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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는 사람 (신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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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는 사람 (신 29:9)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경험담입니다. 목사님이 천막교회에서 목회할 때, 한 어린아이가 동생과 함께 기도를 받으려 왔었습니다. 그 아이는 축구공에 눈을 맞아서 오른쪽 눈은 이미 실명했고, 그 여파로 왼쪽 눈의 시력까지도 잃어가고 있는 아이었다고 합니다. 목사님께 안수기도 받기를 소원했기에 몇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아이의 눈은 점점 더 악화되어만 갔습니다. 아이도 목사님도 크게 실망하고 낙담하였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그 아이에게“비록 눈이 멀어도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신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소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온 세상을 위하여 큰 일을 하겠다는 꿈이 있었던 아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절대절망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시각장애인 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를 거쳐 미국의 피츠버그대학으로 유학하여, 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가 현재 미국의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치관보로 일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유명한 “강영우 박사” 입니다. 그는 볼 수 있는 사람보다, 더 위대하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낙심하지 않는, 포기하지 않는 담대히 하나님을 믿고 나아간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형통이란 역경이 전혀 없이 매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고난 없는 곳이 어디 있으며, 고난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욥기 5:7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고난은 다 있습니다. 형통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신 방법에 대하여 신명기 32:10~12에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독수리를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므로 그 새끼 독수리가 새의 왕자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이와 같이 연단시키셔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 즉 형통한 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험한 세파를 이기므로 형통한 복을 누리도록 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一.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을 형통케 하십니다.

본문인 신명기 29장 9절에“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결과는 형통함입니다. 

열왕기하 18:6~7에 말씀하시기를“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왕 히스기야에 대한 말씀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했더니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하나님이 함께하신 히스기야 왕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형통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셔서 그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반드시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대하 32:27~29에 히스기야 왕의 형통함에 대하여 기록하시기를“히스기야가 부와 영광이 극한지라 이에 은금과 보석과 향품과 방패와 온갖 보배로운 그릇들을 위하여 국고를 세우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산물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온갖 짐승의 외양간을 세우며 양떼의 우리를 갖추며 양떼와 많은 소떼를 위하여 성읍들을 세웠으니 이는 하나님이 저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셨음이(라)며”고 했습니다. 

신명기 28:1~6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축복을 약속하시기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모든 삶은 자유가 아니라 반칙적 삶 즉 방종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영향권 안에 있습니다. 인간과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삶은 탈선이며 방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받아 형통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자유에는 네 가지 차원의 자유가 있습니다. 

첫째,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입니다. 자신의 감정이 요구대로 하는 자유입니다. 이것은 본능적, 동물적 차원의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방종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둘째, 제한하는 자유입니다.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은 부부라는 제한된 울타리 안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도의와 도리를 지키는 윤리적 자유입니다. 한계를 벗어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속박일 뿐입니다. 

셋째,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이는 스스로 버리는 자유입니다. 사랑, 정의 등을 위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므로 얻어지는 고차원적 자유입니다. 희생을 통해 얻는 신념적 자유인 것입니다. 며칠 전 신월동 쪽방에서 혼자 살고 있는 89세의 할머니가 파지를 모아 모은 돈 1천만 원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적십자사에 기탁을 한 것이 방영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곧 스스로 자기를 위하는 자유를 포기하므로 얻어지는 고차원적 자유입니다. 

넷째, 소망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즉 신앙 안에서 누리는 미래지향적 자유입니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힘차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확신하기에 오늘의 허무, 절망, 죽음의 공포까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최후 승리의 영광을 바라보며 누리는 최고 수준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하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시는 풍성한 형통의 축복이 있습니다. 


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형통케 하십니다. 

구약성경 역대하 26:4~5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웃시야가.....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함께하시므로) 형통케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왕 웃시야가 하나님을 구하므로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웃시야 왕의 형통함에 대하여 역대하 26:8에 기록하기를 “웃시야가 심히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은 반드시 강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강성케 하신 사람은 세상 그 누구도 대항하여 이길 수 없습니다. 전능자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 아모스 5:6에“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지를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은 매사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을 구한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역경이 몰아치는 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B.C 701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대군 185,000명을 이끌고 이스라엘 나라를 침략해왔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왕 히스기야는 풍전등화격인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나라를 건지셨습니다. 이에 대해 열왕기하 19:35에 기록하기를“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18만 5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찾아 기도함의 결과입니다. 

