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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예수님의 오심 (마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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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오심 (마 2:1~12)


• 채색된 크리스마스 이야기 

이제 대림절의 초 네 개가 밝혀졌습니다. 우리는 초를 밝히며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 마음의 어둠을 밝혀 주십시오.” 사관에 머물 곳이 없어 말구유로 향하실 수밖에 없었던 주님은 지금도 머무실 곳을 찾아 이 차가운 세상을 방황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을 모신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밝히실 주님이 머무실 만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주님을 사랑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평화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합니다. 우리 마음이 사랑을 향해 열릴 때, 우리 삶이 평화를 향한 순례가 될 때 주님은 우리 속에 머무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탄절의 주인공이라 할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리아, 요셉, 아기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기 예수를 장식하는 신비한 후광조차 없습니다. 후세의 화가들은 탄생 이야기 속에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 했습니다. 종교 미술은 마치 관례처럼 요셉과 마리아의 나이 차가 상당히 많은 것처럼 그립니다. 그들은 ‘어울리지 않는 부부’인 셈입니다. 

주님의 탄생을 그린 성화에서 요셉은 대개 하얀 수염과 백발을 한 채 한쪽 구석에 무기력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거나 맥없이 지팡이를 짚은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것은 성령 잉태의 기적에 신빙성을 더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장면에서도 요셉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동방박사의 경배>(1504년, 100*114cm)는 주님이 태어나신 마굿간을 쇠락한 다윗 궁전의 한 구석에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기 예수가 다윗의 계보를 이은 메시아 왕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탄생 이야기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다양하게 채색되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의 탄생 이야기는 성탄절 무렵이면 아이들이 연극으로 재연하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폭력과 혼돈, 절망의 어둠이 드리운 시대 한복판에 태어나셨습니다.


• 별을 따라 온 사람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간결한 이 한 마디 속에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복음사가가 굳이 ‘헤롯 왕 때’라고 명토박아 둔 까닭은 그 시대가 지독한 위기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에돔 출신으로 로마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임으로 왕이 되었지만,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는 열등감이 강했습니다. 권모술수에 능했던 그는 늘 주변 사람들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모두가 잠재적인 적으로 보였습니다. 그가 아내를 죽이고 아들을 죽인 것도 의구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건축광이기도 했는데, 지금도 그가 남긴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재건한 예루살렘 성전, 마사다 산성, 궁전, 로마 황제를 기리기 위해 지중해 바닷가에 건설한 도시 가이사랴와 13킬로미터에 이르는 수로교(水路橋) 등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민중들의 고혈로 이루어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는 권력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 보여준 인물입니다. 음모, 술수, 비정함, 그리고 의심과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높아지기 위해 남을 짓밟는 일도 서슴지 않는 이들만이 권력을 탐합니다. 주님께서도 권력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마20:25). 그때나 지금이나 이것이 권력의 모습입니다. 오죽하면 시편 시인이 세상의 통치자들을 두고 “그들은 독사처럼 독기가 서려, 귀를 틀어막은 귀머거리 살무사”(시58:4) 같다고 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20:26-27). 옛 사람은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계곡의 왕이 되는 까닭은 자기를 잘 낮추기 때문이라 했습니다(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老子 六十六章). 

학정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팔자려니 여기고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전혀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집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불온한 사람입니다. 눈엣가시입니다. 권력은 사람들에게 선망과 두려움의 대상이 될 때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세상과 삶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라는 초대였습니다. ‘진리가 너희가 자유롭게 할 것이다’. 권력자들에게 이 말씀처럼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과 만난 이들은 더 이상 세상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극한 가난과 시련 속에서도 영적인 자유를 누립니다. 헤롯과 같은 집권자들이 가장 미워하는 이는 누구일까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 헤롯과 그 부역자들

오늘 본문에서 제 눈길을 사로잡는 이들은 헤롯 왕의 자문 역할을 했던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입니다. 헤롯은 그들을 불러 모아 놓고는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지를 캐묻습니다. 그들은 그 잔인하고 교활한 헤롯의 심중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민중들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발적인 부역자가 되어 헤롯의 자문에 응합니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나는 이들의 이런 모습에 절망합니다. 두려움 때문일까요? 아니면 신학의 권위자라는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들은 메시아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권력자의 편에 섭니다. 70-80년대에 우리는 찬송가 586장을 가슴으로 불렀습니다.

