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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그 이름, 임마누엘 (사 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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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 임마누엘 (사 7:10~14) 


(사7:10-14)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1:18-23)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1. 노르웨이 교육부 장관 바드 베가 솔햐르씨가 세 살 난 아들 피터, 16개월 된 딸 아그네스를 돌보기 위해 지난해 8, 9월 두 달간 ‘아버지 휴가’를 썼다고 합니다. 솔햐르 장관은 육아 휴가 기간에 혼자 아이들 밥을 해 먹이고, 옷을 입히고, 유치원에 데려다 주며 하루를 보낸다고 합니다. 현직 장관이 나랏일을 뒷전으로 미루면서까지 육아에 열중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랏일은 저를 대신해서 할 사람들이 많지만 아버지의 역할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육아 휴가를 쓰면서 아내에 대한 사랑과 믿음도 더욱 깊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육아 참여가 나라 경제에도 도움이 됩니다. 아버지가 육아에 적극 참여하는 집일수록 둘째 출산의 가능성이 높다는 통계처럼, 차세대 노동력의 질과 양을 높이는 결과도 가져오지요.” 

실제로 2년 전 노르웨이에서 아빠 친화적인 기업 1위로 선정된 마이크로소프트(MS) 노르웨이의 그레트 요한슨(Johansen) 인사부장은 “직원들이 하루 평균 8시간쯤 일하지만 집에 일이 있으면 언제 퇴근해도 무방하죠. 아이가 아프면 집에서 컴퓨터를 켜고 재택근무를 하면 됩니다.”라며 ‘자유로운 근무시간’을 기업 성장의 비결로 꼽았습니다.  이 회사는 매년 20%의 매출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중입니다. 

호주 사회도 맞벌이 인구가 60%에 이르고 남성보다 소득이 높은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아버지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무뚝뚝하고 보수적인 스타일의 ‘오지 대디(Aussie daddy·호주 아빠)’는 줄고,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핸즈 온 대디(Hands-on daddy·양육하는 아빠)’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년 전만 해도 호주 남자가 요리를 하거나 유모차를 미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지만, 요즘 백화점에 가면 화장실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는 아빠들을 흔히 볼 수 있다.”고 합니다.(매콰리대 앨런 라이스 교육정책경영학장) 

이러한 변화는 한국보다 보수적인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며 일본 육아 잡지들은 “20대 일본 여성들은 ‘이케맨(잘 나가는 남자)’보다 ‘이쿠맨(육아를 하는 남자)’을 결혼상대 1순위로 여긴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세계적인 변화를 읽고 지난 2007년 여성가족부가 “프렌디”라는 신조어를 만들었습니다. 친구를 뜻하는 ‘프렌드(friend)’와 아빠를 친근하게 부를 때 쓰는 단어 ‘대디(daddy)’를 합친 말입니다. 친구같은 아빠가 늘어나고 있는 세계적인 흐름을 읽고 부성(父性)에 대한 새로운 모델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혜영 연구위원은 ‘남성의 부성 경험과 갈등에 관한 연구’ 설문조사에서 “한국 사회에서 친구 같은 아버지로 살아가기는 여전히 힘들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과도한 헌신과 몰입을 요구하는 직장문화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설문에 응한 아버지들은 ‘프렌디’, 좋은 아버지가 되는 데 걸림돌을 경제적 불안정(40%), 직장에서의 과도한 스트레스(19.4%), 장시간의 근로시간(17.7%)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김 연구위원은 “900명의 아버지 중 40%가 하루 10시간 이상 노동하고 있었다.”면서 “경제적 부양자로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자녀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딜레마에서 고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소득이 높거나 교육수준이 높다고 해서 ‘프렌디’가 될 확률이 높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강도 높은 업무를 요구 받고 치열한 경쟁 상황에 놓여 있는 남성들은 분만 과정에도 참여하지 못할 만큼 최소한의 부성조차 제약받고 있다.”며 대부분의 한국 아버지들이 ‘프렌디’ 모델로 살아가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김 연구위원은 “아버지의 인생 자체가 산 지식이었던 과거와 달리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정보화 시대에서는 아버지의 권위가 저절로 오지 않는다.”면서 “자녀들과 일상을 공유하고 스킨십하는 것이야말로 가정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세우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결론지어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가족들과 함께 하는 ‘프렌디’가 될 때 가정 경제나 나라 경제가 효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생산성 향상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프렌디’는 아버지가 어느 정도 경제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직장 문화와 사회적인 여건, 그리고 이에 대한 가치관과 인식의 변화가 뒤따라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17세 한창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보낼 때 형들의 시기를 받아 죽을 뻔했다가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행복했던 시절이 한 순간에 날아가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는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창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그리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어 7년 기근의 환난에서 가족들을 구원하였고, 애굽에서 가장 비옥한 땅 고센으로 70명 가족들을 이주시켜 조상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며 창대케 하리라.”(창12:2) 약속하신 축복을 이루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될 때 본인은 물론 온 가족들까지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형통하는 자, 형통하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와 함께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곧 성탄의 계절에 이전보다 더욱 더 여러분과 이 나라 백성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범사에 형통하는 복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2. B.C.734년경 남 유다 왕국의 아하스 왕 통치 시대입니다. 남 유다 왕국은 다윗 왕가의 혈통을 이은 왕국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제사장 나라입니다. 거룩한 성전을 짓고자 했던 다윗, 그리고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시121:6-9)는 믿음의 고백으로 몸과 마음이 쇠약할 정도로 성전을 사모했던 다윗 왕가에게는 다음과 같은 축복이 약속되었습니다. 