미국 애리조나 주의 한 농장에 강렬한 허리케인이 불어 닥쳤습니다. 허리케인은 집과 농작물 그리고 가축들까지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농부는 절망하여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때 무너진 닭장 속에서 벼슬이 찢기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수탉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습니다. 수탉은 날개를 퍼덕이며 무너지지 않은 담장 높은 곳으로 올라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목청껏 소리를 쳤습니다. “꼬끼오” 농부는 이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 다시 일어나자. 나도 하늘을 향해 울고 있는 저 수탉처럼 다시 일어나자. 하나님을 향해 울자!”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해 새힘 주시기를 부르짖었습니다. 

잿더미 속에서 수탉이 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본성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고난이 오면 하나님께 울부짖도록 하는 본성을 주셨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성도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부르짖을 수 있는 본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본성을 찾을 때 하나님은 분명히 회복을 주십니다.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능력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모스 5:6에 말씀하시기를“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하셨습니다. 


三.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을 형통케 하십니다. 

시편 122:6~7에“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는 것은 단순한 예루살렘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그 성전 안에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담은 함(상자) 법궤가 있는 곳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던 모리아 산이 곧 예루살렘입니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 기브온 산당에가서 일천번제를 드렸는데 그 기브온 산당이 예루살렘입니다. 그 후 솔로몬이 최초로 성전을 세운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고 주님의 제자들이 모여 간절히 기도했을 때 성령께서 임재하신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성령감림으로 인해 최초의 교회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졌고, 이로 인해 세계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는 것은 곧 교회의 평안을 구하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에베소서 1:23에“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님은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역할을 행하는 유일한 단체가 교회입니다.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유일한 곳이 교회입니다. 비록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이러한 구원받은 사함들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범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아 누린 사람은 모두가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성경가운데 가장 큰 복을 받아 누린 다윗 신앙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교회 사랑이었습니다. 

미국의 조상 청교도들의 경우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은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 무관심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 칼빈은 말하기를“교회를 어머니처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신앙인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교회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교회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1.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와 고락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6:10에“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사랑에 모범을 보이신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영락교회에 10년 간 부목사와 수석부목사로 시무했고 지금은 신촌교회를 담임하시는 오창학 목사님이 전하는 말입니다. 

“나는 영락교회에서 10년 간 부목사와 수석부목사로 시무하면서 수많은 훌륭한 장로님들을 접할 수 있었다. 최장근 장로님도 그런 분 중의 한 분이시다. 한국 교회에서 최 장로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이런 분에 대해서 필자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평한다는 것은 대단히 실례가 되며 장로님께 누가 될까봐 두렵다. 최창근 장로님은 1961년에 영락교회 장로로 임직되신 이래 정년 은퇴하시고 원로장로가 되시기까지 한경직 목사님, 박조준 목사님, 김윤국 목사님을 잘 섬기시면서 교회의 난제를 해결하고 화목과 부흥발전을 위해서 누구보다도 물심양면으로 헌신 봉사하셨다. 원로장로가 되신 후에도 시무장로 때 못지않게 더욱 기도하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드리면서 봉사하셨다. 

필자가 영락교회를 사임하고 신촌교회에 부임한 이후에도 장로님의 그런 모습을 지켜볼 수가 있었다. 그 분은 교회와 노회와 총회를 위해서, 그리고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교육, 봉사, 선교 등 각 분야에서 아낌없이 모든 것을 바치며 섬기셨다. 그의 활동 분야를 제한된 지면에 전부 소개하기란 불가능하다. 여러 기독교 중. 고등학교와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이사와 이사장을 역임한 교육 사업을 비롯해서 총회적으로는 본 교단의 총회 회계 등 임원 활동을 하였고, 기독공보 이사장 및 사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사 및 부회장, 한국국제기드온협회 회장, 한국기독실업인회 회장, 세진회 회장 및 이사장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교회 안팎의 70여 기관에서 물심양면으로 헌신 봉사하셨다. 정부로부터 훈포장도 몇 차례 받으셨다.

