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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구영신] 생명의 길을 택하라 (신 30: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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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길을 택하라 (신 30:15~20)


• 어떤 것도 헛되지 않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해를 살아낸 소감이 어떠십니까? 어떤 분은 ‘어떻게든 살아냈다’고 말하더군요. 가슴이 짠해졌습니다. 얼마나 힘겨웠기에 그런 말을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불어 숲을 이루며 조금씩 성장해왔습니다. 해가 뜨거운 날에는 서로 그늘이 되어 주고,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이 되어주고, 고독한 날에는 벗이 되어주며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삶을 통해 그린 그림이 아름다운지, 추한지는 주님께서 평가하실 겁니다.

2008년도 마지막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 후 우리는 복잡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도 있지만, 착잡한 마음도 숨길 수 없습니다. 며칠 계속되는 추위에 지친 이들이 많지만, 지금 여의도는 사뭇 뜨겁습니다. 어쩌면 나라의 명운을 좌우할지도 모를 법안 제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야의 격돌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언론 종사자들의 외침도 이 겨울 추위를 무색하게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땅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지역 가자지구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너무나 또렷해 가슴이 미어질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이미 380여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전쟁과 무관한 어린이와 여성들, 그리고 시민들이 많습니다. 부상자들은 대개 복합 장기 손상을 입었는데, 마취제도 없이 수술을 받아야 할 지경이랍니다. 치료약도 턱없이 부족한 상태라 가자 지구는 그야말로 생지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오느니 한숨이고, 눈물입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다’는 전도자의 말이 실감납니다.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해는 여전히 뜨고, 또 여전히 져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거기에서 다시 떠오른다.”(전1:4-5)

어찌 보면 무심한 세상에서 차마 무심할 수 없는 성정을 타고난 인간의 삶이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절망의 어둠이 몰려와도, 전쟁의 폭풍이 불어와도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엄정함입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어느 날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여汝보세요. 평생을 피곤하게 가시는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것이 마음에 있는데 표시가 잘 안 되네요. 오늘 보니까 피나무로 만든 목기가 있어 들고 왔어요. 마음에 드실지. 이 목기가 겉에 수없이 파인 비늘을 통해 목기가 되었듯이 당신 또한 수많은 고통을 넘기며 한 그릇을 이루어가는 것 같아요.”

그래요. 나무 한 토막이 수없는 끌질로 파인 비늘을 통해 목기가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는 길 안내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추구하는 사람답게 살아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 해를 갈무리하면서 나는 바울 사도의 경험이 반영된 경구 하나를 마음에 새겨두고 싶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6:9) 


• 울면서라도 가야 할 길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날을 예감하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교훈의 말씀입니다. 그는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생명과 번영’의 길, 그리고 ‘죽음과 파멸’의 길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어느 길로 가시렵니까? 물으나마나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선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생명과 번영의 길은 평탄해 보이지만 어떤 때는 가시밭길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죽음과 파멸의 길은 대개 평탄한 길처럼 보입니다. 눈이 밝지 않은 사람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운전자들은 요즘 내비게이션이 참 똑똑하다고 말하더군요. 내비게이션만 있으면 낯선 곳을 찾아가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생명과 번영의 길로 인도할 내비게이션은 유감스럽지만 없습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우리는 어느 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손에는 지도가 들려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체득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때가 많습니다. 지도를 잘못 볼 때도 있고, 지름길이다 싶어 접어든 길에서 길을 잃는 경우도 있고, 무턱대고 남을 따라가다가 낭패를 만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지향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푯대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지향이 분명하면 삶은 의외로 단순해집니다. 옛 사람은 擇善固執과 主一無適을 아름다운 삶의 비결이라 말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려내 그것을 굳게 지키는 것이 택선고집이고, 내 삶을 관통할 하나의 주인을 정했으면 이리저리 옮기지 않는 것이 주일무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당신의 양식으로 삼으셨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당신 삶의 밑절미로 삼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르는 것을 생명의 길이라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길을 걷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전도자는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전9:3b)고 말합니다. 참 우울한 진단입니다. 

