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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마지막 주일의 우리의 결심 (벧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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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벧전 4 : 7 - 11
제 목 : 마지막 주일의 우리의 결심

오늘이 12월 30일이니까, 이제 2007년도 하루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올 한 해가 시작 된지가 참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가 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에, 세월이 참 유수와 같다는 어른들의 말이, 참 실감이 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올 한 해 동안, 정말 후회함이 없는 인생을 살아간 분도 계시겠지만, 또 어떤 분은 정말 후회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올 한해를 보내신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은, 이 둘 중에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자에 속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후자에 속한 분들이 훨씬 더 많으실 줄로 압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정말 후회함이 없는 인생을 살아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특별히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얼마나 충성되게 지내왔는가? 라고 하는 질문 앞에는, 모두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는 처지일 줄로 압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적인일이야, 우리가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라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지만, 신앙생활이야 어디 그렇습니까?  솔직히 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물론 여러분 가운데는, 한 사람도 이런 사람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1부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말고, 2부나, 3부 예배드리는 분들 중에는, 이런 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과연 옳은 생각일까요?   과연 이치에 맞는 생각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놈의 신앙이냐?”  
그래서 세상적인 바쁨을 들어, 신앙생활을 등한시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처신이 옳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인 것입니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게 하는 생각인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굉장히 옳은 것 같고, 또 이런 행동을, 굉장히 처신을 잘하는 행동인 줄로 알겠지만, 결국 그 생각과, 그 행동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막대한 손해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살아온 사람치고, 나중에 잘 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비신앙적이고, 불신앙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아온 성도들 가운데, 한 해를 마감하고, 자신의 인생을 결산해 볼 때에, 복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라도 있는 것을 봅니까?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축복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가, 영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세속에 물든 사람의 모습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영의 사람으로, 신앙의 사람으로, 먼저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그릇을 먼저 깨끗하게 닦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속에 좋은 음식이나, 물건을 담아 둘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속 사람인 영이 깨끗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삼 1 : 2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할렐루야!!  무엇이 잘 됨같이?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먼저 우리의 영혼이 잘 되어 질 때에, 비로소 우리 인생의 범사가, 육신의 모든 일들이 잘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먼저 신경을 쓰고, 또 추구해야 될   사항이 무엇이냐?   영혼이 잘 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또 영혼이 자라는 일을 추구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또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또 이런 영적인 부분을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는 일에 힘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 많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을 보세요.  한 해를 결산함에 있어, 얼마나   많은 이득을 남겼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축복을 받았습니까?   
별로 받은 축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축복은 고사하고,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시련의 세월을, 고통의 세월을 보낸 분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서도, 올 2007년도 한해를 그리 순탄하게 보내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은 줄로 압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영혼이 잘 되는 일에, 관심이 적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이 잘 되기를 먼저 바라며, 세속적인 삶을 살아간 까닭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면, 우리는 과감히 이런 잘못된 모습을 벗어 버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더 이상 이런 모습으로, 또 한 해를 맞이하지 않도록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한해를 마감하는 가운데 맞이하는, 이 마지막 주일은, 참 의미 있고, 뜻 깊은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지금, 이 2007년도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의 신앙 속에는, 어떤 다짐이 있습니까?   

우리는 분명 이 마지막 주일에, 이제까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새로운 신앙의 삶을, 다짐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이 예배 시간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마지막 주일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다짐하고, 결심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세 가지를 우리에게 다짐하고 결심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생활을 하기로, 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아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만물의 마지막 때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성경적으로 보면, 주님이 재림하실 이 세상의 마지막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이 마지막의 때는, 우리 인생의 종착점인 죽음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언제 우리가 죽을지 모르는 일인 것입니다.  
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에 순서가 있습니까?   
앞 서거니, 뒷 서거니 하면서 인생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 죽음에 앞장서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나는 결코 먼저 죽지 아니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보세요. 
그는 내일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영혼에게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말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날 밤 그 영혼을 불러 가셨습니다.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에게 내일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에게는 그날 밤이 마지막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가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원치 않게 또 한 살을 더 먹게 되었습니다.  
이는 점점 더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월의 흐름은, 나이에 따라 가속도가 붙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제 40이 막 넘어섰습니다.  세월의 속도가, 시속 40키로인 셈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저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습니다.  어떤 분은 50키로 중반대의 속도가 나고 있고, 또 어떤 분은 60키로, 70키로의 속도를 내고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한 해가 거듭될수록, 세월의 속도는 그만큼 빨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를 타고 다녀보면 아시겠지만, 어디 속도가 빨라야만 사고가 나나요? 속도가 늦어도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누구도 남은 세월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마지막 주일, 또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먼저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올 한 해 동안을, 아무런 사고 없이, 오늘까지 지켜 주신 은혜에,   우리는 진정 감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가 올 해가 마지막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게 되겠지만, 다가오는 새해가 우리의 마지막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세월을 아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섣불리 낭비하며, 허송세월을 보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5 : 16절 이하에 보세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아멘!!!  

