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새 시대에 주신 비전 (행 2:16~21)

  • 잡초 잡초
  • 347
  • 0

첨부 1


성 경 : 행 2 : 16 - 21 
제 목 : 새 시대에 주신 비전 

1867년, 미국의 국무 장관이었던 월리엄 시워드가, 그 당시로서는 전혀 엉뚱하고, 황당한 한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그 사건이 무엇인가?  
그 당시에는 러시아 땅이었던, 알래스카를 구입한 사건이었습니다.  
얼마를 주고 그 땅을 샀느냐?   그때 돈으로 720만 달러!!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72억원, 그러나 생각해 봐요.  140년 전의 720만 달러면, 지금의 가치로는 약 8천억원 정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이 금액도 사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금액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거금을 들여, 그 당시에는 불모지와 다름없는 얼음 땅을 샀으니, 미국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잔치를 벌였습니다.  왜요?  쓸데없는 땅, 얼음밖에 없는 필요 없는 땅을 팔아버렸으니, 얼마나 홀가분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로부터, 약 140 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은 어떠합니까?  

아니 140년이 아니지요, 석유의 중요성을 안 시기부터 시작한다면, 1893년 디젤기관이 발명되면서부터, 석유가 상용화되기 시작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땅을 판지 불과 몇 년 만에, 전세가 역전 되어진 것입니까?   
불과 25년 만에 역전이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미국은, 세계 제 5위의  산유국이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지금 알래스카의 석유 매장량은 96억 배럴 이고, 그 가치는 자그마치 수백 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처음에 그 동토의 땅 알래스카를 사려고 할 때에, 미국 의회는 대부분이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 시워드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그래서 의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 의회에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눈 덮인 알래스카를 보고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감추어 있는 무한한 보고를 보고 사자는 것입니다.  우리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이야깁니까?  월리함 시워드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그 무엇인가를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엇인가가, 과연  무엇입니까?  그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석유요, 또 알래스카     온 산지를 덮고 있는, 울창한 산림 자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그 당시에는, 별로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아니한 것들  이었다는 거지요.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에 드러난 가치에만 몰두하고 있었지, 미래에, 아니 불과 몇 십년 후에 나타날 새로운 가치, 미래에  창조될 엄청난 가치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윌리엄 시워드는, 가까운 미래에 나타날, 그 놀라운 가치를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는 거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역사 속에 나타난 위대한 사람들, 또 성경 속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 그들 모두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한결같이, 비전을 가진 사람들, 특별히 자신의 장래를, 미리 소망 중에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눈 덮인 동토의 땅에서, 월리암 시워드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땅 속에 감추어진 무진장한 보화를 보았다는 겁니다.  그 얼음 땅 속에, 엄청난 자원인 석유가 들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매장량이 얼마인가 하면, 미국 전체 국민이 약 50년 동안 쓸 정도라고 합니다.  지금의 가치로도 1조원도 안 되는 8천억 투자해서, 수백 조원의 이득을 남겼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백배의 축복, 아니 그 이상의 축복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왜 설교 서두에 이런 말을 합니까?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원리도, 이런 경제적인 원리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뭐든지 투자를 해야, 이익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사람들이 뭔가를 얻기 위해, 먼저 투자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투자를 합니까?  투자를 해도, 그냥 크게 손해 보지 않을 정도로만 투자를 합니다.  적당히 한다는 거지요.  
무리하지 않게...   손해를 봐도, 별로 부담이 안 될 정도로...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투자를 해서는, 결코 이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익이 있다가도, 금방 없어집니다.  그래서 늘 삶이 변함이 없어요.  
그냥 그 수준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평범한 삶이 아니라, 엄청난 이익을 얻어,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부자의 반열에 들기 위해서는, 투자를 해도 엄청난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 때로는 내 전부를 잃을 각오를 하고 올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행동이 그냥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나름 확신이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무엇이 있기 때문에?  확신!!  
여러분, 확신이 뭡니까?   곧 믿음인 것입니다.  아멘!!  무슨 믿음이요?  
나는 망하지 않는다.   나는 반드시 이번 투자를 통해 성공할 것이다.  
나는 반드시 일어설 수 있다.  내 인생에 꼭 대박이 터질 것이다.  아멘!!  

