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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생의 마지막 고백 (행 20: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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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 고백 (행 20:17~35)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필가이자 시인이었던 금아(琴兒)[피천득 선생]이 작년에 9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양주에 있는 모란공원에 안장 되었는데 1주기를 맞이하여 제자들이 뜻을 모아 묘비 옆에 시비를 건립했는데 거기에는 고인이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작품인<너>라는 제목의 시를 새겨놓았습니다. 평소에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이 사람, 사랑을 하고 갔구나!'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란다."고 말하던 고인의 바람이 잘 드러난 작품인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 그저 얼마 동안 앉아 
  있다가 /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가는 / 너 』

평소 참 검소하게 삶을 산 것으로 알려진 피천득 선생의 생애는 버리고 또 버리고 깃털 하나 붙을 자리 없이 맑고 깨끗하게 살다가 사라져간 인생이면서 마지막 자기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사랑을 하고 간 사람이구나!"라는 아름다운 평가를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 일생이 지나고 난 다음에 우리의 삶은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를 혹시 생각해 보셨습니까?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이웃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가족이 나를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이 일생을 살다가 그 삶이 다하고 난 다음에 주어지는 평가가 얼마를 살았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연 그 마지막이 주님의 안타까움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기쁨이 될 것인가의 기로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살기는 살아갑니다만 산다는 것이 그리 자랑스럽지도 않고 하루하루 요행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겨우 복이라고 여기고 살고 있다면 남아 있는 생을 산다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생이란 어차피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시작하는 시간이 있었다면 반드시 끝내야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의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만 인생도 반드시 그렇습니다. 이랬든 저랬든 마쳐야 하는 마지막 순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마치는 시간이 있는 줄을 몰라서 방탕하고 매듭지을 줄을 몰라서 방황하고 끝이 있을 줄 몰라서 여유를 부리다가 목적도 잃어버리고 사명도 잊어버린다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슬픔이 있을 뿐이요, 참으로 부끄러운 평가만이 내 삶의 흔적으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도 이런 말을 합니다."일을 마치려 함에는..."마지막을 늘 생각하고 준비하고 마무리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슨 일을 마치려한다는 것입니까? 성경대로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소아시아 근방에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면 무슨 일을 만날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만 큰 핍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바울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은 내가 죽을 때까지 이루어야하는 것이며 설사 지금 죽는다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한 단계 한 단계를 지나가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사람이 자기 앞에 닥칠 위험이나 고난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간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성숙하고 생각이 정상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사람입니다. 어른임에도 그렇게 하고 알만큼 나이가 먹었는데도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잘못된 사람입니다. 환자입니다. 요양원이나 복지시설에 가보면 치매에 걸린 어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가끔씩 하는 말이 집에 간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만나면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치매 걸리신 분이 데려다달라는 집은 자기가 살던 집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집이라는 것이 바느질일수도 있고, 뜨개질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청소하는 일일 수도 있고, 빨래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 집으로 가자고 한다고 해서 밖으로 데려다 주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르는 분들입니다. 인지능력이 없는 환자 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이거든요. 건강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자기 앞에 일어날 일을 충분히 감지하면서도 가겠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이란 생명을 바치고라도 이루어야 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사명을 이루는 마지막 단계에 왔고 나는 이루려고 한다는 비장한 고백입니다. 대단한사람 아닙니까? 바울은 지금 이 현시점에서 사명이라는 관점으로 지난날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고 또 현재를 생각합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했고 이제 마지막 때가 왔습니다. 자기의 고백이 마치 달리기 선수처럼"달려갈 길을 마친다."고 합니다. 출발점에서 열심히 달려 이제 결승점이 눈앞에 보입니다. 여기서 그는 각오를 새롭게 하며 스스로 고백합니다. 

