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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빛나는 영광, 그리스도 (눅 2: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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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영광, 그리스도 (눅 2:29~32)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눅 2:29-32) 


Ⅰ. 본문해설 

오늘 말씀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사람은 아기 예수를 만나고 있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아기 예수를 본 사람은 아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에서 만난 첫 번째 인물이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는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그림자인 성전과 그 실체인 그리스도 예수가 절묘하게 만나는 데서 그분을 뵈었을 뿐 아니라 가슴에 품고 대면할 수 있는 영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마음을 드려 그리스도께 오늘 말씀과 같이 찬송하고 있습니다. 


Ⅱ. 빛이요 영광이신 그리스도 

첫 번째는 그는 그리스도를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에 담겨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의 의미를 살피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A. 이방의 빛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즉시 두 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는 구원의 약속이었고 또 하나는 제사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둘 다 메시아를 통한 구원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방법은 가르쳐주시지 않았지만 메시아가 오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잃어버렸던 영광과 생명과 진리를 다시 찾도록 만들어주는 구속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계시를 주셨습니다.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메시아에 대한 사상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여 후손들에게까지 대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제사의 제도 속에도 그렇습니다. 인간들은 짐승이 자기 죄를 대신해 죽어가고 그 죽음과 희생을 통해 잠깐의 영적인 은혜와 생명 공급받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사를 통해서도 잠시가 아니라 영원히 그 막힌 담을 무너뜨릴 메시아의 오심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이 땅의 모든 나라와 온 백성들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창조의 목적대로 살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원하셨기에 자기 아들을 사람의 옷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오실 때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빛’은 성경 전체 사상에 비추어볼 때 진리의 빛을 말합니다. 

그 분이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엄청난 문명과 기술의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창조목적을 이해하는 인간의 본분으로 돌아가는 일에서는 어둠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우리처럼 인간들은 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진노의 자식들일 뿐이었습니다. 또한 죄의 법에 묶여 있던 종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아는 모든 이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요 8:32).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의 말씀대로 진리가 예수님인 것을 알게 하셨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진노의 자녀이던 신분에서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고 죄와 사망의 사슬들은 벗겨져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영혼이 해방되었습니다. 이 모든 역사는 진리의 빛이 우리에게 한 일입니다. 그 때 우리가 어마어마한 것들을 이해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를 만났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 만남이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진리에 대해 가르쳐주기 위해 오신 교사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가르치신 것, 사신 삶과 성품에 대한 지식까지도 빛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때는 이방인 이였지만 우리에게 누군가가 이 그리스도 예수의 빛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선교의 소명으로 부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빛의 가치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코끝에 호흡이 남아 있는 한 빛으로부터 소외되어 어둠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 빛을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이 위대한 선교적인 전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온 땅과 만민들에게 전해질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이 훨씬 큰 것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영광’보다 ‘이방의 빛’에 대해 먼저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B. 이스라엘의 영광 

이어서 이런 이방의 빛이 이스라엘의 영광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성육신의 맥락에서 시므온은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그 많은 나라 중에서 하필 이스라엘에 대해서만 성경이 중요하게 이야기 하는가에 대해 묻고는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는 이스라엘 보다 위대한 나라가 많이 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에 우리 인류를 구속하실 계시를 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의 해석 속에 묻어 있는 지식들입니다. 그 지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인류의 구원을 알려주는 유일한 지식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수단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가문을 확장시켜서 만드신 나라입니다. 맨 처음에는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나중에는 가정, 가족,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와 나라에 대한 구속의 전망의 지식들을 그곳에 담으셨습니다. 그 속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하는지가 담겨져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구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림자로 남겨주셨던 메시아에 대한 대망, 제사 속에 표상되었던 메시아에 대한 전망, 성전의 완성으로서의 구속, 가나안 땅을 안식처로 삼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교회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화와 안식, 마지막에는 천상에 나라에서의 영원한 안식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그림자들은 하나의 실체를 향해 줄달음쳐 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시므온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 예수’였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충분히 자기의 소임을 다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전에는 육적 이스라엘의 수많은 역사들이 줄달음쳐 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스라엘은 삼킨 바 되어 더 이상의 영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그 분을 씨앗으로 다시 새로운 이스라엘이 확대되어 나가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이고 이 백성들이 영적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시므온이 바라보았던 이스라엘의 영광은 바로 ‘신약 그리스도의 교회’를 전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교회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영광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이 교회 앞에 나아와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그리스도가 우주의 통치자임을 알고 무릎 꿇게 만드는 힘입니다. 이 놀라운 힘이 그리스도로 인한 것임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소유한 교회마다 귀중한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에 있을 때 교회는 이방의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영광이라면 도대체 어떤 교회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겠으며 모두 계시다면 영광에서는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그 답은 이렇습니다. 우선 첫째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은 우주적이고 보편교회의 머리되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접붙여진 신실한 신자의 영적인 연합의 머리가 되십니다. 이것으로 예수는 그 생명과 은혜를 지체들에게 흘려보내심으로 영적인 통일체를 이루게 하시고 당신의 교회들을 친히 한 질서로 통치하심으로 그분의 머리되심을 드러냅니다. 