남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허황된 것 같고, 무슨 요행을 바라는 것 같지만, 자신 속에 내재 된 확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 믿음 가지고,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한 엄청난   투자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투자 정신을 가지고, 오늘 우리도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예요.  그래야 그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충만하게 받아 누릴 수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인생에는 어떤 꿈이 있습니까?   
특별히 신앙 안에서 어떤 비전이 있습니까?   우리는 꿈에 대해서, 또 비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앙 가운데 비전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을 보게 됩니다.  말은 많은데,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은 별로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왜 이런 기이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겠습니까?  다른 이유 없습니다.  꿈과 비전을 따른, 특별히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룩한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한, 신앙적 투자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래에 여러분의 비전이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대가 없는 꿈은, 그야말로 허망한 꿈입니다.  백일몽이며, 개꿈인 것입니다. 사 29 :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요.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 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무슨 말입니까?   실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꿈인 것입니다.  드리밍... ing..  진행형이지요.  그냥 꿈으로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깨게 되면, 어떻습니까?  대박이 아닌, 쪽박 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그러나 비저닝..  ing..  또 다른 진행형, 계속 꿈을 향해, 비전을 향해, 대가를 지불하게 되면, 그 꿈과 비전이 어느덧 현실이 되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어떤 현실입니까?  대박 난 현실..  아멘!!!   그래서 도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투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꿈과 비전에, 내 인생의  대가를 지불하면, 반드시 그 꿈과 비전은, 현실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반드시 내가 너를 들어 쓰리라.  할렐루야!!천지가 변해도 나의 약속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  이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비전은, 성장을 낳는다.” 큰 강도 처음에 작은 개울에서 시작 됩니다.  참나무는 도토리 속에서 잠잔다고 합니다.   새들은 알속에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슴 속에는, 여러분의 신앙 속에는 무엇이 품어져 있습니까? 여러분의 미래를 향한 원대한 꿈, 하나님이 허락하신 비전을 품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위대한 비전이 품어져 있습니까?  만약에 이것이 없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그저 빈껍데기인 것입니다.   제가 좀 인생을 살아보니까,  껍데기는, 돼지 껍데기 밖에는 좋은 것이 없습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여러분의 신앙에, 이런 거룩한 비전이 있고, 꿈이 있기를 바랍니다. 
잠 29 : 18절에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히 행하거니와”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방자히 행하다가, 다시 말해, 지 맘대로 행하다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결국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신문에 보니까, 현재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꿈을 키워왔던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전 미국 대통령이었던 클린턴, 또 현재 미국의 국무장관인 콘돌리자 라이스, 또 골프의 황제라고 하는 타이거 우즈, 또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방송인인 오프라 윈프리, 이런 쟁쟁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네 명중에 세 명이, 피부가 까만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제가 소개한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꿈을 키워온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타이거 우즈는 겨우 2살 때에,   이미 골프 치는 동영상까지 있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그냥 어쩌다가 된 위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전 5: 3절에,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들리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의 특징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꿈이 이루어짐을 믿습니까?  꿈은 이루어집니다.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꿈은 절대로 말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일을 많이 행함으로, 다시 말해 노력을 힘써 기울임으로, 꿈과 비전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멘!!!   
이런 인생의 원리와, 신앙의 원리를, 오늘 이 시간 다시 한번, 분명히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비전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은, 성경 속에 나타난 약속의 말씀을 붙잡은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신 32 : 49절에 보면,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나안 땅은 어떤 땅입니까?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또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차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약속의 땅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의 말씀을, 실제로 그 땅을 상속한 것처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꿈과 비전은, 곧 실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당장 그들의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아멘!! 
이것이 비전이 있는, 신앙인의 삶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전을 주실 때, 정말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말씀만 주시는 것입니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최초로 주신 비전이 있는데, 그 비전이 창세기에 나와 있습니다.   
창 1 : 28절에,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비전이 나와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최초로 주신 비전인 것입니다.  