18절부터 21절에서"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했는지 여러분도 아는 바니 겸손과 눈물과 인내와 섬김과 그리고 거리낌 없이 회개와 믿음의 복음을 열심히 증언했노라. 그리고 이제 이 모든 일을 마감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라고 심각한 현 시점이지만 사명의 마감이라는 새로운 미래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교육자 [파커 팔머]라는 사람이 인간의 소명에 대해 말합니다.
"소명이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듣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또한 소명이란 성취해야할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선물이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소명이란 내 욕망을 채우고자 내가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우리들이라면 하나님이 이미 내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주신 바 생애가 있고 주신 바 지혜가 있고 주신 바 물질이 있고 주신 바 건강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셨다는 그 속에 이미 소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 존재케 하셨다면 무엇을 위함이며, 지혜를 주신 것은 무엇 때문이며, 물질을 누릴 만큼 보다 좀 더 주신 것은 왜이며, 건강을 주신 것은 또 무엇 때문인지 그 소명의 의미를 깨달을 줄 알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쉽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만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압니까? 내가 무언가를 이루어 놓기 전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았어야 했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생각했고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나는 누구의 것인가를 먼저 생각했어야 됩니다. 이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졌다면 결과는 좋은 것입니다. 결국 내가 사명을 이루었느냐 하는 것은 내가 누구의 것인가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보다 먼저 생각할 것은 내가 누구입니까? 어렵습니까? 그러면 내가 누구의 것이냐를 생각해 봅니다. 지난날을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내 마음대로 태어났습니까?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까? 나 혼자만의 나로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온 것을 생각해 보면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었고 보이지 않는 능력이 있었고 내게 향하신 경륜과 시나리오가 따로 있었습니다. 내 주인 되시는 그분께서 나를 이렇게 저렇게 인도해서 오늘에 이르게 하심을 여러분은 깨닫습니까? 이제라도 깨달아야 합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누구의 것이냐? 누구의 손에 붙들려 내가 여기에 왔느냐?'를 깨달아야 합니다. 

[러셀]은 자기가 쓴 <행복론>이라는 책에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 줍니다.
"자신의 힘을 겸허하게 평가하는 것이 행복의 원천이다."그랬습니다. 쉽게 말해서 겸손이 행복의 비결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불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고민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도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늘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왜 그래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교만 때문입니다. 한 번 더 겸손하게 생각해 보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불만할 일도, 고민할 일도 아닙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성공에 대해서 놀라고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실패에 놀란다."고 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시죠? 겸손한 사람은'나는 이런 사람이 못 되는데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나? 이건 기적이다.'해서 놀라고 교만한 사람은'어찌 나 같이 능력 있는 사람에게 이런 실패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내가 이렇게 망할 수 있단 말인가?'하며 놀란다는 이야깁니다. 애당초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게 교만입니다. 운명의 주인은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바울이 빌3:12절에서"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 잡히고 그리스도께 포로가 되었다는 그것이 자기 정체의식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평생을 살았던 그 일을 바울은 이제 마치려 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 일을 시작하게 하신 이가 이제 그만 하라고 하시면 그만하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원망도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아쉬움도 적어야 합니다. 언제 일을 마치든지 만족할 수 있을 만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얼마만큼을 했든지 여기까지가 마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행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시간에 주저하지 않아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처럼"내가 간다. 여태껏 하던 그 일을 오늘 죽음으로 마감할지라도 그 일을 마치려한다."는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다 이루었다."참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많지도 않은 열두제자 가운데 하나는 가룟 유다입니다. 수제자라는 사람은 예수를 모른다고 도망갔는데 도대체 이 시원치 않은 업적을 놓고 어떻게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겁니까? 그러나 보세요. 예수께서는 만백성을 위하여 오셨고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예수님으로 해야 할 일, 예수님에게 맡겨진 일, 여기까지 분명히 다 이루었습니다. 

오늘 바울은 마지막 단계에서 하나님 앞에 또 한 번 겸손합니다. 전에도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이제는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그 마지막을 받아들입니다. 그런고로"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합니다. 

[존 웨슬리]에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밤 열두시에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설교준비하고, 심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날보다 30분 일찍 잠자리에 들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하던 일을 계속할 것이고 억지로 끌려가는 것처럼 하지 않고 30분 먼저 잠들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단계를 생각하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해가 다갑니다. 이 한해의 마지막에 이대로 마치려 해도 안타깝지 않은 나의 일들을 하며 달려왔습니까? 한 해가 다 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는 죽음에 다가서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대로 내 일생에 살아오던 길을 마치려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겠습니까? 아무 미련 없이 새로운 결단을 가지고 생을 마감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내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무슨 일을 만날는지, 환난과  핍박이 나를 기다린다고 해도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려 함에 나는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언제일는지 모르지만 우리 생의 마지막 고백도 이런 귀한 고백이 될 수 있도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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