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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스스로 돌이켜 (눅 15: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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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돌이켜 (눅 15:17~24) 

코카콜라(Coca Cola)는 미국 문화의 상징이자 이미지입니다. 코카콜라는 유엔 회원국수보다 많은 1백 95개국에서 생산되며, 세계 청량음료시장의 45%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코카콜라가 그토록 유명한 회사가 된데는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코카콜라 창업자 아사 캔들러(Asa Griggs Candler)는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의지력이 약해 금주 선언을 몇 번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귀가하던 그는 벼락같은 음성을 듣게 됩니다. "자신의 본능적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캔들러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그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그 시간에 남편의 금주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노라 고백합니다. 부부는 서로 손을 잡고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드렸습니다. 

캔들러는 아내의 기도를 통해 영혼의 안식을 얻었습니다. 알콜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기도의 능력으로 술을 끊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수입의 10%를 철저히 헌금하였으며 그 이후 코카콜라 회사는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전환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전환점을 통해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며 살던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곳을 떠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살다가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으로 살수밖에 없는 시골소년이었지만 골리앗과 싸워 승리를 거둠으로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바울 역시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던 사람이었지만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완전히 변화되어 이방 선교의 문을 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위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은 모두 다 인생의 전환점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해가 끝나는 마지막 송년주일입니다. 말씀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와 관계를 무시하고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에만 관심을 가지는 둘째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오직 자기에게 돌아올 소유에만 관심을 가지는 현대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든 척도가 자기중심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더 관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탕자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히브리적 사고로 볼 때 '스스로 돌이켜' 라는 관용어구는 회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회개는 스스로 돌이킬 때 보다 큰 의미가 있습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도 '스스로 돌이켜" 


첫째로 보게 하소서

톨스토이(Lev Nikloaevich Tolstoi)의 작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느 목사에게 두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한 여인은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립니다. 또 한 여인은 자기는 이렇다 할 큰 죄는 짓지 않았지만 자질구레한 죄는 많다고 합니다. 목사는 큰 죄를 지었다는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들 수 있는 가장 큰 돌을 가져오시오." 그리고 자질구레한 죄가 많다는 여인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잔 돌멩이를 가득 주워 오시오." 

한참 후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한 여인은 커다란 돌을 옮겨왔고, 다른 여인은 잔잔한 돌을 치마폭 가득 주워왔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말합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그 돌멩이들을 제 자리에 갖다 놓으시오." 그러자 큰 돌을 가져온 여인은 낑낑거리며 제 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가져온 장소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돌을 가득 주워온 여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맵니다. 가져온 장소를 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목사는 말합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도 바로 이러합니다. 당신은 이러저러한 죄를 지으면서 죄책감 없이 살아왔기에 많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 여인은 큰 죄를 짓고 죄를 보며 통회하였으니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이 내린 것입니다." 

본문 18절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둘째 아들은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죄를 깨닫는 것은 은총입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면 계속 매를 맞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을 나와 허랑 방탕한 것이 하늘과 아버지께 큰 죄가 된다는 사실을 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품을 떠난 것 자체가 죄입니다. 내 것이라고 마음대로 허랑 방탕하게 쓰는 것도 죄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을 내 것이라고 마음대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죄를 보았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볼 때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됩니다. 