이 비전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누가 있었습니까?  아담과 하와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이 땅에 충만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두 사람이 땅을 정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두 사람이 세상의 모든 생물들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런 불가능한 일을 말씀하시고, 이것을 그들에게 이루라고 명령하십니까?   하나님이 결국 이 모든 일이 가능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창 1 : 28절의 처음 주신 비전, 그 말씀의 서두에 보면,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무엇을 주시며?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명령을 충분히 이루고도 남을 정도의 능력을 주시기로 작정하시면서, 이런 비전을 아담과 하와,  두 사람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신 다음에, 두 사람을 보내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이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와 같은 예는, 창 13장의 아브라함에게서도 나타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 땅에서 행하라.  
아브라함에게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아브라함에게 무슨 능력이 있었습니까?  아무런 능력도 없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조카가 자신을 업신 여기며, 좋은 땅을 먼저 가지겠다고 큰 소리 쳤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좋은 땅을 조카에게 양보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약해서도, 무능력해서도 아니었다는 겁니다.  
자신의 나약함 속에 나타나는 비굴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보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비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놀라운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비전을 주신, 창 13장의 말씀 이전인 12장에, 그 말씀이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할렐루야!!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먼저 복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 땅에서 행하라.  
복을 선언하신 다음, 아브라함에게 비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전혀 불가능한 비전이겠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자신을 향한 축복의 말씀을 붙잡은 아브라함의 신앙 안에서는, 얼마든지 실현가능한  비전이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놀라운 비전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미 주어진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미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에게는 비전이 그토록 멀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왜 남의 이야기로만 느껴지는 것일까?   그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스스로가 붙잡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또 말씀을 들어도, 마음에 새기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오늘날 성도들이,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지 못하고 있는가? 
말씀의 가치를, 스스로가 못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별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등한시합니다.  예배에 대한 준비나 사모함, 간절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자꾸만 자기를 묶어 두는 것 같은 부담감을 가집니다.   
그래서 예배는 드려도, 성경공부 모임은 회피합니다. 
왜요?  시간이 아깝다는 거지요.  예배만 드리면 됐지, 또 무슨 성경공부까지 해서, 자기의 아까운 시간을 죽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멘!!!  말씀이 나를 묶는 것이 아니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자유케 하고, 나를 더 원대한 꿈으로 나아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지 못하고, 놓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놓치면, 동시에 축복도  놓친다는 사실을...  말씀이 곧 축복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여러분의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말씀을 배우는 시간에   여러분의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다른 세상의 중요한 시간을 희생하면서라도, 그 시간을 말씀에 투자하시길 바랍니다.  영적인 일에, 내 영혼이 잘 되는 일에, 먼저 여러분의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시길 바랍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끼라..
원문에 보면, 그 뜻이 “시간을 사라” 는 뜻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시간을 투자해서, 하나님의 시간을 사라는 것입니다. 

마 13 : 44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보고요?  
그 밭에 숨겨 진, 그 밭 아래에 감추어진 보화를 보고서...  
그래서 우리가 예배와 말씀을, 세상의 시간을 몽땅 투자해서라도 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속의 말씀과 같이, 여러분의 범사가 잘 되고 형통케 되는 축복의 역사가, 반드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세대에 주신 비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받게 되는,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행 2 : 17절에 보면,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언하며, 환상을 보며, 꿈을 가지는 일이 무엇입니까?  비전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전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내 영으로...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런 비전을 모든 사람에게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심으로, 우리가 예언을 하게 되고, 환상을 보게 되고,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어떤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까?  그 예언이 실제적인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 환상이 실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 꿈이 내 눈앞에서 실현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냥 실현되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예언한 것 이상으로, 내가 본 환상보다 더 놀라운 모습으로, 내가 꾼 꿈보다 더 화려한 모습으로 실현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기 이전에는 제자들이 유대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언제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던 회복은, 고작 이스라엘 땅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했습니다.  실제 제자들이 회복시켜야 될 땅은,  세계 모든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를 품고 계셨는데, 그들은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들이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더군다나 기도에도 힘쓰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회복만을 운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한계였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전이 어디서 발견되어집니까?  여러분이 기도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성령 안에서 발견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행 1 :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아멘!!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면 세계를 품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또 성령이 임해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 받아라, 성령 받아라, 예수 내게 말씀하셔서” 
누가 내게 말씀하셔서?  예수가,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성령 받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왜?  성령 받아야 하나님의 비전을 이해하고, 나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아멘!!  
“할렐루야, 성령 받았네, 나는 성령 받았네, 
할렐루야, 성령 받았네, 나는 성령 받았네.”   할렐루야!!!  
옛날 북미 대초원 인디언들에게는, 어린 나이에 치러야 하는 비전 찾기(vision-seeking)라는 의식이 있다고 한다.  무더운 오두막에서 혼자 긴 시간을 보내며, 금식하며 기도하는 의식이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삶의 의미와, 또 인생의 목적, 그리고 자신의 부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비전 찾기가 있어야 한다.  (vision-seeking)
왜? 성령 없이 얻는 비전은, 결국 개인의 욕망으로, 야망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비전의 목적은, 주님의 영광이다. 아멘!!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야망은 자신을 위한 삶입니다.  

