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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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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8~20) 


오늘은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지막 대강주일입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 때 아기 예수님을 맞이한 사람들이 여럿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들의 목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들의 목자들은 천사들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10절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예수님의 오심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역사상 이런 소식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이유는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11절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오늘날’로 번역된 희랍어 ‘세메론’은 막연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특정한 때를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동네에’라는 말은 특정한 장소를 말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성경은 사건의 확실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특정한 때 와 장소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사람들의 귀에 스쳐 지나가는 풍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이뤄진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은 실로 엄청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탄생이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나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이유’를 조용히 생각해봤습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죄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근본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교육으로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돈으로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윤리 도덕으로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서 나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롬3:23-24절 “모든 사람(나)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나) 되었느니라.” 

‘나’라는 단어를 넣어서 다시 한 번 고백해보십시오.


② 그리스도께서 나의 죽음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멀리하고 싶지만 죽음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비극이었습니다. 
나도 죽고 너도 죽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죽음의 문제를 풀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고전 15:20-22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나) 삶을 얻으리라.” 

이 구절에도 ‘나’라는 단어를 넣어 고백해보십시오. 
그래서 저는 죽음을 영생의 문을 여는 순간이며, 부활의 시작이라고 확신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저에게 진정으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다. 

저는 두 가지 의문을 가지고 본문을 묵상했습니다. 
1) 왜 들의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해졌을까? 
2) 왜 아기 예수님은 구유에서 탄생하셨을까? 

이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왜 들의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해졌을까? 

8절을 읽습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들의 목자들은 누구였습니까? 
혹 여러분은 목자라고 하면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풀피리를 불고 있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정경을 그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게 아닙니다. 
목자들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가장 비루한 집단의 대명사였습니다. 
목자들은 잠시 양떼를 돌보다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예 양떼와 더불어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옷은 늘 땀에 찌들었고 몸에는 짐승냄새가 풀풀 났습니다. 

슬픈 현실은 짐승들과 뒹굴다 보니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음식 먹을 때 손발을 씻는 규례를 지키라는 것은 그들에게 조롱에 가까운 말이었습니다. 

또 주인의 감독을 직접 받지 않다보니까 양의 손실을 처리할 때 주인과 목자 사이에 서로 오해할 소지가 많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목자가 게을러서 양을 죽였는지, 실수로 양을 죽였는지, 양이 병들어 죽었는지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목자들은 거짓말쟁이로 취급받을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예 유대법정에서는 목자들을 증인으로 세우지 않는 조치까지 취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들의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헤롯왕, 대제사장, 사두개인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들의 목자들은 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① 그들은 하늘의 아주 미세한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영적인 청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8절에 ‘밤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밤은 세상의 소란스러움이 잦아드는 시간입니다. 

그렇지요? 
보통 사람들은 세상의 소리가 잦아들 때 그들의 귀도 닫습니다. 
그러나 밤에 양을 지키는 들의 목자들은 세상의 잡다한 소리들이 잦아들 때 영혼의 귀를 엽니다.
예루살렘이 질펀한 욕망의 밤을 보내고 있을 때 그들은 들에서 그 밤에 영혼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시편의 무수한 시들이 목자인 다윗의 영혼의 읊조림이라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었으며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본래부터 희망이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눅3:1에는 예수님의 탄생 당시의 정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 본디오 빌라도 총독, 헤롯왕과 그의 동생 빌립, 루사니아 그리고 안나스와 가야바 대제사장 등 당시 정치 종교를 좌지우지 하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백성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지 못했습니다. 
희망은 결코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만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만이 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② 그들은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양을 치듯 가꿀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8절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지키더니’ 라는 표현은 영어로 ‘keeping watch over'로 한순간도 딴전을 피우지 않고 양떼를 돌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의미 있는 구절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희망은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희망은 가꾸어져야 합니다. 
희망은 양을 기르듯이 길러야 합니다. 

오랜 기도가 하늘에 솟구치고, 오랜 기다림에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현실이 됩니다. 
들의 목자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작은 희망이라도 가꿀 줄 알았고, 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알았던 사람들이기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2 왜 아기 예수님은 구유에서 탄생하셨을까? 