오늘의 현실을 가리켜 팔꿈치사회(Ellenbogengesellschaft)라고 지칭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면서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치열한 경쟁사회라는 말입니다. 몇 해 전 동계올림픽에서 보았던 광경이 떠오르시나요? 과장된 몸짓으로 심판들을 속여 승리를 가로챈 미국의 어느 쇼트트랙 선수야말로 팔꿈치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 인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군가의 팔꿈치에 찔려 쓰러진 사람들 곁에 다가가 그들을 위로하고, 회복을 돕고, 기다려주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우심을 상기시키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팔꿈치사회에서 뒤쳐진 이들 곁에 다가가 일으켜 세워주고, 함께 길을 걷는 이들, 곧 이 냉랭한 세상에 우정과 환대의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이야말로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 가지 말아야 할 길

우리가 가지 말아야 할 길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의 길입니다. 주님은 일찍이 그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출20:3)고 하셨습니다. 이 계명을 유일신론에 대한 진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서가 기록될 때까지도 유일신 사상은 아직 인류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계명은 다신론적인 상황을 반영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신은 대개 어느 지역을 지배하거나, 어떤 역할을 관장하는 존재로 떠받들려졌습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섬기는 신들이 달랐던 것이지요. 

그리스의 신화를 보더라도 신들은 저마다 주특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혜의 신, 전쟁의 신, 바다의 신, 대장장이 신, 곡물의 신, 출산의 신, 죽음의 신…. 야훼 하나님이 당신 백성들에게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질투 때문일까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계명은 하나님의 자기소개와 관련시켜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출20:2)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내시는 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착취로 신음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고,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그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에 관심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토라의 백성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토라의 핵심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것이 곧 거룩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의 모든 가치를 경제논리로 환원해버리는 살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돈벌이’ 귀신이 우리의 의식을 옥죄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도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생명이 파괴되고, 우정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파괴되어도 주머니만 넉넉하면 된다는 생각은 사탄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갑니까?


• 생명을 택하라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은 행복은 공생공락(conviviality)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생각은 행복은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은 가엾게 여기고, 기다려 주고, 일으켜주고, 벗이 되어 주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생각은 자비심이나 사랑, 우정 따위는 한가한 자들의 말장난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은 가장 여린 생명 하나도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생각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 자연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늘 초월을 향해 자기를 열어놓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생각은 잘 살기 위해서는 쓸데없는 데 한눈팔지 말고 죽기 살기로 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은 나눔, 돌봄, 섬김이 가장 아름다운 가치라고 말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생각은 독점, 무정함, 지배가 가장 귀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은 전쟁과 폭력과 학대와 착취를 버리고, 상대방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 참 평화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생각은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 평화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생각은 우리와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생각은 우리와 언어와 피부색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은 위험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기축년 한 해에도 우리는 수시로 이런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시렵니까? 모세는 ‘생명을 택하라’고 권고합니다. 이때의 생명은 물론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판단이 쉽지 않을 때는 어느 쪽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가까울까 생각해보면 가야 할 길이 보일 겁니다. 


• 영적인 담대함을 회복하라

유대교 철학자인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은 1963년 6월 16일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흑백 인종 차별 문제로 내홍을 겪고 있던 미국 사회를 정화해야 할 역사적 책임을 지고 있던 대통령에게 그는 “흑인들을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할 자격을 잃는 것”이라면서, 지금은 도덕적 비상사태를 선언할 때라고 말합니다. 그는 영적인 담대함(spiritual audacity)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주눅 들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하나님의 길을 따라 걷는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그 길을 택할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 것입니다.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또 당신들이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주 당신들이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16)

물론 새해에도 삶은 여전히 힘겨울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을 지키시고, 그들과 동행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으며 우리는 뚜벅뚜벅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신앙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생명을 택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벽을 넘는 담쟁이의 보폭으로 오늘도 내일도 생명의 길을 택하고, 스스로 생명의 길이 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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