그의 섬김 철학은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라는 철두철미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것을 잘 받아서 잘 관리하여 필요적절 할 때 잘 드리는 것이다. 그 분이 기증한 부동산은 참으로 방대하다. 필자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영락공원 묘지인 십수만 평의 영락동산을 비롯해서 영락중,고등학교 대지, 아세아연합신학교 대지, 기독교 방송국 대지, 실로암 안과 병원 대지 등 금싸라기 같은 땅을 아낌없이 드리셨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반환하신 것이다. 그 외 나타나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 분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사선을 넘나들었던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건져두심에 대한 간증과 고백을 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라고 언제나 말씀하시고 하셨다. 무엇보다도 그 분은 자녀들에게 유산 안 남겨 주기 운동을 전개하여 솔선수범하셔서 실천하셨다. 

참으로 축하하고 기뻐할 것은 지난해 최창근 장로님께서 사모님이신 김양선 권사님과 경혼70주년을 맞으신 일이다. 아무리 장수하는 시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70세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결혼 70주년을 맞는다는 것은 그렇게 흔하지 않은 일이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노년에 모든 것을 다 아낌없이 드리고, 유산은 자녀들에게 남기지 않고 현재 복지시설에 양주분이 여생을 기도하면서 보내고 계신다. 

결혼 70주년을 넘긴 저 분들을 위해서 고린도후서 4:16이 쓰여졌나 보다.“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2.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화평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드리신 기도가 화목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장문의 기도인데 그 내용은 한가지 곧 화평입니다. 요한복음 17:11에“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21에도“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22에도“우리가 하나가 된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23에도“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24~27에도 교회 화목의 원리에 대해 말씀하시기를“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하셨습니다. 


3.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영혼구원에 최선을 다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40일간 세상에 더 계신 후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므로 이 말씀은 주님이 가장 간절하게 바라시는 소원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 당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복음증거로 영혼구원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사람들과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복음증거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모든 족속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영혼 구원에 힘쓰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그 누구도 해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은 형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영혼 구원에 힘쓰는 사람을 지키시며 형통하게 하시는 까닭은 그들로 하여금 계속하여 복음을 전하므로 죽어가는 영혼을 건지시기 위함입니다. 

복음을 전하되“가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적극적인 자세로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기만 기다리지만 말고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하셨습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축복의 약속이 시시한 것 같습니다. “전도하면 부자가 되게 하겠다. 전도하면 출세를 하게 하겠다. 전도하면 자식이 잘되게 하겠다.”는 말씀은 없고 고작 하신 말씀이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하신 것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는 이 말씀은 인간사에 나타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의 흐름을 볼 때 복음을 전하는 나라마다 역사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하신 말씀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영혼 구원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올 때 하늘에서는 기쁨의 큰 잔치가 벌어집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냥두면 그 영혼이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급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기를 명령하셨습니다.“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디모데후서 4:1-2)하셨습니다. 

끝으로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30년을 목회하면서 신앙잡지 <Pulpit>까지 발행한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는 살아있는 교회와 죽어가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교실, 주차장 등 늘 공간의 문제가 있다. 죽어가는 교회는 공간을 염려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한다. 죽어가는 교회는 늘 똑같다. 살아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소년 소녀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늘 시끄럽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꾼이 부족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있는 교회는 새 얼굴 이름 알기가 어려워 애를 먹는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선교 사업이 활발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있는 교회는 주는 자로 가득 차 있고, 죽어가는 교회는 받으려는 자로 차 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믿음 위에 운행되고, 죽어가는 교회는 인간적 판단위에 운행된다.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고, 죽어가는 교회는 편안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활발히 전도하고, 죽어가는 교회는 점점 굳어가 석회화한다."

살아있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의 축복을 받아 누리시는 복된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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