둘째로 찾게 하소서

커크 패트릭(W. J. Kirkpatrick) 교수가 펜실베이니어 로린스빌 캠프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매일 밤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독창을 하는 청년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청년은 예수를 믿지 않는 직업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르는 찬송은 많은 성도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커크 패트릭은 청년에게 열심히 전도해 보았지만 청년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안타깝게 생각한 패트릭은 집회기간 동안 청년의 영혼을 위해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온 밤을 새워 기도하던 중 문득 찬송시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즉시 그 시를 기록하고 곡을 붙였습니다. 그 날 밤 곡을 청년 가수에게 넘겨주고 독창을 부탁했습니다. 청년은 그 날 밤 아름답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패트릭이 만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찬송이 바로 331장입니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찬송을 부르던 청년은 5절까지 다 부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떠난 이 죄인, 받아 주십시오. 나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주님이 붙들어 주셔야 됩니다. 잘 살고 싶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 연약함과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나를 받아 주옵소서." 청년은 가사 대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가 부른 찬송이 신앙고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둘째 아들은 자기를 잃어버렸습니다. 큰 범죄는 아버지를 떠난 것이 아니고, 재산을 탕진한 것도 아닙니다. 허랑 방탕도 아닙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죄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소중한 아들이었습니다. 종이 아니라 사랑 받는 자녀였습니다. 아버지의 끊임없는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재산을 물려받을 상속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박차고 자기를 잃어버린 채로 방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자기를 찾습니다. 잃어버렸던 정체성을 회복한 것입니다.

자기를 찾는 일이 최고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순간부터 더럽고 추악해집니다. 자기 정체성을 우선적으로 확립해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기를 찾아야 합니다. 본문의 둘째 아들은 분깃을 달라던 당당한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무릎을 꿇고 죄를 회개하며 아들이 아닌 품꾼으로 써달라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자신을 찾게 되었습니다. 잘못 살아온 것을 돌아봅니다. 어리석고, 잘못되고 뒤틀어진 마음과 생각을 교정하기 시작합니다. 새롭게 되려면 구부러진 마음을 펴야 합니다. 왜곡된 시각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비뚤어진 마음과 엉킨 생각들을 고쳐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자아로 세워져야 합니다. 


셋째로 향하게 하소서

일본에 다카바다(高畑)라는 학자가 있었습니다.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러다 결핵에 걸려 끝내 회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죽을 때가 가까워오자 그는 큰 소리로 찬송하고 눈물을 흘리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임종의 시간이 임박해 지자 그의 얼굴이 환해집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하나님께로 간다네. 모든 불신앙을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간다네." 이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하나님을 향해 눈을 감았습니다. 

본문 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둘째 아들이 집을 나온 것을 후회만 하고 돌아가지 않았다면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 입니다. '메타노이아' 는 '돌이키다, 방향을 전환하다' 라는 뜻입니다. 즉 회개는 후회나 자책을 넘어 방향을 바꾸어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뉘우치고 회개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주께로 향해야 합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하고 행동은 아직도 내가 주인 행세를 하고 살아간다면 여전히 탕자의 삶입니다. 이제껏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못했다면 무릎을 꿇고 방향을 아버지께로 향해야 합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버지를 향하여 방향을 전환할 때 용서해 주십니다. 이는 단순히 용서해주시는 차원이 아닙니다.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고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고 지위까지 회복시켜 주십니다. 잔치를 열어 함께 기뻐하여 주십니다. 

위버(Richard Weaver)목사가 스코틀랜드에서 청중을 향해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여인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위버 목사를 향해 말합니다. "저는 어머니와 살다가 9년 전에 가출했습니다. 설교를 듣고 새 생명을 찾았습니다. 이제 고향의 어머니에게 달려가 용서를 빌겠습니다." 여인은 9년 만에 고향을 찾았습니다. 밤은 깊었습니다. 대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런 인기척이 없습니다. 대문을 밀자 문이 열렸습니다. 집 안에 들어가자 어머니의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이 보입니다. 어머니는 대문과 방문을 모두 열어놓은 채 침대 위에 힘없이 누워 계셨습니다. 조심스럽게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딸을 끌어안으며 흐느꼈습니다. "네가 집을 나간 그 날부터 9년 동안 단 한번도 문을 잠그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밤에 돌아와도 쉽게 집에 들어오도록 불을 밝혀 놓았단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회복하여 주십니다. 예수의 보혈로 죄를 씻어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만들어 주십니다. 한 해를 보내며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자신의 죄를 보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죄인된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하나님께 향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돌이킴으로 새해에는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으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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