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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그리하면, 더하시리라 (마 6: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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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면, 더하시리라 (마 6:29~34)


2009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일자 중앙일보에, 경기도 구리시 내양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13살 난 박찬휘 어린이가 이명박 대통령 할아버지께 보낸 편지글이 소개되었습니다. 찬휘네 가족은 아버지 남동생 세 식구인데, 정부보조금을 받으면서 컨테이너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찬휘의 편지를 찬찬히 읽어보니 큰 걱정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 걱정은 ‘가난’이 아니라 ‘아버지’였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사셨지만, 2005년도에 건강악화로 그만 몸져눕고 마셨다고 합니다(당뇨 합병으로 간, 위, 장까지). 어머니는 젖먹이 동생을 두고 집을 나가셨는데, 찬휘가 분유먹이고 기저귀 갈아주면서 키워 무럭무럭 자라서 초등학교 2학년에 진학한다고 합니다. 

작년 1월 1일에 아버지가, 두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약속을 하셨답니다. 찬휘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더 이상 정부보조금을 받지 않고, 일을 가시겠다고. 중학교 입학이 두 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실 것 같다는 것이 찬휘의 생각입니다. 그 다음 말에 가슴 뭉클했습니다. 

그래도 전 실망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언젠가는 다시 일을 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도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가 좋아져서 일을 하시면, 따뜻한 집으로 이사 가고, 친구들처럼 영어학원, 수학학원에도 다닐 수 있으니까요, 저는 요즘 매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당뇨병 빨리 낫게 해주세요. 우리 집에 돈이 생겨서 라면이랑 빵이랑 실컷 먹게 해주세요. 우리 가족 행복하게 해주세요. 우리처럼 어려운 사람들 잘살게 해주세요 ··· 대통령 할아버지 감기조심하세요.” 

어린 게, 왜 걱정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찬휘는 참 지혜로운 아이 같습니다. 지금의 가난을 걱정하지 않고,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합니다. 아버지 건강이 가족들의 희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찬휘의 기도, 꼭 응답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마태복음 6, 25을 보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확실한 약속이다는 선언이지요.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마태복음 6, 24이하 34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삶으로 부인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예수님 말씀의 출발은, 아버지의 유무]

예수님 말씀 가만 보면, 아버지의 유무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 있고, 아버지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있는 사람의 삶과 아버지가 없는 사람의 삶의 이유와 방식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아버지 유무의 차이가 그렇게 크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아버지가 있으십니까?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너희”라는 말씀을 수 없이 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너희에게”,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는”, “너희 중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그런즉 너희는” 여기 “너희”가 누구일까요? 하나님이 자기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異邦人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을 아버지가 없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갈릴리 지방은 이스라엘의 북부지방입니다. 지리적인 특성상 국경지대였기 때문에 로마사람, 소아시아 사람들의 출입이 잦은 곳입니다. 주민들 중에는, 이주한 이방인들도 꽤 많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갈릴리 사람들이, 자기 주변에 사는 이방인들의 삶을 눈여겨보고 익히 알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출입하는 로마인들, 이주민들을 가리켜서 왜, 아버지가 없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들은 인생의 主人이 다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 24 말씀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맘몬, 마모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갈릴리 지방에 드나들던 이방인들, 이주민들은 하나님을 주인 삼은 자들이 아니라, 재물을 주인삼은 자들이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財物을 주인삼고 사는 사람들을 아버지 없는 사람들, 이방인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절대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주인이 둘 있으면, 輕重을 달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아버지가 없는 자들의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物質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은 眼中에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겸하여’라는 말은 헬라어 ‘카이’(kai,)라는 접속사인데 󰡔대등하다󰡕는 뜻입니다. 천지와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피조물에 불과한 물질이 어찌 대등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이방인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재물을 대등하게 생각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과 물질을 대등하게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말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는 물질을 주인 삼아 섬기며 삽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 그렇게 살면, 그 사람이 곧 이방인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지요.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의 예외 없는 삶의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

염려입니다. 염려는 다름 아닌, 갈릴리에 와서 살던 이방인들의 삶의 특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간파하신 그들의 삶의 특징은 밤낮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의 삶은, 염려투성이입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늘 남의 눈치 보며 삽니다. 알량한 자존심 지키려고 당치도 않는 허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정말 헛된 것인데 말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남을 속이면서까지 물질을 소유하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악인의 꾀를 따라 사는 것을 인생을 사는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악인들의 꾀가 어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입으로 중얼거리며 사는 복 있는 사람들의 지혜와 같겠습니까?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염려하지 말라”하십니다. 아멘으로 응답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응답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조금 과장하면, 저는 지금까지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입는 문제 때문에 걱정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태연할 정도로,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형편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단 한 번도 작정하고 굶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어려움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신학교에 다닐 때는, 하루 두 끼밖에 먹지 못했습니다(기숙사 찐 밥, 먹어도 배고픈 밥, 54-5kg).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삶의 고백을 주신 것이지요.

