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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의 표적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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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의 표적 (눅 2:1~7)


수년 전에 미국에서 라이나 화이트라는 18세 된 소년이 
    에이즈로 죽어가는 모습을 T.V와 각종 메스컴이 앞 다퉈 보도했습니다.
이 소년은 13세 때 혈루병 치료 중 에이즈에 감염되어
          5년 만에 숨을 거두는데 
이 때 이 소년의 마지막 말이 미국 국민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버지가 “네가 이렇게 빨리 가야 하다니 너무 가슴이 아프구나.”
아버지의 말을 들은 아들은 편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 그 대신 아버지는 제게 소중한 선물을 주셨어요.
  아버지는 제게 예수님을 알게 해 주셨잖아요.
  저는 예수님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인데 나는 조금 빨리 가는 것 뿐이예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선물은 예수님 만나 예수님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선물로 주신 ‘예수’ 라는 이름
           그건 사람이 지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이름입니다.  

마1:21절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

금번 성탄절을 맞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눅2:12절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라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아기 때부터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그 표적을 마음에 새기며 
    그 표적을 나타내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1.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배경을 말해 보세요(1-2절)

눅2:1절에 
[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 하였으니 ]  
예수님이 탄생하신 때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지배할 때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식민지 조세를 거두려고 인구조사를 하기 위해 
황제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본적지로 호적하라고 하니
당시 이스라엘이 포함된 팔레스틴 지방을 다스리던
     수리아 총독 구례노가 호적을 실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북쪽 나사렛에 살고 있었지만 
다윗의 혈통인 유다지파였기 때문에 
      고향 베들레헴에 정혼한 마리와와 함께 호적을 하러왔다가                  
예수님을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볼 때
단순히 로마 황제가 식민지 조세를 거둘 목적으로 인구조사를 하기 위해
       본적지로 돌아가 호적을 하라고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시는 분으로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출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행은 바로 역사의 분수령이 됩니다.
이 역사의 분수령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세계 경제가 어렵습니다만
세계 경제가 미국의 윌가의 증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경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간 이유가 무엇이며 
     이 사실이 예수님의 탄생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2.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간 이유가 무엇이며 
         이 사실이 예수님의 탄생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3-5절)

물론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요셉이 로마 황제의 명령에 따라 호적하러 본적지 베들레헴으로 갔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벌써 700여 년 전에 선지자 미가를 통해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미가5:2절의 인용으로서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대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 

바로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친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간 것은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면 로마 황제의 영이지만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구속사를 이루어 나가는데 필요하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당신의 뜻대로 돌리신다는 사실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사를 이룩하시기 위해
로마의 시저도 들어 쓰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남에 대해 
    예수님의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베들레헴은 본래 에브라다라고 불리워진 곳인데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에서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작은 시골 마을에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마2:에 보면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의 예고의 별을 보고
그 별의 인도함을 받다가도 순간적으로 왕이 태어났으면       
       예루살렘 왕궁에서 태어났겠지 하고 
       예루살렘 헤롯 궁으로 찾아간 박사들의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별을 따라 머무는 곳 
       바로 베들레헴 구유에서 예수님을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왕궁에 살기를 원하고 왕궁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은 우리를 왕궁에 있도록 하지 않으시고
       작은 마을 베들레헴 낮고 천한 구유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이 예언의 성취라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도
     믿는 자에게는 반드시 성취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정혼한 마리아와 고향 베들레헴에 호적 하러 왔을 때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3. 3절에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어 있더라는 말씀이 
                 우리의 신앙에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말합니다. 
동정녀 탄생 역시 성경에 예언된 예언의 성취 사건입니다. 

구약에 선지자 이사야가 사7:14절에
[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안티 기독교 세력들의 공격의 핵심이 바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입니다.
대표적으로 다빈치 코드가 있지요.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맙니다. 
사람들에게는 동정녀 탄생이 얼마나 이해하기 힘들고 신비적인 사건인지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7:에 보면
당시 이스라엘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이 연합을 하여
       형제 유다를 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당시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던지 사7:2절에 보면

[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 합니다.
그런 위급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어
사7:11절에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 고 하니
아하스 왕이 하는 말이
[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나이다 ] 고 합니다. 

