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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꾸밈 없는 성탄의 기쁨 (눅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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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밈 없는 성탄의 기쁨 (눅 2:8~20)

  
여러분은 올해 성탄절 분위기를 얼마나 느끼고 계십니까? 아마 여러분 중에는 눈이 오면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텐데 눈이 오지 않는 것이 아쉽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이고 또 경기가 더 좋았더라면 주머니가 두둑해서 성탄절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 사랑하는 가족, 친구가 함께 할 수 있었다면 더 정다운 성탄절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혼자 있는 것이 좀 쓸쓸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인간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분위기가 필요하겠지만 영적인 명절을 지내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것이 필요 없고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고 예수님이 계시고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으로 이미 성탄의 기쁨이 충분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외의 것은 다 부수적인 것입니다. 오히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사람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은 인위적인 것이요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요 또 진정으로 영적인 크리스마스를 지키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백화점은 분위기를 띄워야 사람들이 쇼핑을 합니다. 사람들의 주머니를 열게 하기 위해서 백화점은 이 성탄절의 분위기를 띄우려고 애를 씁니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추리와 라이트와, 그러나 우리가 평소에 익숙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 대부분은 소비를 조장할 목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소비를 조장할 목적으로 크리스마스 캐럴 송을 틀어놓고 길거리에 성탄절의 무드를 만드는 것이지, 실제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백화점과는 그런 면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첫 크리스마스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 메이커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 구유의 모습, 마구간의 소와 양,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성탄절의 캐릭터입니다만 그러나 그 마구간에 짐승들만 있었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마리아와 요셉을 도울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을 맞아줄 사람도 없었고 아기 예수를 받아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이 그 마구간에 자리를 어렵게 만들고 거기에서 예수님을 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와 양과 짐승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목격했다는 얘기는 그들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 기독교 영화를 보면 동방박사들 앞에 별이 앞서갈 때 배경에 은은하고 거룩한 음악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별을 찾아갈 때는 그런 배경음악이 없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몇 달에 걸쳐서 사막을 건너고 산을 넘어서 메시야를 힘들게, 힘들게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 밖의 목자들은 가장 크리스마스다운 분위기를 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노래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왜 음악이 크리스마스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느냐?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 밤에 천사들이 노래를 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는 것이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다시 적막함이 찾아왔습니다. 다시 어두운 밤이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이 목자들이 베들레헴에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 목자들이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할 때 그 배경에 천사 합창단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적막함, 고요함, 또 어두운 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간 것입니다. 

