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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한 아기가 인류에게 주는 소망 (사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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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기가 인류에게 주는 소망 (사 9:1~7)


키에르케고르의 글에 왕과 시골 처녀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어느 날  왕궁을 떠나 민정 시찰을 했습니다. 이곳저곳 동네를 순회하다가 한 시골 아가씨를 만났는데, 그 아가씨가 그렇게 맑고 아름다웠습니다. 왕은 때 묻지 않은 그 시골 처녀에게 반해버렸습니다. 왕궁에 돌아와도 그 처녀의 생각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랑하는 신복에게 고백합니다. 
“아무래도 그 시골 처녀를 왕궁에 데리고 와서 결혼해야 할까봐.” 

그러자 신하는 왕의 말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그 시골 처녀는 신분이 천하기 때문에 왕궁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또 고민했어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내가 가서 그 시골처녀와 결혼해서 데려오면 되지.” 

그랬더니 또 신하가 반대합니다. 
“왕은 지체가 높으신데 의전 상도 그렇고, 경호도 그렇고 시골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올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안 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왕이 이리저리 고민하다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어요. 
“그러면 좋다! 내가 이렇게 하겠다. 내가 왕관을 벗어버리고 평민이 되어서 그 시골 처녀를 찾아가 결혼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지체 높은 왕이 왕관을 던져버리고 평민의 옷을 입고 시골처녀와의 사랑을 성사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광스러운 보좌를 던져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찾아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의 이야기입니다. 베들레헴 말구유 그 냄새나는 곳에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절인 것입니다. 

이제 2008년 성탄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의 자세와 준비를 가지고 성탄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지혜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9장의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기 전 700년 전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아직 오시기 않은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의 절망과 흑암의 삶을 우리에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오늘 본문 1~2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인간들은 흑암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강자의 압제 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어서 수많은 사람이 피 흘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이 흑암 가운데 한 빛이 오셨습니다.

2절에 보니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빛이 누구십니까? 바로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생명의 빛으로 소망의 빛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바로 빛이십니다.

디모데전서 1장 1절에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소망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7절에는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절망적인 이 땅에 소망 되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류의 역사는 새로운 희망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바로 소망의 시작입니다. 그 분을 만나기 전에 그 분이 오기 전에 사람들은 절망 가운데에 살아갔습니다. 의미도 없이 목표도 없이 인생에 나락 가운데 떨어지고 있었지만 이제 빛 되신 그 분을 영접하는 자들마다 새로운 삶의 의미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 분은 세상에 소망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진정 이 땅에 소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우리는 이렇게 되물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는데 왜 아직도 이 땅에는 암흑이 캄캄하게 우리를 덮고 있을까요? 그 분이 평화의 주로 오셨는데 왜 아직도 이 땅에 평화가 온전히 임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사명입니다. 이제 우리가 진정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작은 제자가 되어서 그 분의 삶과 인격을 우리가 실천해 나가야 될 것입니다.