그럴 때 이사야 선지자가
[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 하면서
[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이 유다 백성에게 보여 주시는 징조입니다.
어떤 징조입니까?
지금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아람과 이스라엘을 물리치는 것과
처녀가 아들 낳은 것 하고 어느 것이 더 어렵겠느냐?
하나님은 얼마든지 처녀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대적들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와 우리의 신앙을 붙들고 있는 신앙고백 중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라는 고백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에 어떤 문제도 문제가 될 수가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성탄의 중심 - 동정녀 탄생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성탄의 믿음이 나의 삶의 믿음으로 삶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동정녀 탄생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는 전무후무한 사건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합니다. 
동정녀 탄생은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메시야이심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우리 기독교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동정녀 탄생이 주는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유전적 부패로부터 오염되지 아니한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 장면을 누가는 
“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4. 예수님의 탄생 환경인 “첫아들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말합니까?(7절)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자주 등장하는 하나의 그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구유에 누워 계시고 주변에는 말을 포함한 몇 마리의 동물들이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그리고 목자들이 둘러서 있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런 그림을 아주 목가적인 풍경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사실은 너무나 초라한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유럽 교회에 가보면 교회의 웅장함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이 되면 교회마다 크리스마스 - 마구간이 세워지고
어머니 마리아 앞에 아기 예수님을 눕히고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는 세트가 마련됩니다.
그 셋트가 실물크기로 만들어 졌으나 교회 건물이 하도 커서
돋보여야 할 구유의 예수가
한쪽 구석 휴지통같이 너무 초라하게 놓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교인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교회란 구유 사건 위에 세워진 교회인데
어느 듯 교회가 구유 사건을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점점 더 우리의 마음 속에 부각되는 것은 
    말구유의 예수가 아니라 궁궐 안에 있는 예수요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과 쾌락의 예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만화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가장 잊혀진 남자 - 예수라는 말이 있듯이
성탄의 주인공 예수님이 없는 성탄이 세상을 요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과 <오강남>이란 교수가
서울에 있는 현암출판사에서 `예수는 없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발간하여 
근간 한국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이책이 초판 제1쇄가 발행된 몇 달 만에 13쇄가 발간 됐고 
총 45000부 정도가 팔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파문이 커지니 조금 양보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 역사적 예수는 있지만 현대교회가 가르치는 예수는 없다 ] 
이건 좀 생각해 볼 말이 아니겠습니까?

성탄은 있지만 예수가 없는 성탄
성탄은 있지만 예수의 성육신의 삶의 본이 없는 성탄
이런 면에서 예수가 없다는 도전에 할 말이 없는 교회인 것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도전과 비난을 받습니까?
그것은 오늘날 교인들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12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표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표적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록 초라한 출생 같지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예수님은

1)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1:21절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 

2) 우리의 허물과 질고를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사53:5절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동정녀 탄생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조가 되고 표적이 되신 예수님
찬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3) 만왕의 왕이 되신 분이십니다.
사9:6절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그 정사와 평강의 더 함이 무궁하다고 합니다.
즉 만사를 다스리는데는 우리와는 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아기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모든 짐을 당당하신 구세주이시며
       정사와 평강의 더 더함이 무궁하신 만왕의 왕이시라는 신앙고백이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온 세상에 이 진리를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출생의 초라함이 가장 잘 나타낸 말이 
7절 [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 는 말씀입니다. 


5.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입니까?(7절)

로마 황제의 영을 따라 요셉과 마리아도 호적하러 고향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위한 빈방이 없었습니다. 
먼 여행 길에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더군다나 마리아는 홀몸이 아닙니다.  
다급하고 절실한 상황에서 아마 이리 저리 여관 문을 두드려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빈방이 없다고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여관집 마당에 짐승들이 쉬고 있는 곳에서
      마리아는 해산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성탄 연극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말을 더듬고 좀 모자라는 아이가 여관 집 주인 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요셉과 마리아가 “빈 방 있습니까?” 물을 때
“빈 방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짧막한 대사였습니다. 
연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여관을 찾아와 묻습니다.
“빈 방 있습니까?” 
“빈 방 없습니다” 라고 말 하고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 실망하고 돌아가려는 요셉과 마리아가 너무 애처로워
“가지 마세요 우리 집에 방이 있어요 진짜 빈방이 있어요.
      우리 집으로 가요 우리 집에는 방이 있단 말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목 놓아 울었습니다.
이 날 연극은 엉망이 되어 버렸지마는 
그날 교인들은 큰 감명을 받고 기립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첫 번째 성탄절에 예수님이 누울 곳을 
         이 집 저 집 방문을 두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은 오늘도 자신이 거하실 방을 찾기 위해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계3:20절 [ 보라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서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페럴드>는 아이가 열 살이 넘었을 때 아내를 잃었습니다.
상심이 컸던 그는 아들에게 더욱 정성을 쏟아 부었지만,  
애석하게도 아들마저 병을 앓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홀로 된 피츠제럴드는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수집하여 
     그 슬픔을 잊으려 노력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도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유언에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소장품을 경매에 붙이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수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소장품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두 대단한 것들이었으므로 사려는 사람들이 예상대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예술품들은 경매 전에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림 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방의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외아들을 그린 
       < 내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제목의 보잘 것없는 그림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경매에 붙여진 것은 바로 그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은 아무도 입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 될까요? "

그는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늙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림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변호사는 경매를 중지시킨 다음 큰소리로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을 읽었습니다.
“ 누구든지 내 아들의 그림을 사는 이가 모든 소장품을 가질 것입니다. 
이 그림을 선택한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니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에게 징조요 표적이 되십니다.
예수를 내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한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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