본문 12절에 보면,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나신 자리를 ‘구유’라고 강조하는 말씀이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고 이상하게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본문에는 12절 외에 아기 예수님이 누인 자리가 구유임을 더 밝히고 있습니다. 
눅2:7절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6절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말구유’란 말들을 먹이기 위한 짚이나 풀을 놓은 여물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첫발을 디디신 곳이 ‘말구유’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저는 엊저녁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너무 감격스러워 이 말씀에 곡을 부친 찬송가 113장을 혼자서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저 하늘의 별들 반짝이는데 그 어린 주 예수 꼴 위에 자네. 

만일 예수님이 궁전에서 태어나셨더라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 분을 한번 뵙기 위하여 몇 군데의 검문소를 지나면서 신분증을 제시하여야 하고, 철제 감식기로 몸수색을 당하고, 비서실에서 주의 사항을 듣고, 그리고 한참 기다려야만 잠간 만날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것도 선택받은 사람에 한해서……. 

만일 예수님이 부드러운 붉은 비로도에 고이 싸여 태어나셨다면 강원도 시골에서 어머니의  무명 치마폭에 싸여 태어난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설령 인연이 닿아서 그분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분이 어떻게 저를 이해해 주시겠습니까? 

조선 시대의 어느 왕은 신하들이 지금 백성들이 흉년이 들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보고하자, “아, 왜 다들 밥만 먹으려고 하는고. 다락에 있는 약과와 과일들을 좀 먹지.......”하더랍니다. 
지체 높은 사람들, 고난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어려운 자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말은 이해한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마음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차가운 마구간 구유 속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삶의 가장 끝 언저리, 가장 밑바닥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로마군대의 창검이 거리마다 번쩍이는 불안하고 두려운 분위기 속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불안과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로마의 앞잡이로서 동족의 피를 빠는 헤롯도당이 활보하는 그곳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왜곡되어 상처받고 오해받는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차가운 마구간의 구유 속에 잠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무런 격식 없이, 아무런 방해 없이, 아무런 제한 없이, 아무런 부담 없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삶의 문제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 때아기 예수님을 만난 자리는 어디였습니까? 

차가운 마구간 구유에 가야만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말구유에 간 ‘들의 목자들’, ‘동방박사들’만이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기 예수님을 만날 자리는 어디인가요? 
2005년 우리나라의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비닐집, 판잣집, 움막에 6만 명. 지하방에 142만 명, 옥탑방에 9만 명 그리고 동굴과 쪽방 등에 5만 명이 산다고 합니다. 

구석기 시대도 아닌데 동굴이라니요! 
그러나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 옛날 첫 번 크리스마스에 구유에 누우셨던 아기 예수님이 오늘 한국에 오신다면 옥탑방이나 쪽방, 비닐집에 가셔야 할 듯하니, 세월은 그리도 흘렀건만 아기 예수님의 신세는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성경 마태복음25장 35-40절에는, 마지막 날에 주님이 심판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때 의인들이 깜짝 놀라서 하는 얘기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혔나이까? 그런 적은 없습니다. 괜히 그런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따라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은 예수님께 한 일이 됩니다. 
‘예수님의 자기 동일시’라는 말을 유념하십시오. 

캘거타의 빈민가를 찾아온 테레사라는 한 수녀가 땅바닥에 금을 그으며 가난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그 가난한 아이들이 작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장일순 선생님이 ‘단강’이라는 곳에서 목회하는 젊은 목회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강은 양자강일 거요. 그러나 인류의 가슴에 가장 위대한 강으로 남은 것은 요단강입니다. 양자강에 비하면 요단강은 개울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안류의 역사에 요단강이 가장 큰 강으로 남은 것은 거기에 예수님이 사셨기 때문이랍니다.  단강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의 구유를 찾아 나설 때 그곳은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또 하나의 베들레헴 구유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2008년 성탄절에 지극히 작은 자와 함께 하는 자리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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