진정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 이 땅에 소망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우리가 낮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그 분이 스스로 낮아지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하늘의 영광된 보좌를 버리시고 냄새나는 말구유로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무슨 형체를 가졌다고 합니까? 종의 형체. 그 분은 하나님의 영광된 형체를 버리시고 종의 모습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이 낮아지셨다면 우리도 낮아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한 단계, 두 단계 낮아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진정 정의와 공의의 나라를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낮아진 것처럼 우리가 낮아질 때, 이 인류에게는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재미 칼럼리스트인 최요섭 목사님의 글에 주님의 나라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항상 날씨가 청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곳에는 변덕쟁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 곳은 조미료가 필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소금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경쟁과 싸움이 없으며 오직 칭찬과 사랑만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천국행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없는 7종류의 사람이 있다. 교만한 사람, 욕심쟁이, 남을 헐뜯는 사람, 화를 잘 내는 사람, 거짓말쟁이, 이기적인 사람, 화합을 깨드리는 사람은 천국행 비자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첫 번째가 바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배척하시고 겸손한 자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탄은 바로 겸손의 계절입니다. 겸손을 훈련하는 계절입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셔서 소외되고 절망에 빠진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리에서 더 낮아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을 성지순례로 다녀온 분들이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한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 탄생 기념교회가 있는데, 그 예수 탄생 기념 교회에 들어가는 문이 아주 작습니다. 제 키보다도 훨씬 작습니다. 아주 조그맣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 군인들이 말을 타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문을 작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이드가 설명합니다. “이 문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는 문입니다. 누구보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모두가 허리를 구부리고, 조아리고 들어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문은 겸손의 문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더 겸손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겸손을 배울 때, 이 땅에 진정한 평화와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가만히 보니까 아빠하고 엄마하고 무슨 문제 때문에 가끔 논쟁할 때가 있는데 늘 아빠가 지는 것 같고, 엄마가 늘 이깁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빠를 격려하려고 “아빠! 힘내세요. 제가 있잖아요 이제 우리 가정의 전권을 아버지께서 잡으세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예야, 이놈아. 내가 엄마한테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두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져 주는 것이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갔더니 마침 선생님이 동물의 세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얘들아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강한 동물이 무엇인지 아니?”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예 사자입니다.” 
또 물었어요, 그러면 “어떤 종류의 사자가 가장 강할까?” 
아들은 거침없이 대답했어요, “암사자가 제일 강합니다.” 
“수사자도 있는데 왜 암사자가 제일 강하지?” 아들은 또 말했습니다. 
“동물계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조금 더 낮아질 수 있다면 우리가정에 평화가 올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우리는 낮아지는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한 잡지에 실린 ‘우물 파는 사나이’라는 기사가 있어서 읽어보았습니다. ‘우물 파는 사나이’는 금년 서른 네 살인 최인혁 선교사입니다. 그는 연세대학교 지구 시스템 과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지하수학을 전공한 엘리트였습니다. 그런데 4학년 때, 선교사로 헌신하기를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ROTC 복무를 끝내고 1998년 1년 동안 아프리카 여러 지역을 순방했습니다. 

아프리카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가장 가슴 아프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물을 마실 수가 없습니다. 아프리카는 물이 없습니다. 그리고 물도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인들이 태어나면 빨리 죽고, 병에 쉽게 걸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도 오염되고 식수가 개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고 그는 선교사로 2006년 케냐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우물을 파는데 쉰 한 개의 우물을 팠습니다. 12만 명이 마음껏 물을 마실 수 있는 축복을 선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사회에서 얼마든지 대접받고 살아갈 수 있는 엘리트였지만 그는 스스로 낮아져서 아프리카 인들을 위해서 우물 파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물 하나를 파는데 한 300만원~500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그 우물 하나면 한 동네 사람들이 마음껏 물을 마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불평할 게 없습니다. 우리는 한강 물을 마음대로 물을 마실 수 있잖아요. 이렇게 축복된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아프리카 사람들은 물 한 방울을 구하기 위해 1시간이 넘게 걸어가야 됩니다. 식수를 구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조금 더 낮아질 수 때, 이 세상에는 소망이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번 성탄절에 교우들이 낮아지는 훈련을 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진정 아기 예수가 우리 인류의 소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 자! 우리 성경 4절 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니다.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기 전에 이 땅은 전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로 힘 있는 자들은 연약한 자들을 억압하고 그들을 짓눌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진정 이 땅에 평화의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6절에도 그를 평화의 왕, 평강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 보면 “그는 화평이 있은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그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나와있습니다. 