인간적인 감흥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런 모든 보조 도구가 도움이 되겠지만 영적인 실체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런 것이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의 믿음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의 믿음이 있는 것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하여 이런 많은 보조도구들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무력하다는 얘기요,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얘기요, 하나님이 역사할 것을 기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 대신 영적인 것을 생산해야 된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같은 동료 한인 학생이 여름수련회를 계획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기억합니다. 여름 수련회는 일 년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그때 은혜를 받지 못하면 일 년 내내 은혜 받을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에 수련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모든 교역자들이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제 친구 전도사가 뭐라고 말하느냐면 혹시라도 은혜가 없을 것을 대비해서 보조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된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이 은혜를 못 받을 경우를 대비해서 재미있는 영화라도 상영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을 불신해도 분수가 있지 왜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기 왜 안주실 것을 대비하느냐. 마치 그것은 하나님이 없을 것을 대비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 할 것을 마련한다는 얘기처럼 제 귀에 들렸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보조도구를 필요로 합니다. 거기에 익숙해졌습니다. 그게 없으면 은혜가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빈야드 운동을 창시한 존 윔버 목사는 병자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했습니다. 본인만 병자를 위해서 기도한 것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병자를 위해 서로 기도하고 하나님이 역사할 것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애를 썼는데 그분은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에 일부러 아무런 배경음악을 틀지 않았습니다. 배경음악을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커닝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칙이라고 그분은 주장했습니다. 배경음악을 통하여 분위기를 조장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성령이 하는 일이 아닌 심리적인 방법으로 성령의 역사를 대신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음악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은 나답과 아비후가 이상한 불을 제단에 피운 것처럼 이상한 불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주장했는데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존 윔버가 처음이 아니고 수백 년 전에도 이미 그런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수백 년 전에 트렌트 공회가 교회음악에 대하여 어떻게 결정한 적이 있느냐면 교회음악에서는 화성을 넣지 말라고 결정한 적이 있습니다. 화성이란 화음을 말합니다. 왜 교회음악에서 화음을 금지했느냐? 음악에 화음이 들어가게 되면 아름다워집니다. 듣기 좋아집니다. 그게 뭐가 나쁘냐? 음악의 아름다움에 교인들이 취해서 거기에서 감동을 받고 마치 그게 하나님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아닌 음악의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감동을 받고 그게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면 진짜 은혜를 받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하여 도대체 얼마만큼의 보조도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요즘에는 교회마다 예배를 엔터네인먼트화 해서 화려해야 되고 스케일이 웅장해야 되고 그래야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하시는 일고 사람이 하는 일을 궁극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구별하기 전까지는 진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수년전에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성금요일 예배를 준비하는데 주최 측에서 제가 뭐라 주문하느냐면 교인들이 많이 울게 해달라 그러더라구요. 성금요일이니까 당연히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하고 울 수 있지요. 그러나 어떻게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에게 교인들을 울려달라고 주문할 수 있습니까. 제가 양파를 까게 합니까, 슬픈 이야기를 합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교인들을 울게 할 수 있습니까. 그건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지요.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면 사람이 사람에게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서 울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신다면 모르지만 인위적인 방법으로 유도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그래서 제가 안 울면 어떻게 합니까? 그랬더니 그러면 울게 해야지요. 아, 제가 그 말을 듣고 인간의 종교성이란 저런 것이구나. 그러니까 성공적인 집회를 만들기 위해서 교인들이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울게 만들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의 이벤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건 성령이 하는 일도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요, 사람이 사람을 심리적으로 조작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 뷔페식당에 갈 때 도시락을 싸갑니까? 뷔페식당에 가면서 도시락을 싸 가는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지요. 거기엔 젓가락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 다 마련해 놓았습니다. 갈비에서부터 맛있는 음식은 다 장만해 놓고 숟가락, 젓가락, 포크, 나이프, 다 있습니다. 입만 가지고 가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잔치를 예비하시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는 빈 그릇만 들고 가면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주님이 준비하신 뷔페 자리에 가면서 혹시 먹을 게 없을까봐 도시락을 싸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불신입니다. 주님 말씀에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보다 더 어떻게 쉽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죄를 용서해 달라고 구할 때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믿으신다면 여러분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구할 때 하나님이 왜 여러분의 병은 고쳐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외 성령을 구하든 은사를 구할 때 왜 하나님이 그것을 안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죄사함을 구할 때 거기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인색하다는 얘기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우리가 죄사함을 구했을 때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믿고 우리가 영혼을 구해달라고 기도할 때 영혼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다면 그 외의 다른 데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구별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더 풍성히 주시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인색하고 그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믿음은 다 똑같은 믿음이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원리도 다 똑같은 것이요, 구하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뜻을 단정해서 뷔페에 가면서 도시락을 싸가고 또 젓가락을 준비하고 음료를 싸 가고, 그건 하나님의 후하심을 의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믿음을 준비하기만 하면 나머지 결과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가 있고 그게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게 진짜입니다. 그게 진짜 천국의 기쁨이고 그게 진짜 은혜이고 그게 진짜 하나님의 영광이지 이것 이외에 우리가 추가로 무엇을 더한들 얼마만큼 더할 수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 얼마나 많은 보조도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까. 예컨대 결혼생활의 행복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보조도구가 필요합니까. 결혼생활이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이건 이벤트도 아니고 행사가 아니고 파티가 아닙니다. 인생은 이벤트가 아닙니다. 신앙이 이벤트가 아닌 것처럼. 아마 신혼부부에게는 처음에는 그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이런 저린 보조도구가 도움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가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그 옷이 그 옷이고. 안 그렇습니까. 남편이 퇴근할 때 아내에게 꽃을 사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요. 그런 마음이 우러나와야 분위기가 살지, 그런 마음이 우러나지 않지만 억지로, 의무적으로 꽃을 사오면 사가는 사람도 덤덤하고 받는 아내도 아마 덤덤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꽃을 사갈 그 마음이 있는 것 자체가 행복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마음이 있는 것이 행복한 것이지 그 꽃에 행복함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선물에 행복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 아무리 선물을 많이 해 보세요. 아무리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많이 받아보세요. 그렇다고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유아유치부든 아동부에서는 아마 아이들에게 성탄주일에 선물을 줄 것입니다마는 그것은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것으로 성탄의 기쁨을 대신하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선물을 많이 줘 보세요. 그것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든 감동이든 기쁨이든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느낄 때 그때 마음속의 고독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환영하고 인사하고 악수하고 그런다고 해서 마음의 허전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신앙생활에도 그렇고 우리의 삶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보조도구를 가득 채우면 그것이 행복일 것으로 생각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모든 보조도구 자체가 행복은 아닙니다. 그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을 표시할 수는 있지만 선물이든 소유든 물질이든 이런 것 자체가 사랑이 아니고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이 있지요. 가난한 부부가 성탄절을 맞게 됐는데 선물을 할 돈이 없어요. 그래서 아내는 아름다운 금발의 긴 머리를 잘라 팔아서 남편을 위해 시곗줄을 마련하고 남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시계를 팔아서 아내를 위해 머리빗을 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물교환을 할 때 서로에게 필요 없는 선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머리털은 다시 자라지만 팔아버린 시계는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아요. 그러니까 남편이 손해를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계산하는 부부라면 그건 행복한 것이 아니지요.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순전한 것입니다. 

인생은 행사가 아니고 이벤트도 아니고 파티도 아닙니다. 이것은 연기가 아닙니다. 인생은 그런 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사는 그 행사만 잘 준비하고 사람들이 와글와글하고 끝나면 끝이지만 우리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떠들썩하고 즐길 때도 있지만 그들이 다 떠나간 다음에 빈 집에서 설거지를 해야 되는 게 인생이에요. 그게 인생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편적으로 이벤트 위주의 신앙생활이 진짜라고 생각하면 안되고 불이 꺼지고 조명이 꺼지고 음악이 끝나고 그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천성을 향해 가는 백성이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합니다. 

성탄의 기쁨은 그러므로 다른 보조도구가 전혀 필요 없고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을 내가 믿고 내가 예수님을 찬양하고 송축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성탄의 기쁨은 충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나에게 족한 것이고 거기에서 성탄이 시작된 것이고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도 나에게 족하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이 우리의 참된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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