1.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4. 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 더욱 강하다 진리 따라 살아갈 때 어려움도 당하리
우리 가는 그 앞길에 어둔 장막 덮쳐도 하나님이 함께 계셔 항상 지켜 주시리

결단을 요구받는 상황 가운데서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한 우리는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켜내지 못할 때 우리 삶은 비루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에게서 우리 시대의 종교인들과 지성인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우리는 출애굽기의 첫 장에서 놀라운 인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십브라와 부아라는 히브리 산파들입니다. 이집트 사회에서 불온의 낙인이 찍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히브리인들은 바로의 반생명적 폭거에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바로는 십브라와 부아를 자기의 음모를 실현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합니다. 히브리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잘 살펴서 “낳은 아이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라”(출1:16)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의 면전에서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인 태업을 눈치 챈 바로가 그들을 소환해 “어찌 하여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느냐?”고 다그쳤을 때 그들은 당황하지 않고 말합니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역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민중의 지혜와 용기를 봅니다. 대제사장들의 화려한 옷과 율법 교사들의 권위는 히브리 산파들의 지혜 앞에서 빛을 잃고 맙니다.

• 연약함의 신비

아기 예수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헤롯은 권모술수로 살아온 사람답게 은근한 말로 동방박사들에게 말합니다. “가서, 그 아기를 샅샅이 찾아보시오.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생각이오”(2:8). 동방박사들은 이 겸손한 말 속에 숨겨진 비수를 눈치챘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별빛의 인도를 받아 걷는 그들의 발걸음은 가뿐합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이를 만난다는 기쁨에 그들의 발걸음은 산들바람입니다. 

그들은 마침내 아기 예수가 계신 곳에 이르러,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바치며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합니다. 그들이 바친 선물의 의미를 캐묻는 이들이 있지만 저는 관심 없습니다. 다만 이 아름다운 광경에 감동할 따름입니다. 나이 많은 이들이 갓난아기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세상의 유력자가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아기를 경배합니다. 물론 그들이 경배한 것은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화육한 길과 진리와 생명입니다. 말구유에 누워있는 무력한 아이에게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보아내는 그들의 밝은 눈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때로 가장 연약한 자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역설적인 진실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들려준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그의 조카는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채 못채우고 6개월 만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정확히 910그램의 미숙아였습니다. 어른 엄지손가락 굵기의 다리를 팔랑거리며 손바닥 만한 크기로 세상에 나온 아기,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던 이 여린 생명을 보며 그 신학자는 ‘세상의 모든 아기는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구제금융의 한파로 언니가 운영하던 어린이집도 문을 닫고, 형부가 운영하던 회사마저 부도가 나 인생의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생긴 아기는 복음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 같았다고 합니다. 낙태를 위해 병원 문 앞을 여러 차례 서성거렸지만 언니는 차마 들어선 그 생명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그렇게도 서둘러 세상에 나왔던 것입니다. 아이는 미숙아들에게 올 수 있는 모든 합병증, 유리질막증이나 기관지폐이형성증, 패혈증 등을 다 겪어내면서 스스로 자기 생명을 연단했습니다. 

그 신학자는 말합니다. “우리 집안에 찾아온 복 하나를 대라면, 나는 주저없이 ‘엄지공주’ 솔이를 끌어당긴다. 솔이는 산산조각날 위기에 처해 있던 언니 가정에 치유를 주러 왔다. 세상을 원망하며 좌절과 한숨에 빠져 있던 그 가정에 화해를 주러 왔다.”(구미정, <<야이로, 원숭이를 만나다>>, 꿈꾸는 터, 2008, 210ff) 

그 연약한 생명을 돌보는 동안 솔이의 부모는 자신들이 치유되고 있음을 알았고, 화해의 새벽이 밝아옴을 느꼈던 것입니다. 물론 솔이가 건강하게 태어났더라면 더 좋았겠지요. 하지만 살다보면 전혀 예기치 않은 현실에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솔이의 부모는 그 낯선, 그리고 두려운 현실을 용감하게 대면했습니다. 그리고 그 연약한 생명을 사랑으로 돌보고 보듬어 안았습니다. 그들은 어느 결에 자기들을 사로잡고 있던 어둔 구름이, 그리고 비애가 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연약한 이들 속에 숨겨두셨습니다. 그 연약함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이들만이 그 귀한 것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을 거두려 했던 헤롯의 꿈은 깨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동방박사들에게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고 지시하셨고, 그들은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습니다. 주님은 지금 바로 우리의 귀에 연약한 이들을 잘 돌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곁에 있는 연약한 이들의 모습을 외면하고는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물론 세상의 고통에 다 반응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의 내적 힘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물질과 시간과 정성의 일부라도 그런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구별해 놓을 수는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밭모퉁이의 한 부분을 추수하지 않고 남겨두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주님은 지금 태어나실 곳을 찾아 이 차가운 세상을 방황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 가정에, 우리 일터에 그분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십시오. 가장 연약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가장 따뜻한 사랑으로 맞이하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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