또한 하나님은 온갖 은사를 내려 보내심으로 지체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드십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예수가 머리가 되신다면 보이는 작은 교회 안에서도 그것이 보이도록 드러내십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통치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은혜의 통치가 입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요, 의도인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합니다. 어떤 교회도 소외되지 않습니다. 마치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성령 충만하지 않을 때도 지체이며, 심지어 불순종하고, 배교에 가까운 죄를 지을 때에도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신 것과 같습니다. 그는 예수를 버릴지라도 예수는 그를 버리시지 않는 언약에 충실하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된 것을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은혜와 신자의 불순종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은혜의 부패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한때는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내가 게으르고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에 의해 오염되고 부패해서 은혜가 사라지는 사람으로 발견되는 ‘영혼의 침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음식물과 같아서 순결하게 분여 받았는데 곰팡이와 같은 죄가 부착되어 순결한 은혜를 썩게 만들면서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상태가 은혜의 부패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진리를 심각하게 오해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의 힘은 매우 미약하고 죄의 힘은 매우 위대하다고 말해야만 할 것입니다. 죄의 힘이 강합니까? 은혜의 힘이 강합니까? 사망의 능력은 생명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부활의 능력을 노래하는 가운데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일의 신자의 삶 속에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가슴 깊이 새겨야만 합니다. 아무리 죄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보다 은혜의 힘이 위대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올바른 설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와 불순종이 은혜를 부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마음으로 죄를 짓고 그 마음의 발현으로 행동이 나타나면 그 만큼 하나님이 신자 안에 은혜를 철수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죄가 은혜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죄를 보신 하나님이 공정한 판단으로 분량만큼 거두시는 것입니다. 맨 처음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상태를 생각해보십시오. 온 세계는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천체로부터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름다운 연결을 이루고 있었고 그 연결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로 통일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골로새서에서 만물의 충만함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간 안에도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의 연결 안에서 진리와 의와 거룩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 범죄가 이 모든 창조의 어마어마한 영광을 파괴한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맺은 아담이 그렇게 범죄한 것을 보고 주권적으로 모든 창조세계에 있는 영광과 의와 거룩함과 진리를 거두어버리신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처럼 어떠한 병든 교회도 그리스도가 머리이십니다. 그것은 불변합니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는 충만히 여러분들 안에 계셔서 온전히 실제적인 삶 안에서 머리되실 수도 있고 명목상으로만 머리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광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게 다스림을 받아 실제적인 마음과 삶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머리이시고 주인이시며 통치주이심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그리스도 교회의 참된 번영입니다. 곧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충만하게 지니는 것이고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친히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Ⅲ. 주의 구원을 바라던 사람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자신을 표상하는 성전과 실체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만나는 절묘한 순간에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찬송하게 된 특권을 누린 이 시므온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는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은혜, 성령, 죄에 대한 인간관계는 모두 정신과 영혼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의 집중으로는 얻기 힘든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푸시지만 당신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 집중이야말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거룩함과 경건의 최상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데 마음은 다른 데 가있는 삯꾼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삯꾼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선한 목자의 마음은 양에 있지만 삯꾼의 마음은 품삯에 있는 것처럼 외양은 같으나 단지 마음이 그곳에 집중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의 섬김 속에서 갈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삯꾼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의 구원을 보기를 갈망했던 경건한 사람 시므온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겠다는 진정한 사모함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성도가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음이 주님을 뵙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집중된 심령을 가장 고상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 온전히 집중된 마음을 당신이 오르실 보좌라고 생각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보실 때 주권적으로 은혜를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칼빈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이 시므온이 겨우 어린 아이인 예수를 품에 안고 이렇게 기뻐하고 감격할 수 있었다면 그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보고 이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을 본 우리들은 얼마나 더 감격하고 기뻐해야 합니까?” 


Ⅳ. 예수께 매인 사람 

마지막으로 시므온은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는 성령으로부터 주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유로 이것 하나에 매여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뵙고 그분의 영광을 알게 될 영광을 대망하며 먹고 마시는 모든 이유가 그리스도가 되도록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 매인 것이었습니다. 

그가 바라보면서도 즐거워하고 아직 오지도 않은 아기 예수께 매여서 일평생을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다면 이미 오셔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사랑의 증거를 받은 우리들은 얼마나 더 예수님께 매여 있어야 할까요? 그러므로 우리의 의무도 예수께 매여있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우리가 매여 있을 곳은 엇습니다. 그 매임을 붙잡고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며 그분을 생각하며 섬기는 것, 그 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로 신자가 살아야할 삶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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