저도 등록금 때문에 고생 많이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제때 내어본 기억 없습니다. 동생들이 많은데, 저만 욕심부릴 수 있습니까? 학교 서무선생님께 불려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저라고 자존심이 없겠습니까? 자존심 있습니다. 버스 표, 한 장 빌리지도 못해서, 두 시간을 걸어서 집에 간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들이 제 인생의 상처가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공중의 새보다 더 귀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들의 백합화보다 훨씬 더 귀하게 족한 은혜로 채워주셨습니다. 물질 때문에 걱정하며 사는 것은, 다 아버지가 없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궁극적 관심은 아버지가 있는 우리들의 삶의 우선순위]

33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으로 시작하십니다. 이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우리 인생의 答이 있습니다. 여기 “그런즉 너희는”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1) “그런즉”이라는 접속사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이 접속사가 내포하고 있는 뜻은, 그리스도인들은 늘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며 사는 이방인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쉽게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할지라도, 그 영향력을 단호하게 뿌리치라는 말씀입니다. 

(2) “너희”라는 존재가 누구인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기 인생의 주인 삼고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공중 나는 새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 아니하여도/ 그들을 다 기르시는, 우리들을 그것들보다 더 귀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자들 말입니다. 들의 피는 백합화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 땔감으로 던져지는 들풀까지도 입히시는 하나님/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하시는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자들 말입니다. 

우리가 비록, 물질을 주인삼고 사는 아버지 없는 세속적인 환경에 둘러싸여살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자녀입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실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먼저 해야 할 일에 진력을 다해 보십시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오셨던지 괜찮습니다. 금년부터 내 삶을 한 번 정리해보십시다. 확실한 인생의 구조조정을 단행해 보십시다(재물이 많아 근심하며 돌아갔던 부자청년관원처럼 하지 말고, 예수님 만나 구원받은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처럼). 이제부터입니다. 소중한 내 인생을 걸 만한 일에, 한 번 걸어보십시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해 보십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십시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내 삶의 자리에서도(가정, 직장, 일터, 학업, 교회···) ‘겸하여’ 「대등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데 2009년 한 해, 진력을 다해 보십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순종을 말합니다. 말씀에 응답합시다. 듣고 멈추지 맙시다. 말씀을 들으면, 내 의지, 뜻을 말씀 앞에 내려놓읍시다.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 세속적인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십시다(선택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내가 꿈꾸는 것, 내가 땀 흘려 노력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우선순위를 바꾸어 봅시다.

[그리하면 의식주의 문제는 더하여 주심]

예수님 말씀의 결론은, “그리하면···더하시리라”입니다. 여러분, 이 약속의 말씀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유의해서 들어보십시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의식주, 생존권문제)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어려운 말씀입니까? 이해하기에 어려우십니까?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주신다”는 데, 그래도 이보다 더 확실한 보장이 필요하십니까? 이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버지 없는 자식이거나, 이방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더하시리라”는 이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더하신다”는 말은 ‘프로스테데세타이(prosteqh,setai)’인데 ‘덤’이라는 뜻입니다. 플러스알파라는 뜻입니다. “더하다”, “보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심오한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예수님은, 생존을 위한 의식주를 ‘덤’). 이 ‘덤’도 人間이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더하신다’는 헬라어는, 직설법미래수동태3인칭단수입니다. 신적수동태입니다). ‘덤’까지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람이 행복한 것 아닙니다. 부자라고 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덤’으로 얻은 富이어야 행복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主人이 되셔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존을 위한 의식주가 ‘덤’으로 주어질 때, 행복합니다. 

덤을 덤으로 생각하지 않고 덤을 주인 삼고 살아가기 때문에, 덤에 불과한 물질을 많이 가지고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훌륭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면 그것으로도 족합니다. 그러나 연주가 너무 훌륭해서 자리를 뜨지 못할 때, 앙코르를 청합니다. 덤 연주를 더 듣고 싶어서이지요. 그러나 덤 연주는 어디까지나 본 연주가 훌륭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덤’은 ‘덤’일뿐입니다. 

‘덤’ 때문에 이방인처럼, 아버지 없는 자식처럼, 늘 염려하면서 한 해를 사시겠습니까? 아버지의 자녀로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사시겠습니까? ‘덤’까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으면서 사시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생존을 위한 의식주는 ‘덤’입니다. 덤은 염려하므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자녀 된 자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신명기 28장 1-6/ 삼가 듣고, 지켜 행하면, 청종하면 모든 복이 네게 임하고, 성읍에서도, 들에서, 네 몸의 자녀도, 토지의 소산도, 짐승의 새끼도, 소와 양의 새끼도,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까지도). 아멘.


[기도]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 2009년 새해 첫 주일을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덤’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며 사는 한 해가 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사는 2009년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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