(삼하7:9-16)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이렇게 남 유다는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 제사장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기는커녕 오히려 우상숭배에 앞장 섰고 정치적으로는 앗수르 제국의 힘을 의지하는 정책으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아하스 왕의 우상숭배는 광적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초기부터 말기까지 시종여일하게 완악한 마음으로 우상숭배를 자행하면서 각종 이방 나라의 우상들을 제작, 보급하고 우상숭배의 산당들을 건립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성전의 모든 예배드리는 기구들을 파괴하고 일체의 성전 봉사를 폐지시켰습니다. 결국 아하스 왕의 이러한 가증스러운 행태는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켜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그를 낮추어 겸손하게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도록 깨우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하28:17-19) 이는 에돔 사람이 다시 와서 유다를 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았음이며 블레셋 사람도 유다의 평지와 남방 성읍들을 침노하여 벧세메스와 아얄론과 그데롯과 소고와 그 동네와 딤나와 그 동네와 김소와 그 동네를 취하고 거기 거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를 징계하는 채찍으로 북 이스라엘과 아람이 동맹하여 남 유다 왕국을 침략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르신이 이끄는 아람 군대는 요르단 동편을 지나 남쪽 항구 도시 엘랏을 탈취하는데 성공했고, 베가가 이끄는 북 이스라엘 군대는 직접 유다 심장부를 공격해서 예루살렘 북쪽 지역에서 하루 동안에 왕자를 비롯하여 총리 대신 등 주요 장관들과 유다 군 용사 12만명을 죽이고 20만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대하28:5-8) 그러므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람 왕의 손에 붙이시매 저희가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붙이시매 저가 쳐서 크게 살륙하였으니 이는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유다에서 하루 동안에 용사 십 이만명을 죽였으며 에브라임의 용사 시그리는 왕의 아들 마아세야와 궁내대신 아스리감과 총리대신 엘가나를 죽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중에서 그 아내와 자녀 합하여 이십만명을 사로잡고 그 재물을 많이 노략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가니

이같은 사실은 매우 심각한 타격으로 전투력을 거의 상실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전황 속에 아람과 북 이스라엘 동맹군은 남 유다의 마지막 보루인 예루살렘 공격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임박한 동맹군의 최후 공격에 다급해진 아하스 왕은 앗수르 왕에게 원병을 요청합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아하스 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7:4-8) 너는 조심하며 침묵을 지키고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아라. 아람 동맹군이 아무리 분노할지라도 그들은 타다 남은 두 나무 막대기에 불과하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아하스 왕을 폐위시키고 꼭두각시 괴뢰 정권을 세우고자 하고 있다.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네가 내 말을 믿지 않으면 너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파죽지세로 공격해오는 동맹군들이 아무리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지만 이들은 하나님 앞에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에 그루터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부지깽이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작대기입니다. 불을 지피기 위해 부지깽이에 불이 붙어 있을 때는 그 불꽃이 맹렬합니다. 하지만 불을 다 지핀 다음 부지깽이는 이내 발로 밟아 그 불을 꺼버립니다. 잠시 연기만 나다 꺼져버립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두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 이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합니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 같지만 곧 꺼져 버릴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스 왕 너는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 

‘아람의 수도는 다메섹일뿐, 예루살렘이 아니다. 아람 왕 르신의 통치는 오직 다메섹에 국한될 뿐, 예루살렘에 미칠 수는 없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가에 약속한 축복들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그같은 일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예루살렘을 넘보는 그들은 65년 안에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이렇게 확실하게 지켜 보호하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은 여전히 그 마음이 앗수르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아하스의 마음과 생각을 익히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안타까운 마음과 인내심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절입니다. 만일 네가 내 말을 확인하고 싶으면 표적을 구하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무엇이든지 좋다.

