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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성탄 (요 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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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성탄 (요 1:14~18)
 
   
얼마 전 재미있는 제목의 책 한 권을 접한 일이 있습니다. [코카콜라는 어떻게 산타에게 빨간 옷을 입혔는가]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서울대학교의 김병도 교수가 “마케팅”에 관한 책을 쓰면서 제목을 이렇게 붙였습니다. 김 교수는 이 책에서 마케팅 전략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로 코카콜라의 산타광고를 들고 있습니다. 

1920년대 코카콜라 회사는 겨울철에 급격하게 줄어드는 매출을 어떻게 하면 늘릴 수 있을까를 고심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산타를 광고모델로 등장시키기로 했습니다. 당시 상업적 그림을 그리는 화가 하든 선드블롬에게 산타를 그리게 했습니다. 

선드블롬은 우선 근엄했던 산타 이미지를 친근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코카콜라의 상표를 연상케 하는 빨간 옷을 입혔고, 콜라의 거품을 연상케 하는 흰색 수염을 붙였습니다. 광고 초기에는 선물 배달 도중 코카콜라를 마시며 쉬는 산타가 등장했고, 나중에는 아이들이 선물 배달로 피곤한 산타를 위해 양말 곁에 코카콜라를 준비해 둔다는 내용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광고는 대단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코카콜라의 매출이 크게 신장된 것은 물론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선드블롬의 산타가 전 세계 산타의 표준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하면 ‘산타’가 떠오르게 됐고, ‘산타’하면 ‘코카콜라’가 떠오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성탄절 주인공은 산타가 되버렸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날인데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산타에 가 있습니다. 성탄절에 예수의 탄생은 없고 산타와 선물 그리고 들뜬 분위기만 남았습니다.

최근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안티 산타” 운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산타 없는 거리”를 조성하고, 산타의 원래 캐릭터인 성 니콜라스 인형을 나누는 일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안티 산타 운동에 그칠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예수 탄생을 기리는 운동으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성탄절”하면 예수 탄생을 떠올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도 더욱 성탄 시즌에 예수 탄생을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요한의 깊은 신학적 성찰이 담긴 말씀입니다. 특히 14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선 사도 요한은 성탄 사건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하시매”라는 동사를 썼습니다. 원어 성경에서 "스케노오"(jskhvnow)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거처를 정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성탄 사건을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고 세상에 거처를 정하신 사건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 요한은 성탄 사건 속에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성탄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고 거처를 정하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보다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출 40:35입니다.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광야에서 행군을 시작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갑자기 성막 위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덮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놀라운 장면을 목도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한 것입니다. 모세를 비롯하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깊이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요한은 성탄 사건을 묵상하면서 이와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간 세상 한 복판에 나타나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볼 때 하나님의 영광 특히 독생자의 영광 나타났음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라토리오 [메시야]를 작곡한 헨델은 음악가로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헨델은 끝났다”고 외면했습니다. 그 때 저가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23일 동안 기도하다가 작곡하고 작곡하다가 또 기도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망을 끊고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려 능력을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작곡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완성하게 된 곡이 바로 저 유명한 [메시야]입니다. 

그가 합창곡 44번 “할렐루야” 작곡을 끝냈을 때 그 감격을 억누를 수 없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앞에 천국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위대한 하나님을 보았다. 오 주여!” 그리고 곡을 다 마무리하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구나”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면서 성탄사건을 묵상하는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오늘 성탄을 맞는 우리들도 이 성탄사건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 독생자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요한은 독생자의 영광 안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바로 은혜와 진리입니다. 이 두 가지가 그 안에 충만한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성탄을 맞는 우리들도 이 두 가지를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두 가지가 성탄의 본질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성탄>

우선 사도 요한은 성탄 사건 안에서 은혜가 충만한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은혜라는 말은 원어로 “카리스”(cari")입니다. 이 말은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쏟아부어 주신 그분의 자비와 친절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비와 친절을 베풀어 오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특성을 은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충만하다는 말은 원어로는 “플레로마”(plhrwma)입니다. 이 말은 “완성되다”, “완전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구약 시대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임했는데 그 하나님의 은혜가 이 성탄 사건에서 완성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저것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다 주시다가 마지막에서는 아들까지 주셨다는 것입니다. 

