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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메시아로 오시는 아기 예수의 탄생 (사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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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로 오시는 아기 예수의 탄생 (사 9:2~7)


시작하는 말

강림절 네 번째 주일, 오늘도 모여 예배하는 우리의 모임위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가득히 내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남 유다의 아하스왕 때(주전 735-715)에 선포한 말씀입니다. 본문은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에 거주 하던 자, 즉‘어둠과 절망 속에 주저앉은 백성’에게 큰 빛을 비취고 구원에 대한 희망을 주는,‘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한 아기의 탄생’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이상적인 왕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그 때의 시대적 상황, 곧 어둠과 절망적인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정치적인 상황은 심히 어려웠습니다. 유다의 아하스왕은 아람(수리아)왕 르신과 이스라엘(에브라임)왕 베가의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7장에서 보면 그는 마치 폭풍에 흔들리는 숲속의 나무들처럼 마음이 흔들리며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7:1-2). (7:5-6). 이렇게 아하스왕이 두 연합군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 데는, 그 당시 국제정치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앗수르 제국의 왕에 즉위함으로써(주전745년) 앗수르의 팽창정책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앗수르는 강력한 힘으로 주변의 약소국가들을 정복하였습니다. 정복당한 나라들은 앗수르의 신(神)을 섬겨야 했고, 정치 및 종교와 문화를 이끌어 가던 상류층은 이주 당했습니다.

 이러한 앗수르의 팽창정책에 위협을 느낀 수리아 팔레스틴 지역의 몇몇 작은 나라들이 공동으로 앗수르에 맞서려고 했습니다. 이 반(反) 앗수르 동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나라가 수리아(아람)와 북 이스라엘(에브라임)이었습니다.(왕하 15:27-31).

이렇게 반 앗수르 동맹을 맺은 아람(수리아)왕 르신과 이스라엘(에브라임)왕 베가는 남왕국 유다의 아하스 왕에게 자기들과 연합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아하스왕은 동맹에 합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화가 치민 두 동맹국은 주전 733년에 예루살렘으로 쳐 들어와 아하스 왕을 몰아내고 자기들과 협조할 다른 왕을 세우려고 했습니다(왕하 15:37; 16:5; 사 7:5-6). 이것이 아하스 왕을 두렵게 하였고, 그가 극복해야할 위기였습니다. 

바로 이 위기의 때에 예언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하스 왕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 하였습니다.“분노한 두 왕 르신과 베가는 타다 남은 부지깽이의 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그들의 도모는 실패할 것이며, 두 나라는 곧 망하게 될 것이라”(7:4,7-8)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서지 못하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이 경고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을 굳게 믿고 그 만을 의지하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망하고 만다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연합군의 위협에서 국가가 위태로워지고 스스로 방어 할 수 없게 된 유다의 아하스 왕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많은 양의 조공을 바치고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왕하 16:7-8; 대하 28:16). 신명기 사가는 아하스의 요청이 그가 기대한 것만큼 효과를 얻었다고 기술한(왕하16:9) 반면에, 역대기 사가는 앗수르의 군대가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유다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으므로 앗수르 왕은 아하스 왕에게 실질적으로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였다고 합니다(대하 28:20-21) 그것은 유다를 침략한 연합군이 물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빼앗긴 지역들은 유다로 다시 귀속되지 않고 앗수르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따라서 앗수르에 막대한 양의 조공을 계속 바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아하스 왕의 정치적인 잘못된 선택이 경제와 종교, 사회 전반에 위기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봉신 국가로서 과다한 조공을 바치는 일로 인하여 유다의 경제적 상황은 몹시 피폐했습니다. 아하스 왕은 앗수르가 요구하는 조공을 조달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빼내야 했고(왕하 16:8) 백성들의 고혈을 짜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대 지주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수탈 하였습니다(사 3:13-15; 1-8). 이런 것들이 아하스 시대의 경제를 어렵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하스 왕 당시 유다의 사회적 상황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였습니다. 유다 사회도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사회적, 도덕적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부자들은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으며(사 3:16-4:1; 5:11-12, 20-23), 재판장들마저 부패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였습니다(사 1:21-23; 5:23; 10:1-4), 나아 가 성직자 계층마저 부패하였습니다. 이것이 또한 유다 사회가 직면한 위기였습니다.