또 16절에 보니까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의 담벼락을 그분은 스스로 재물이 되심으로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사이인 이방인과 유대인의 막힌 담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십자가의 재물이 되심으로 진정한 평화를 선물해주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우리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에 보니까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진정한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살리려면 여러분들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이 사회에서 우리 가정에서 직장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피스메이커’가 있고 ‘트러블 메이커’가 있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진정 한 사람 한사람이 평화를 만들지 않는다면 진정한 성탄의 뜻은 이 땅에 실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방송을 통해서 ‘윤동윤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재미교포입니다. 나이는 37살입니다. 그분은 어느 날 아침을 먹고 출근을 했는데 잠시 후에 훈련 중인 미국 전투기가 이 샌디에이고 주변 인근 주택가에 떨어졌습니다. 바로 자기 집에 떨어진 것입니다. 평화로운 그 가정에 큰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아내와 두 딸과 장모가 졸지에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루아침에 온 가족을 잃어버렸다면 여러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너무나 슬프고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니, 비행기를 몰고 온 조종사가 너무나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보도에 의하면 그 조종사는 전투기가 추락하기 전에 탈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윤동윤씨는 그 가족의 장례를 그가 출석하는 샌디에이고 한인감리교에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조종사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도 아마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저는 이미 이 조종사를 다 용서했습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는 오히려 그의 가족을 다 몰살시킨 조종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전국 각지에서 오인 성금들을 한 푼도 받지 않고 자기 아내가 평소에 도와주던 한 복지 기관에 그 성금을 다 희사해버렸습니다. 참으로 그는 진정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원망을 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 사랑과 용서를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평화를 만들어갈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전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평화를 실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노벨상 상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분이 미국에 갔더니 자기 교회에 출석하는 교수가 있는데 그는 차를 마시면서 이런 질문을 하더랍니다. “당신 혹시 노벨상에는 많은 상의 종류가 있는데, 노벨평화상, 노벨문학상, 노벨과학상, 등 많이 있는데 그런데 그 중에 노벨 수학 상만 없는 이유를 아십니까?” 

여러분은 혹시 아십니까? “노벨상에는 왜 수학 상이 없을까? 글쎄 나도 모르겠다.”고 답했더니 그 미국인 교수가 이렇게 대답해주더랍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는데 노벨에게 부인이 있었는데 그 부인이 바람이 났답니다. 누구하고 바람이 났을까요? 바로 수학선생님과 바람이 났답니다. 노벨은 그것만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가 죽을 때 유언으로 노벨상은 모든 부분에 다 주되 노벨 수학 상만은 주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답니다.”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노벨 수학 상이 지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서로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까?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다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진정 성탄은 내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그리스도를 성탄의 주인으로 내 마음에 임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옆의 분들과 이렇게 인사합시다. “저는 무조건 다 용서합니다.” 여러분들이 옆의 분들과 원한이 있는 것은 없지만 다 용서하세요. 그가 누구이든지요. 그가 누구이든지 그렇게 진정 성탄의 의미가 여러분에게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어제 한 10시경 무심코 뉴스를 보다가 본 광경입니다. 어느 방송에서 송년 다큐멘터리가 나오는데 제목이 ‘입양인 뿌리 찾기’였습니다. 입양아의 첫 모국여행이라는 부재가 달려 있었습니다. 가정이 너무 어려워서 외국인에게 입양된 42명의 입양아들이 성장해서 자기 부모를 찾기 위해서, 뿌리를 찾기 위해 고국을 방문한 것입니다. 

방송 기자가 그들과 밀착 취재하면서 3일 동안 찍은 방송이었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이제 가족을 상봉할 시간이 되었을 때, 막 가슴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어떤 심정이십니까?” “묻지 마세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20년 동안 그 부모를 얼마나 생각하면서 살았을까요? 이제 그는 부모를 찾는 순간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만나는 순간 모두다 통곡을 합니다. 

엄마의 첫마디가 “딸아! 미안하다. 내가 정말 죄인이야. 너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어. 남편이 병들었고 아이들이 너무 많고 해서 이웃의 권유로 너를 입양 보냈는데, 내가 이제야 내 마음의 막힌 곳이 뚫린 기분이야. 내가 죄인이야.” 