제 아들 녀석이 군에 가있습니다. 벌써 전역할 때가 다 됐습니다. 이 녀석을 군에 보낼 때 마음 한 곳이 무거웠습니다. 평소에 한국 남아라면 반드시 가야하고, 고생스럽더라도 군대를 다녀오면 얻는 것도 많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 아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잠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날씨가 추워지고 눈이라도 많이 오는 날이면 옛날 군대생활 생각이 나면서 걱정이 됩니다. 또 가끔 안전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염려도 됩니다. 그래서 연락도 해 봅니다. 길거리에서 군인을 만나면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아들 생각이 나고 마음이 찡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고 인간이 되게 하셔서 보내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들을 보내신 것이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게 하시고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게 하시기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사건은 하나님의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절정이요 최고봉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은혜가 충만하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성탄을 묵상하면서 은혜가 충만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가 성탄을 통해 절정이 되어 나타났다는 점을 깊이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우화적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사람들이 후에 어떻게 살고 있는 지 예수님께서 다시 만나보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알콜 중독자를 만나십니다. “내가 당신을 어디선가 본 일이 있습니까?” “아 있지요 나는 원래 절름발이였는데 당신이 고쳐주셔서 이렇게 걷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절름발이였을 때는 이렇게 저렇게 얻어먹고 살았는데 이제는 도와주는 사람이 없네요 할 일도 없고 어떻게 하다보니 이렇게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요

다음에는 창녀를 만났습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고 구원했거늘 어찌 아직도 창녀로 사는가?” 꾸중하듯 물으셨습니다. 이 창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요 제가 예수님께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고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로워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다시 이렇게 창녀로 돌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보통 은혜가 아니라 아들까지 내어 주신 충만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잃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다시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 은혜를 회복하고 은혜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진리의 성탄>

다음으로 사도 요한은 성탄 사건 안에서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진리라는 말은 원어로 “알레데이아”(alhqeia)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에 대해 성실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계속 그 언약을 지켜오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을 진리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충만하다는 말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완성되다”, “완전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또한 반드시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오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 성탄 사건을 통해 그 언약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과거 창 12:1-3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삼하 7:8-16에 나타난 다윗과 맺으신 언약, 그리고 렘 31:31-34에 나타난 새 언약 등의 언약들이 성탄 사건을 통해서 온전하게 실현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사건은 하나님의 진리의 절정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을 아들까지 내어주시면서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사건은 진리의 최고봉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진리가 충만하다고 표현했습니다. 

민 23:1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바로 하나님께서는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약속에 관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신 약속들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비해 신약은 예수님께서 오신 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신 약속들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약속들이 한결같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단기간에 이루어지기도 했고, 또한 때로는 긴 세월이 흐른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약속들 가운데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이 무려 350여회나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들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에 성탄에 관한 약속도 수십 번이 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약속이 하나도 어김없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 나시기 전 500년 전 미가라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나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미 5:2) 이것은 곧 예언이자 약속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베들레헴과는 아주 먼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침 황제가 호적 명령을 내립니다. 요셉의 본적인 베들레헴이었기 때문에 요셉은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마침 베들레헴에 갔을 때 산기가 있어서 그곳에서 아이를 낳게 됐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기가 막히게 타이밍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행하신 섭리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은 지키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더욱 철저하게 지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보고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탄 사건을 묵상하면서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매선스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경수업 직전에 칠판에 이렇게 썼습니다. “God is no where!"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변한 것입니다. 수업 시작과 동시에 다른 한 학생이 나가서 이렇게 고쳤습니다. ”God is now here?"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말해야 맞을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탄 사건을 묵상하면서 진리가 충만함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심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탄주일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산타에게 쏠리고, 발길이 쇼핑과 들뜬 송년회로 분주하고, 마음이 힘겨운 현실에 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나타난 독생자의 영광을 깊이 체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성탄사건 속에 나타난 은혜의 충만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충만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아들을 주기기까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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