더욱 심각한 위기는, 종교적인 문제였습니다. 아하스 왕국이 정치와 경제적으로 앗수르에 예속될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예속 되었습니다. 아하스 왕은 앗수르의 최고 통치권과 앗수르 민족의 최고신을 인정한다는 표시로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에 앗수르의 신을 위한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종교정책의 결과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에서 제2의 신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16:10-18). 

이렇게 하여 유다는 완전한 종교 혼합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백성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행위이며, 이것이 남북 왕국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까닭입니다(왕하 17:7-23),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제국의 압제를 받아 어둠과 절망 속에 주저앉은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8:19-22)

이런 모습은 남의 일 같지 않은 우리와 공감을 갖게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몸 말

이사야는 그동안 위협적이고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본문은 전혀 다릅니다. 희망과 위로가 넘치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은 앗수르 제국의 지배 하에서 암울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지난 36년간 일본군국주의 하에서 압제 당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더 이상 그 같은 암울함과 절망은 없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것은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이고,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한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즐거움은 농부가 땀 흘려지은 곡식을 거둘 때의 즐거움 같고, 그 기쁨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전리품을 나눌 때의 기쁨 같아,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할 것이라고 합니다(2-3절). 이사야는 그들이 왜 그토록 즐거워하고 기뻐하는가,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밝힙니다.

첫째,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친히 속량하시는‘구원활동’에 있습니다. 4절 말씀에 보시면,‘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하였습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 사건, 기드온 사사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미디안의 날’을 언급합니다. 우리가 알듯이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은 군사력으로는 미디안 족속을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므낫세 지파의 기드온을 사사로 불러서 그로 하여금 미디안과 전쟁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기드온의 300명의 적은 군대가 미디안의 수만의 큰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삿6-7장 참조). 기드온의 예상 밖의 승리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가능한‘야웨의 전쟁’(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미디안의 날’은 기드온의 승리가 하나님의 개입으로 승리한‘야웨의 전쟁’을 기념하는 국경일입니다.

결국 본문 4-5절은 흑암 속에 주저앉았던 백성에게 베풀어질 구원은 정치적, 군사적 구원임을 밝힙니다. 앗수르의 정치적 지배로 부터의 해방이 구원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앗수르 제국을 군사적으로 패배시킬 방법은‘야웨의 전쟁’뿐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앗수르 제국을 군사적으로 제압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을 차단하는 한편, 앗수르 제국의 분쇄는 오직 하나님 자신의 전쟁, 즉‘야웨의 전쟁’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정치적 지배를 종식시키고,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길은‘여호와의 전쟁’,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사실을 찬양하며 기뻐합니다. 이것이 그들을 그토록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한 이유입니다.

두번째 기쁨의 근원은 다윗왕가에서 태어날 한 아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의 탄생은 바로 앗수르 제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를 건설하실 왕의 등극을 의미합니다. 그가 왕이 되어 옛 다윗 왕국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하나님의 백성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본문 6-7절은 구원의 기쁨이 크게 더하여진 가장 근원적인 이유를 제시 합니다.

현대어로 번역된 말씀을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한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하여 한 아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의 어깨 위로 통치권이 주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기적의 통치자’,‘용사이신 하나님’,‘영원한 아버지’,‘평화의 통치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의 평화스러운 정부는 점점 더 확장하고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는 자기 조상 다윗의 왕 자리에 앉아 완전한 정의와 법으로 통치할 것이다. 그는 세계의 모든 민족들이 참된 정의와 평화를 누리게 할 것이다. 이 일이 꼭 이루어질 것은 하늘의 모든 군대들을 거느리신 주께서 온몸을 내놓고 이 일을 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6-7절, 현대어 성경). 

4-5절이 구원의 소극적 차원인 앗수르 제국의 정치적 압제로 부터의 해방을 말하는데 비하여, 6-7절은 하나님 구원의 적극적 차원을 말합니다. 앗수르의 채찍과 쇠 빗장과 멍에로 부터의 해방(4절)이 구원의 전부가 아닙니다. 

6-7절이 말하는 적극적이며 영구적인 구원은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다윗 왕 같은 왕의 통치(나라)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앗수르의 폭력적인 제국 질서와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이상화된 다윗 왕국을 넌지시 대조합니다(사11:1-9참조). 