그러면 딸이나 아들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너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었다는 내가 어떻게 이 땅에 존재할 수가 있었겠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잘 생긴 딸로, 잘 생긴 아들로 낳아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한결같이 감사를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바로 평화가 있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그 곳에 진정한 성탄의 평화가, 축복이 임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 사랑하지 못한다면, 진정 용서하지 못한다면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셔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정 아기 예수가 우리 인류의 소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절망한 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병든 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죄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는 사랑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자가 되셨습니다. 말로만 사랑하지 않고 스스로 십자가의 재물이 되심으로, 붉은 피를 흘리심으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씻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사랑의 실천자이셨습니다.

어느 날 한 랍비, 율법사가 물었습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말합니다. “먼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지 못할 때 우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탄은 사랑의 절기입니다. 저는 이번 성탄절에 여러분이 우리 이웃과 작은 사랑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성탄의 선물로 우리에게 오셨다면, 여러분이 이제 선물이 되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성탄절을 보내면서 우리 이웃에게, 소외된 분들에게, 내가 길에서 만나는 분들에게, 아니면 지하철 계단 밑에 좌판을 펴고 있는 분들에게 작은 선물을 드리면 어떨까요? 이것이 성탄을 맞는 내 마음이라고, 1,000원짜리 선물도 괜찮고, 작은 카드 한 장도 괜찮고, 3,000원짜리 선물도 괜찮습니다.

물질이 필요한 분에게는 작은 물질을, 양식이 필요한 분에게는 작은 양식을, 사랑이 필요한 분에게는 사랑과 위로를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성탄의 모습이 아닐까요? 여러분이나 저나 이번 성탄을 혼자 보내시지 마시고 이번 성탄에 꼭 뭔가를 나눌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아이들은 성탄이 되면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나눠 주시는 분이 되셔야 되요. 여러분이 바로 작은 예수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성탄은 인류의 소망이 되고 평화의 계절이 될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이야기입니다. 장애인인 한 노점상이 좌판을 깔고 빵을 듬뿍 쌓아 놓고 팔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단속반원이 와서 단속을 시작했습니다.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만 넘어지는 바람에 좌판을 다 엎어 버렸습니다. 그 많은 빵들이 다 떨어져서 흙이 묻어버렸습니다. 지나가던 한 신사가 그것을 보고서 달려왔습니다. 봉투를 들고 떨어진 빵들을 주워 담았습니다. 그리고 빵 값을 치렀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것을 감동을 받았습니다. 너도나도 흙 묻은 빵을 털어서 봉투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치렀습니다. 순식간에 그 좌판에 있던 빵은 다 팔려버렸습니다. 이제 단속반원하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의 모습이요,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가 지금 경제위기를 당해서 모두가 힘들어합니다. 여러분의 지갑에도 돈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내일을 걱정하고 염려하시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살린다면 여러분이 없는 가운데서도, 부족한 가운데서도 작은 것이라도 여러분의 이웃과 한번 나눠보지 않겠습니까? 나보다도 어려운 사람들, 더 소외된 사람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서 여러분의 작은 것을 이웃과 한 번 나눠보지 않겠습니까? 선물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선물을 주는 사람이 되어보시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진정한 성탄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 교회 성도들은 참된 성탄절로 어떻게 보내야할까요? 예수님과 함께, 거룩함과 함께, 조용함과 함께, 그리고 이웃과 함께, 가족과 함께 성탄을 보내셨으면 합니다. 한국말을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영어로 한 번 말하겠습니다. 
‘with Jesus, with Holiness, with Silence, with Family, with Neighbor’ 

가족과 함께 이웃과 함께, 예수와 함께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런 성탄이 됩시다. 흥청망청 보내는 성탄이 아니라 정말 내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그리고 가족과 함께 평화롭고 단란한 교제의 시간을 가지면서, 우리 이웃에게 아름답고 따듯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훈훈한 성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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