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어떻게 해서 이런 교회 직제들이 나타나는가? 그것은 빌립 교회가 많은 일들을 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마게도냐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바울의 선교 사역을 많이 도왔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이렇게 칭찬했던 적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1-2) 

마게도냐 교회들 중 대표적인 교회가 바로 이 빌립보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가난했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많은 헌금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서신을 기록한 이유도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위하여 시중을 들 에바브로디도라는 일꾼과 함께 선교비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는 교회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일꾼을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들보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서신에서 특별히 감독들과 집사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일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금년도에 직분들을 임명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빌립보 교회처럼 부지런히 일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역자들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금년도 표어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교회”입니다. 금년도는 소띠 해입니다. 소처럼 부지런히 일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 일을 많이 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은혜와 평강

바울은 마지막 인사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고 축복합니다. 은혜는 헬라 어로 ‘카리스’입니다. 카리스는 본래 기쁨이나 즐거움, 쾌활함이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결과 우리에게 주어진 기쁨과 즐거움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앞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 기쁨과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옵니다. 금년 한 해 이 은혜가 부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기쁨이란 것은 은혜가 충만히 주어졌을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질 때 우리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드시고 은혜 베푸실 때 우리 인생이 환해지는 것입니다. 이 은혜로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은혜와 짝을 이루는 단어가 평강입니다. 평강은 평화입니다. 헬라 어로 ‘에이레네’ 입니다. 히브리 어의 의미가 더 다가오는데 ‘샬롬’ 입니다. 히브리 인들이 ‘샬롬’ 할 때는 그 의미가 다양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의미할 때도 있고, 몸의 건강을 의미할 때도 있고, 물질적인 어려움이 없거나, 정치적으로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샬롬입니다. 타락 이후로 인간은 샬롬을 잃어버렸습니다. 항상 긴장하며 삽니다. 한국사회도 샬롬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에 샬롬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계에도 전쟁의 소문만 있지 이 샬롬을 잃어버렸습니다. 세계에 주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금년 한 해 우리 인생에도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도, 우리 몸에도, 우리 인생에도, 우리 가정에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도 이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기 인생에 샬롬의 축복이 있기를 매일 같이 축복하십시오. 사람들을 만날 때도 이 평화의 인사로 축복하십시오.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권세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축복하면 하늘에서도 축복이 이루어집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누리는 한 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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