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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과 염소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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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염소 (마 25:31~46)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세계적인 명의라 할지라도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의사는 없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아우성이지만 죽음은 부요한 사람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공평하게 찾아 온다. 

인생에 대하여 무책임한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소망을 가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한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모이면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중에,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무심코 의미 없이 고백하는 경우가 많다. 

성탄절을 앞두고 분위가 들떠 있는데 오늘날 크리스마스 씨즌은 상업주의의 영향으로 예수가 없는 성탄절이 되고 말았다. 단지 즐기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성탄절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관심할 때 주님께서 두 번째로 나타나시게 되는데 그때는 구원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자로 오신다는 것이다. 

처음 예수께서 오실 때의 모습은 정겹기 짝이 없다.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 그것만으로 가난하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분은 이 땅구세주로 오셨으나 당시의 정권자들과 종교인들에게 많은 조롱과 고난을 당하셨고, 결국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러나 그분이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신 동안 사람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며 섬김이 무엇인가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의 낮아지심을 통해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당한 자 죄인들이 예수님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예수, 그는 어떤 모습으로 오시며, 무엇을 위해 오시는가?

(마 25:31-3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실 때 그 때 모든 사람들이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처음 이 땅에 오실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모습에 두려워 떨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이 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단 한 사람도 빠짐 없이 그의 보좌 앞에 심판을 받기 위해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처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으로 나누는 심판을 하실 것이다.

나는 양과 염소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양을 실제로 보긴 했지만 팔레스틴 지역에서 기르는 양은 염소와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덩치도 비슷하고, 색깔도 비슷하다. 그러나 성격적인 면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양의 대표적인 특성은 순하다는 것이다. 

예)‘순’자 들어가는 여성들이 많다. - 영순, 양순, 미순, 희순, 복순, 의순, 명순, 정순, 애순, 두순, 연순... 묘순.. 대체적으로 순하나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양은 정말 순하다고 한다. 특별히 털을 깎을 때 굉장히 고통스러운데도 신음소리 한 마디 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꼭 무리를 지어서 다닌다고 한다. 반면에 염소는 공격적이고, 사납고 성격이 급해서 참지 못하고 혼자 높은 곳에 기어오르는 것을 좋아 한다고 한다. 예)어린 시절 검은 염소를 끌고 가는 농부의 모습.

유대 지역에서는 양을 잘 치기 위해 양무리 속에 염소를 섞어 논다고 한다. 염소가 양무리 속에 섞여 있으면 이리 저리 들이 받고 헤집고 다녀서 양들이 정신을 차리고 잘 움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도 보면 양같이 온순한 신자들이 대부분이지만 때때로 염소 기질을 가진 신자들이 있어서 정신차리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염소라고 하지 않았다.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해가 지게 되면 양무리를 이끌고 마을로 돌아오게 되는데 우리 속에 들여 보낼 때는 양과 염소를 분리시키게 된다. 이때 목자는 조금의 실수도 없이 정확하게 양과 염소를 나누게 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이뤄질 심판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나누는 것과 같은 분리가 있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단 한 마리의 실수도 없이 정확하게 심판이 이워진다는 것이다. 자 그럼, 그 심판은 어떤 순서로 어떻게 진행이 되는가? 


1.창세로부터 예비된 축복의 나라를 상속할 자부터 골라내신다.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창세로부터 예비된 축복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먼저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진실한 고백을 한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른다. 그 말은 이제부터 나는 나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다는 뜻이다. 그들은 자신의 입으로 고백한 증거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실제로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양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염소였고, 이리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그저 주는 사랑을 받아 들인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는 순간 그들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뽑혔다. 그리스도의 피로 그의 죄와 허물이 깨끗이 씼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목자가 되었고, 그들은 양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떤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들에게 양같은 특징적인 모습들이 나타난다. 

1)미련하고 둔하다는 것이다. 
양은 순하지만 미련하고 둔하다. 그들은 능력이 없어서 목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개인플레이를 하지 않는다. 항상 목자에게 순종적이다. 양 같은 신자들은 세상에 대하여 미련하고 둔한 사람들이다. 약지 못해서 항상 손해보는 사람들이다.

2)공격적이지 않다. 
양들에게는 공격 무기가 없다. 그들에게는 날카로운 이빨도, 발톱도 없다. 받히면 나가 자빠져서 혼자서는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염소들에게 의해 항상 들이 받혀서 피해를 입고 산다. 얻어 맞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살기 위해 죽자 사자 목자되신 예수에게로만 달려 간다.

3)자기 욕심대로 살지 못한다. 
그들은 뜯을 풀이 없으면 굶는다. 훔치거나 남의 것을 빼앗을 줄도 모른다. 육의 양식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버티며 산다. 그러나 그들은 영의 양식이 없으면 못사는 사람들이다. 굶더라도 돈 벌기 위해 주일날 가게 문을 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4:4의 말씀을 알고 있다. 