비전의 삶은 하나님께 목적이 있다.  그러나 야망의 삶은 내게 목적이 있습니다.  비전의 삶은 하나님의 능력을 얻게 한다.  그러나 야망의 삶은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한다.  비전의 삶은 주님을 높이고 생명을 얻게 하지만,  야망의 삶은 주님을 팔고 생명을 잃는 삶을 살아가게 한다.

여러분, 영성(靈性)은, 영성(零性)이라는 말이 있다. 
참 영성은, 아무 욕망도 없는 빈 상태라는 뜻이다. 
제 야망을 비전이라고 우겨대는 고집스러움을 버리고, 주님이   이루어 가실 새 시대 새 세상을 꿈꾸는 것이 영성인 것이다. 
자기를 비우고, 주님께 의존하는 것이 바로 비전인 것이다.

헬렌 켈러에게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 앞이 보이지 않는 생활보다 더 불행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 때 헬렌 켈러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전 없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비전이 없이 살아가는가? 
성령을 받지 못했으니까, 비전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도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기도함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비전으로 충만하게 된다.  아멘!!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알프스에서 길을 잃어, 13일 만에 구출 당했다. 그는 매일 12시간씩 걸었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자기가 있는 곳에서, 불과 6킬로미터   안에서 왔다 갔다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13일간을 보낸 것이다.  
여러분, 사람이 눈을 가리면 바로 걷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눈을 가린 상태로 20미터를 걸으면, 약 4미터 이내의 간격이 생기고,  또 10미터를 가게 되면, 결국 원을 그리면서 돈다고 한다.  이 현상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윤형 방황이라고 한다. 
우리의 신앙 인생에도, 이런 윤형 방황이 있다는 것이다. 
비전과 꿈이 없는 인생, 신앙, 결국 눈 가리고 걷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도할 때 우리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신 대로, 그 감동이 무엇인가?  
비전인 것이다.  그 비전을 따라, 이제는 과감하게 전진하며 새로운 신앙의   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안 해 본 것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까지 안 먹어본 것은, 절대 안 먹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그 동안 안 먹어보고, 이상한 것만 골라 먹어보는 사람도 있다. 또 안 해 본 일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굳이 그 일을 해 보고 마는 사람들도 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  절대 못하는 유형인가?  아니면, 모든 것이 가능한 유형인가?   후자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인생의 윤형 방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비전을 향해서 과감하게 전진하는 길 밖에는 없다.  프론티어 정신, 비전을 향해 도전하는 정신, 
이러한 정신이 개척 정신이며, 이런 사람이 비전을 품은 비저너인 것이다.

결론을 맺겠다.  미국 플로리다의 디즈니월드를 개장할 때, 월트 디즈니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래서 행사장에서는 그의 부인이 그를 대신하여 연설을 했다.  청중 앞에 그녀를 소개한 사람이, “디즈니 여사, 월트 디즈니 씨가 이것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라고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디즈니 부인이 이런 말을 했다.   “그 양반은 우리보다 먼저 보고 가셨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전은 아직 없는 것까지도 이미 보게 만드는 것이다. 
비전과 전혀 관계없이 끌려 다니는 사람 (stranger)가 있다. 
또 비전에 끌려 다니는 사람 (follower)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비전을 성취하는 사람 (achiever)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비전을 성취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비전을 심는 자(leader)가 있다. 

저는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영적인 부분에 투자해서, 더욱 더 말씀과 기도에 힘쓰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비전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비전을 성취하는 사람, achiever가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비전을  심어 주는 사람, leader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    (전승빈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