어리석은 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세월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세상에 취해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여전히 육신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마지막 때에, 기도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직까지 기도에 약한 분들이 계십니까?  이 마지막 주일에, 기도에  힘쓰기로 다짐하고, 결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우리의 신앙에, 아니 우리의 인생에 생명 줄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바른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우리가 소망하는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만나는, 최선의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최선의 방법을 택할 줄 아는 성도들이, 가장 지혜로운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엡 5 장의, 세월을 아끼라는 말을, 원문에서 그 뜻을 찾아보면, 이런 뜻이 있습니다.  “시간을 사라” 는 뜻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간을 사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시간을 사고, 또 어떤 시간을 사라는 것입니까?   내가 가진 시간으로, 내가 육신적으로 이제가지 사용했던 그 시간으로, 하나님의 시간을 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시간을 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게 속한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의 시간을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은혜를 사고, 하나님께 속한 축복을 사고, 하나님께 속한 능력과 권세를 사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이 마지막 때에, 우리는 힘써 기도해야 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하면, 지금부터라도, 하나님 앞에 힘써 기도하기를, 결단하고 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심이 없다고 한다면, 참으로 죄송한 이야기지만,  여러분이 맞이할 2008년도 역시도, 올해와 마찬가지로, 별로 소망이 없는 한 해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또 다시 여러분은, 후회와 한숨밖에 없는 한 해를 마감하게 될 줄로 압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이러한 삶을 원하는 분들은 없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생각만 있고, 실천이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내년도를 향한 기대도,  결국 허상으로 끝이 나고 말 것입니다.  결코 실상으로 나타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오늘 이 마지막 주일날,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서, 새롭게 결심하고,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이 바쁜 것은 핑계가 되지 않습니다.  삶이 바쁠수록  우리는 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점에 가니까, 이런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  너무 인생이 바빠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바쁜 삶 속에 나 혼자 인생을 경영한다면, 무슨 실수를 하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나의 삶의 안내자가 되어 주시고, 나의 삶의 지도자가 되어 주시고, 나의 삶에 후원자가 되어 주옵소서.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도, 이런 신앙의 기도가 매일 같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 이 마지막 주일날, 우리는 또 하나님 앞에 무엇을 다짐하고, 결심해야   하겠습니까?   그 두 번째는, 서로 사랑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을 다짐하고,  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세요.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올 한 해를 보내면서, 지나온 여러분의 삶을, 되돌아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과 함께 한 많은 사람들이 있을 줄 압니다.  먼저는 가정 안의 가족들이 있을 것이고, 또 교회 공동체 안의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직장에서, 또 사업장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 주변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수많은 이웃들도 있습니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여러분 얼마나 사랑을 베풀며 살아오셨습니까?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어가지를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상대방에게 쉽게 상처를 주고, 상대방과 쉽게 대립하고, 상대방과 쉽게 등을 돌려 버립니다.  
이런 일들이 가정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직장이나 사업장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또 우리 주변의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심지어는 교회 안의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의 삶을 보면, 너무나도 피폐해 있습니다.  피폐할 수밖에 없지요?  서로 간에 마음의 문을 닫고, 서로 간에 상처를 주고 살아가고   있으니, 어찌 그 삶이 피폐하고 메마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들이 삶이 삭막합니다.  정이 없어요.  그래서 개인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기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남을 모르고, 우리를 모르고,  그저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이러한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될 줄로 압니다. 
왜입니까?  이런 삶은 결코 주님의 말씀하신, 신앙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 13 : 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또 요일 4 : 7절 이하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말은, 곧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하나님이 상관하지 않으신다면, 그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거기에 무슨 하나님의 축복이 있겠습니까?   그저 껍데기만 있는 신앙생활에 그칠 뿐이라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앙꼬 없는 찐빵인 것입니다.  물 없는 오아시스인 것입니다. 

딤후 3 : 5절에서, 바울이 말을 하지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모양만 있고, 능력은 없는 신앙의 삶에서, 이제는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습니다.  매 주일마다 우리는 경건의 모습을 갖추고,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오늘 마지막 주일까지, 하나님 앞에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까지 드린 예배에, 하나님이 관심이 없으시고, 상관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드린 그 무수한 예배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예배일 때 그렇습니까?  사랑이 없는 예배일 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 없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드리는 예배일 때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불화합니다.  교회 내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과의 관계가 불편합니다.  그리고 6일 동안 주된 삶의 현장인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험악합니다.  이웃을 향해서도, 분을 내고,  화를 냅니다.  그래서 이웃들과의 관계도 좋지를 못합니다.  

이런 삶 속에서, 주일날 교회에 나와, 우리는 예배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 예배, 받으시지 않습니다.  가인의 제사인 것입니다.  

마 5 : 22절 이하에 보세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형제 사랑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 해 동안에, 서로 사랑하면서 사셨습니까? 
아내를 사랑하셨습니까?  남편을 사랑하셨습니까?  남편을 바라볼 때마다,  원수처럼 느껴지십니까?   아내를 바라볼 때마다, 목석처럼 느껴지십니까?  
그래서 미워하고, 그래서 관심도 없이 지내셨습니까?  그 가정은 지옥인 것입니다.  왜 성도의 가정이 지옥이 되어야 합니까?   성도들의 가정은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작은 천국이 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동료들이나, 상사나 후배들을 사랑하셨습니까?  
아니면 경쟁상대로 생각해서 견제하고, 미워하고 업신여겼습니까?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직장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웃들을 사랑하셨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이웃들이 여러분을 칭찬합니까?  여러분을 존귀하게 생각합니까?  이렇게 되도록 이웃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셔야 합니다.  