4)그들은 자신보다는 교회와 지체들을 먼저 생각한다.
양들이 안심하고 쉴 수 있는 곳은 그들의 집인 양우리이다. 마찬가지로 양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각박한 세상에서 참된 위로와 쉼이 있는 곳이 교회라는 사실을 알기에 교회를 아끼고 사랑한다. 양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을 때 쉼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참된 신자들의 쉼터는 교회당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약한 지체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다른 지체들이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돌보아 준다. 심판의 날에 심판장이 이렇게 말한다.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우리가 그렇게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행에 대하여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 것 처럼 그들의 선행을 기억조차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 받고 상 받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죄악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주님 처럼 살고 싶어서 섬겼기 때문에 기억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면 그들의 선행이 너무 작은 것, 소자에게 물 한그릇 대접한 정도로 미미한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까지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예비하신 나라, 영원한 위로와 기쁨과 영광이 있는 나라는 양과 같이 겸손히 섬긴 신실한 신자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심판장되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양 같은 신자들을 골라내어 복되고 영광스러운 나라로 인도해 가신다.


2.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한 영영한 불에 들어갈 자에 대한 심판.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그곳은 조그만 위로도 기쁨도 없는, 비참과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찬 곳, 고통과 두려움만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곳에 들어가게 되는가?

염소가 들어가게 된다. 양이 되지 못한 자들이 들어간다. 겉모양은 비슷하나 변화되지 않은 자들이 들어간다. 설령 교회당에 나와 앉아서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염소의 기질과 비슷하다. 여전히 이기적이고, 급하고, 쉽게 분노하고, 다른 사람을 들이 받고, 상처를 주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기 좋아하고 인정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놀랄 일은 자신들이 그렇게 염소와 같은 행동을 해 놓고도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25: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그들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이다. 염소 기질과 같이 다른 사람을 들이 받아서 상처를 주어 놓고도 상대방이 받혔지 내가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기를 위해서는 비싼 보험도 들고, 무공해 웰빙 식품은 가격도 묻지 않고 사먹으면서도 끼니를 잇기 어려운 사람에 대하여는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자기 몸을 위해서는 헬스한다고 하면서 병들고 외로운 사람 돌아보는 일에는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인색한 사람들이다.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사도 요한이 소개하고 있는데...

(요삼 1: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요삼 1:10)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결국은 그들은 이 땅에서 인색하고, 다투고, 욕심부리고, 으뜸되기 좋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결국 사랑도 없고, 긍휼도 없는 영영한 불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게 끝이 난다.

(마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3.보너스 -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자신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양이다. 양과 비슷한 염소가 아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는 심판의 날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영국의 성경학자, 아더 핑크가 ‘교회 안에 5가지 유형의 신자가 있다’고 했다. 
첫째, 이름뿐인 신자 - 교회 출석이 연중 행사인 사람. 
둘째, 형식적인 신자 - 교회 예배에 규칙적으로 잘 참석하고,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 암송하지만 무정란인 사람. 
셋째, 위선적인 신자 - 이리가 양의 가죽을 쓴 것처럼 자기 욕심과 목적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자.
넷째, 미혹된 신자 - 감정적으로 고백하는 신자. 삶의 열매가 없는 사람.
다섯째, 참된 신자 - 죄를 미워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주님께로 향한 나의 고백이 진실한 고백인가를 다시 한 번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은 적당주의로 신앙생활할 때가 아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2) 선한 일에 힘쓰는 성도

(약 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헤르만 리델보스, ‘선행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권리를 사지 못하지만 선행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된다.’

선행의 대상은 ‘지극히 작은 자’다. 본문에서 나타난 심판의 기준이 ‘doing' ’행위‘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 바란다. 내가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돕는다는 것은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질의 희생, 시간의 희생, 수고와 땀 흘림이 수반된다. 

나의 주변을 돌아보자. 누가 주리고 있는가? 누가 목말라 하고 있는가? 누가 나그네 되어 외로워하고 있는가? 누가 벗었는가? 누가 병들었는가? 누가 옥에 갇혔는가? 

마틴 업투란이란 군인이 추운 겨울날 누더기를 걸친 거지에게 군용 외투 찢어 반을 그 거지에 주었다. 그날 밤 꿈에 반쪽 짜리 군용외투를 입은 예수를 보았다고 한다. (척 스미스목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사랑의 밥그릇, 선교와 구제를 위한 구좌헌금 한 구좌.

3) 주의 재림을 의식하는 자세

(마 24:36-39)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날에,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 많은 사람들이 후회하게 될 것이다. 교회를 향하여 ‘개독교’라고 비난했던 사람들, 신실한 신자들을 핍박했던 사람들, 복음을 외면하며 조롱했던 사람들, 돈 벌이 하느라 바쁘다 시간 없다 핑계 댓던 사람들... 그때 그 사람들이 이구동성 하는 말, ‘그들의 말이 진실이었구나!’

여러분,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분주하고 바쁜가? 바쁘다고 바늘귀에 실을 묶어서 쓸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바늘귀에 실을 꿰어야 일이 되는 것 아닌가?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비슷하다고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양이길 원하신다. 내 남편이 양이길 원하신다. 내 아내가 양이길 원하신다. 나의 자녀들이, 나의 친구가 양이길 원하신다. 

착한 것, 순한 것, 정직한 것 가지고는 주님 맞을 수 없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올바른 신앙고백과 믿음의 선행과 깨어 있어 주님을 사모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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