비록 현실은 앗수르 제국의 군주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옷들을 입은- 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사야는 한 아기, 한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갈망합니다. 이사야에게 다윗의 나라, 즉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나라는 앗수르제국에 대한‘대안왕국’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앗수르제국의 대안왕국(對案王國)인 나라는 하나님의 위탁자로서 다윗의 후손이 대리적으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본문(6절)에서 이사야가 말하는‘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와 우리에게 주시는 아들’은 다윗 계열의 왕으로서 왕위에 오를 자입니다. 그 아이(아들)는 태어나자마자 그의 어께에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의 이름은‘기묘자와 모사’(기묘한 모사, 환상적 지략가, 탁월한 경륜가, 기적의 통치자),‘전능하신 하나님’(용사이신 하나님, 강력한 용사),‘영존하시는 아버지’(영원한 아버지),‘평강의 왕’(평화의 왕, 평화의 통치자, 평화의 방백)으로 불립니다.

이사야는 이같이 여러 가지 별명을 가진‘한 아기’가 바로 앗수르제국의 대안적 왕국, 즉 다윗왕국을 다스릴 이상적인 왕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내다 보았습니다. 이사야는 이상적인 왕으로 태어날 한 아기,“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세울 것이라”(7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그가 바로 옛 다윗왕국을 재건할 이상적인 왕이라고 미리 내다 보았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한 아기의 탄생’은, 이사야 7:14절,“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라”는 말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한 아기의 탄생’과‘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 임마누엘’은 동일한 분으로서 구세주(메시야)로 탄생할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눅 1:32-33, 79; 2:14, 29-32).

하나님의 백성이 그토록 기뻐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그 아기’가 다윗왕국의 이상적인 왕이 되어, 분열 되어있는 남북 왕국을 통일 시키고, 그 나라를 공평과 정의로 다스림으로써, 어둠과 절망에 주저앉은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이 민족에게도 이렇듯 선명한 꿈과 소망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이 나라와 이 민족에게도 이 강림절에 이 꿈을 갖기를 축원합니다.


마무리 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강림절 마지막 주일에 우리를 위해 태어난 아기 예수를 맞으며, 그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기 위하여 여기 모였습니다. 그 옛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윗 왕가를 계승할 이상적인 왕으로 태어날‘한 아기’로 인하여 그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했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를 위해 구주로 탄생하신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한 없이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한 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암울하고 답답하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주저앉아 있던 것 못지않게 지금 우리가 심히 곤고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올바른 국가지도자들이 나타나야 할 텐데, 사실은 오늘의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더욱 우리를 실망시키고 절망케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라가 어렵고 백성들이 고통가운데 있을 때, 이 나라와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통령를 뽑는 대선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 때에 참으로 훌륭한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선출되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기대에 미치지 못 하는 자들이 선출되어 크게 실망하며 안타까워합니다. 지금 우리는 총체적 위기에 직면 했다고 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더욱 이상적인 지도자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상적인 지도자가 한 없이 그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윗 왕과 같은 이상적인 왕, 다윗 왕가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시는 메시야의 역사하심이 이 땅에도 실현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지도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다스리는, 이 땅의 정치 지도자들이 되기를 우리 모두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탄의 계절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에게 주시기 원하셨던 용서와 위로와 평화가 다시 가득 채워지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의 오심을 되새김으로 교회가 살아나고 그리스도의 정신이 살아나고, 그 복음의 능력이 어두움과 절망속에 주저 앉아있는 이 백성에게 새 생명을 불러 일으키기를 기도합니다. 더욱이 아무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이 세대에 그의 오심을 기대하며, 소망으로 간직하여, 살아갈 용기를 회복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메시야로 오시는 한 아기의 탄생이 어깨를 늘어 떨이고 코를 쭉 빼고 있는 백성들에게 살 소망이 되었듯이 이 나라 이 백성에게도 소망이요 기쁨이 되기를 바라며 축원합니다. 

Dick Wills 감독께서 쓰신‘Walking to God's Dream' 이란 책에 보면, 
'God's vision will be larger than you or your church can do by your own energy.' 
하나님이 주시는 비젼은 언제나 내 자신의 힘이나 교회의 힘만으로 해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다’고 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주신 꿈을 품고, 그 분만을 의지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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