만일 선지자의 말이 의심스럽다면 이적적인 증거를 아무 것이나 구하라, 그래서 확실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하스 왕에게 주어진 최후의 기회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아하스가 믿음으로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믿음을 심기위해 하나님께 아무 징조라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믿음이 잘 생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현실과는 너무 다른 약속을 받았을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소심한 기드온이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랬습니다. 미디안의 약탈이 두려워 숨어서 타작하는 자신을 구원자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양털뭉치로 하나님께 징조를 구했습니다. 사사기 6:36-40입니다.

(삿6:36-40) 그때 기드온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만일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나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시면 그 사실을 나에게 증명해 주십시오. 내가 오늘 밤 타작 마당에 양털 한 뭉치를 놓아 두겠습니다. 만일 아침에 이슬이 양털에만 내려 있고 그 밖의 모든 땅은 말라 있으면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내가 알겠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한 그대로 되었습니다. 기드온이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 양털 뭉치를 짰을 때 물이 한 그릇 가득 나왔습니다. 그때 기드온은 다시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노하지 마십시오. 양털로 한 번만 더 확인하게 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양털만 말라 있고 그 밖의 모든 땅에는 이슬이 내리게 하소서.’ 그래서 그 날 밤 하나님이 그대로 하셨는데 양털만 말라 있었고 모든 땅은 이슬로 젖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 한번으로도 부족해 두 번씩이나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번이나 응답하셔서 기드온이 믿음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징조를 보고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삼백명의 군대로 수십만의 미디안 군대를 격파하는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보통은 믿음을 얻고자 하나님께 징조를 보여주시도록 구하는 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징조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하스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신6:16)는 말씀을 내세워 자신의 불신앙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말은 잘했습니다.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자 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고자 했습니다. 자기 생각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하스 왕은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겼습니다. 당시 앗수르 왕은(디글랏 빌레셀) 영토 확장 정책을 재개하여 주변 팔레스틴 군소 국가들을 차례차례 정복해서 대제국을 이루었고, 그 세력이 계속 뻗어나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국제 정세로 볼 때, 아하스 왕은 앗수르와 동맹을 맺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하스 왕은 하나님 말씀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으려는 의도에서 ‘아닙니다. 나는 주를 시험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때 이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13-14절입니다. 
다윗의 후손들아, 들어라. 너희가 사람을 괴롭힌 것도 부족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려 하느냐?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직접 너희에게 표적을 주실 것이다.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이적을 통해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친히 함께 하시겠다는 축복을 약속하심에도 아하스는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예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완악하고 강퍅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믿음을 심고 살리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사정하다시피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바로 남 유다 왕국이 다윗 왕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들아, 들어라. 너희가 사람을 괴롭힌 것도 부족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려 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9-16)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의 후손가운데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쇠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다윗에게 주신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아하스가 불신가운데 있고 회개할 기미도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언약은 성취됩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조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말입니다. 이 징조는 예수님께서 처녀인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심으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임마누엘 징조’의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다윗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곧 ‘임마누엘’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형 에서의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의 명분, 장자 축복을 사취한 야곱이 형을 피해 밧단 아람 외삼촌 집으로 도피합니다. 외삼촌 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었습니다. 외롭고 두려운 도피길에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 되어 돌멩이 하나를 베개삼아 피곤한 몸을 뉘어봅니다. 이내 곤하여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끝이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 하나가 땅에 서 있고 그 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너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 동서남북으로 사방 흩어져 살 것이며 세상의 모든 민족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며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행할 때까지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몹시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셨는데도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다니! 정말 두려운 곳이구나. 이 곳은 바로 하나님의 집이며 하늘의 문이다.’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가 베었던 돌을 기념비로 세워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 ‘벧엘’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야곱이 외삼촌 집에 들어가 무려 20년 동안 일했지만 품삯을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외삼촌 라반이 엄청난 복을 받았음에도(창30:27,30) 번번히 무려 10번씩이나 품삯을 속여가며 일을 시키고(창31:7) 임금을 착취한 것입니다. 

(창31:40-41)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번이나 변역하셨으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축복을 약속하신 바가 있기 때문에 야곱의 외삼촌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책망하셔서 밀린 임금은 물론 거부가 되게 해서 고향으로 금의환향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이를 야곱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1:42입니다. 

(창31: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시지 아니하셨다면 20년 노동의 대가(代價)를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빈털터리로 낙향할 뻔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며, 세상의 모든 민족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신대로 함께 하셔서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평생에 당할 자가 없는 복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디로 가든 형통한 자가 됩니다. 여호수아 1:5-9을 보겠습니다.

(수1:5-9)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성탄,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일방적으로 온 인류와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징조(Sign)입니다. 

2008년 성탄절을 맞아 우리와 함께 하시기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마음에 영접하고 믿는 신앙생활로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어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형통한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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