이웃들에게 험담이나 듣고, 이웃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어진다면, 그런 성도는 신앙생활에 실패한 사람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웃에게 칭찬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할렐루야!!!  이와 같은 성도들이, 바로 우리 교회 성도들, 지금 이 시간에 예배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세에는 사랑이 식어 지는 때라고 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사랑을 실천하되, 열심히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러분, 주는 것입니다.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왜 살아가면서 원망이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불평이 생기고, 불화가 생깁니까?  사랑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받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지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도다.”  
사랑을 실천하되,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랑의 실천함에 있어서도, 오늘 본문에서 교훈하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원망없이 하라는 것은, 조건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으로 대접하고 섬기면서도, 나중에 상대방을 향해 원망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 대한 섭섭한 마음 때문인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과 섬김을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지요.  물론 처음부터 이런 알아줌을 바라고 섬기는 사람은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함에 서운함과 섭섭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상대방이 이유 없이 미워지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일로 인해, 그 사람과 원수처럼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렇게 원수처럼 지내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선으로 시작해서, 악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남을 사랑하되, 이렇게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생각해 볼 것은,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 줄 줄 아는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8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아멘!!  
주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 사랑 본받아, 상대방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덮어 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에 대한 결단과 결심이, 오늘 이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마지막 주일날, 우리는 또 무엇을, 하나님 앞에 다짐하고, 결심해야 하겠습니까?   그 세 번째는, 교회에서 맡겨주신 직분을 따라,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는 삶을 다짐하고, 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우리 성도들의 올바른 삶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활용해서, 주신 직분을 따라 교회에 봉사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구역장이면 구역에서, 찬양대원이면 찬양대에서, 교사면 주일학교에서, 전도회원이면, 각 전도회에서, 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없는 성도라고 한다면, 그는 온전한 성도가 아닌 것입니다. 
엡 4 : 12절 말씀을 보세요.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이 말씀을 역으로 읽어 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면 무엇을 필요하다는 겁니까?   봉사의 일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성도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성도는, 어떤 성도라는 말입니까?  온전한 성도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봉사를 하는 성도가, 온전한 성도요, 또 이런   온전한 성도들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지난 한 해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 여러분에게도 맡겨진 직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 직분을 따라 교회 앞에, 또 성도들 앞에 얼마나 봉사하셨습니까?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전도회 기관에 속해, 회원들 간에 서로 힘을 합해, 선한 주의 일에 봉사하셨습니까?   각양 은사를 따라, 합당한 부서에 속하여, 그 부서의 유익과 부흥을 위해 수고하고 봉사하셨습니까?  만일에 열심히 봉사하셨다면 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사정상 잘 하지 못하셨다면, 오늘 이 마지막 주일날, 이 시간  드리는 마지막 예배를 통해, 밝아 오는 새해에는 서로 봉사하면서, 주님 앞에 충성된 모습을 보이며 살리라고 하는, 각오가 결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달란트 비유를 여러분 다 아실 줄로 압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이렇게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는데, 한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진노하심 가운데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받은 달란트를 그냥 그대로 땅에 묻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런 수고도, 봉사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무익한 종이 되어, 주인의 잔치에 들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 또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저 땅에 묻어 두지 아니하고, 열심히 수고해서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칭찬하고, 그대로 남긴 것을 포함해 다 돌려 주었습니다.  
더 열심히 수고하고 봉사한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겐, 덤으로 한 달란트를 더 주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든 심는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심는 것이 없이는, 하나님께 받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 심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봉사요, 충성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  저울에 달려 부족하다.  우리의 직분을 따른 봉사, 또 주신 은사를 따른 봉사, 이런 것이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부족하다면, 하나님의 기대치에 못 미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부족하지만, 봉사한 만큼은 받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계산 방식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님은 물을 채워도  아구까지 채우기를 원하십니다.  절반도 아닙니다.  2/3도 아닙니다. 
아구까지, 끝까지 채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아만 장군에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했습니다.  여섯 번 까지도 효험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효험도 없었습니다.  
일곱 번 다 담글 때에 치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봉사도 그렇습니다.  적당히 하는 것, 효력이 없습니다.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그만 두는 것, 인정해 주시기 않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마칠 때까지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성이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봉사인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지나온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주님 앞에 행한 봉사가 너무나도 적고, 보잘 것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 허물치 않으시고, 올 한해도 그냥 참아 주셨습니다.  달란트 비유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벌써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도, 벌써 쫓겨나야 할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올 해도 주님은 참아 주셨다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올 해의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주님의 이러한 인내가, 올해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우리에게는 기회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년이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시고, 저물어 가는 올 해의 마지막 주일에, 주님 앞에 충성하고, 힘써 봉사하기를 다짐하고 결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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