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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눅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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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던 영화가 있습니다. 호주의 저널리스트 토마스 케넬리가 쓴 소설을 영화화한 ‘쉰들러 리스트’입니다. 실존 인물이었던 오스카 쉰들러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으로 시류에 맞춰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유대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치 당원이 되고 독일군에게 뇌물을 주는 냉혈한 기회주의자입니다. 

그는 비록 젊은 시절 술과 돈에 심취되어 살았지만 인간 존엄성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이 개 취급을 받으면서 대량 학살되는 것을 보고는 점점 인간애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후로 쉰들러는 나치 당원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막대한 돈을 들여서 독일 군인들과 흥정을 하여 돈을 주고 유대인들을 사서 자기 공장에서 일하게 한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해서 1,100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구해 주었습니다.   

영화의 끝 장면에서는 드디어 독일이 망하게 되고 공장의 종업원인 유대인들이 쉰들러에게 목숨을 살려준 것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리는 장면으로 막을 내립니다. 잠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여러분, 어떤 느낌이나 감동을 받으셨습니까? 오스카 쉰들러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생명을 살려내지 못한 것을 참으로 가슴 아파합니다. ‘왜 나는 더 많은 유태인을 구해내지 않았던가?’ 이미 영화의 내용을 보신 것처럼 그는 다른데 돈을 쓰지 않았다면 보다 더 많은 영혼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개탄합니다. 친구가 사준 자기의 승용차를 보면서 그것을 팔았더라면 유대인 열 명은 더 구할 수 있었을 것이고, 자기 가슴의 금배지를 팔았더라면 유대인 두 명, 아니 세 명은 더 구할 수 있었을텐데 하면서 안타까워합니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큰 도전을 받습니다. 

본래 이 영화의 제목은 쉰들러의 리스트가 아니라 쉰들러의 방주였습니다. 그의 방주에 탄 사람들은 다 살아남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그의 안전한 방주에 태우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한 사람의 유대인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오스카 쉰들러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유태인들의 후손의 수는 6천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쉰들러 리스트는 그야말로 생명 구원의 리스트입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참 감동적인 한 문장이 소개됩니다. 유태인들이 쉰들러에게 감사의 표시로 반지를 만들어 주면서 탈무드의 글귀를 새겨 주는데 거기에 적힌 말이 이렇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자가 전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이 담겨 있는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의 세 개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 비유’ ‘ 잃은 아들을 되찾는 아버지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세 개의 비유는 내용은 다르지만 잃어버린 것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긴다는 주제는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의 주제를 세 개의 비유로 반복함으로써 그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단호한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너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5절에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신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단코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니스 미술 대학 벽에는 종교 재판의 빌미가 되었던 파올로 베로니스의 그림이 한 점 걸려 있다고 합니다. 그림의 내용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어느 잔치석상에 앉으신 그림으로 한쪽 구석에는 로마 병사들이 노닥거리고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어떤 남자가 술에 만취해 코가 빨개져 있습니다. 주인 없는 개들은 사방을 휘젓고 다니고 군데군데 술 취한 사람들, 난쟁이들, 흑인들, 심지어 시대에 안맞는 훈족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그림으로 인해 베로니스는 불경죄로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로니스는 종교재판에 소환되어 이런 불경한 내용의 그림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았습니다. 베로니스는 ‘복음서를 기준으로 보건데 예수님은 그림에 나오는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한 분입니다’ 라고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그의 변호를 들은 재판관들은 분개하며 그 그림을 성화에서 제외시키고 제목도 바꿀 것을 명했습니다. 

베로니스의 그림의 배경이 오늘 본문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르니스를 재판했던 상황이 본문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잃은 양을 찾는 목자 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 비유’ ‘잃은 아들을 되찾는 아버지 비유’ 이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은 오늘 본문 1,2절에 나옵니다. 1,2절에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에게로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리, 죄인, 또 흔히 여기 하나 더 덧붙인다면 창녀가 들어갈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 나라의 사람들이 멸시하며 저주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세리, 창녀, 죄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이들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저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 천국은 자기들이 들어가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드셨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영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녀, 죄인들을 만날 때 어쩔 수 없어서 만난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서, 기쁨으로 맞이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죄인으로 낙인 찍고 저주 받은 인생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꺼이 맞이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증거하는 모습을 보고 수군거리며 비난했습니다. 

그런 상황과 분위기를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세 가지 비유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어느 목자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목자는 저녁이 되어 양들을 양 우리에 넣기 위해 양의 수를 헤아려 보니 한 마리가 없었습니다. 양 한 마리가 무리를 떠나 곁길로 샌 것입니다. 그는 아흔 아홉 마리를 양 우리에 넣고는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잃은 양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 다녔습니다. 혹시 들짐승에게 잡혀 먹힌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쌓여 혼신을 다해 잃은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목자는 산 중턱에 두려워서 떨고 있는 양을 발견했습니다. 목자는 기쁨으로 양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메고는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음식을 나누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목자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함으로 양 한 마리를 잃은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목자는 기꺼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잃었던 양 한 마리에 대한 사랑과 진정한 가치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7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기쁨으로 잔치가 열린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한 사람의 영혼 구원은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영혼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 영혼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2009년도 표어를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라고 정했습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류의 구원의 길을 여신 후에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시 유언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나선 목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 집은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죽어가는 한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에게 한 영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로’라는 표어 아래 2009년 한 해 동안 한 영혼을 우리의 가슴에 품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그리스도 앞에 세우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충만하게 임할 것을 믿습니다. 우리 한번 2009년도 표어를 함께 외치며 한 영혼을 우리의 가슴에 품기를 바랍니다. 제가 먼저 선창하겠습니다.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마더 테레사의 시를 한 편 읽어드리며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한 번에 한 사람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만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못했다면 
난 4만 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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