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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자기 버림의 평화와 영광 (눅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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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버림의 평화와 영광 (눅 2:1~14) 


오늘 본문의 첫 절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때가 [가이사 아구스도]가 로마의 지배자였을 때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가이사 아구스도]라고 표기하지만 라틴어로 조금 더 정확하게 읽자면 [카이자르 아우구스투스]가 될 것입니다. 이 이름에 대한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 

[카이자르]는 [시저]라는 영어식 발음으로 우리 귀에 더 익숙해진 이름입니다. [시저]는 대로마제국을 건설한 [율리우스 카이자르]를 일컫는 영어식 이름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서력기원전 31년부터 서기 14년까지 45년간 로마를 다스렸습니다. 본명이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였던 그는 그의 외삼촌 [율리우스 카이자르] 즉 [시저]에 의해 양자로 택함 받고는 자기의 본래 이름 사이에 양부의 이름을 삽입하여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자르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란 처음에는 로마의 세 최고집정관 중 하나였던 그가 경쟁자들을 다 물리치고 단독으로 로마의 정권을 거머쥐게 된 서력기원전 27년 로마원로원이 그에게 부여한 이름으로서 “존경받는 자”란 뜻입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첫 번째 황제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로마의 가장 위대한 황제로 봅니다. 이렇게 [카이자르] 즉 [가이사]는 [시저] 개인의 이름이었지만 [아구스도]가 그 이름을 자신의 새 이름 속에 포함시키고 또 그가 로마의 황제가 됨으로써 그 후부터는 황제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처럼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율리우스 시저의 독재 이후 끊이지 않던 내란들을 모두 종식시키고 로마제국 전역에 평화를 정착시켰습니다. 그것을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라 부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로마세계에서 영예를 누리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유대의 왕이었던 헤롯 1세는 그를 높이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라는 해변도시를 세웠고 옛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재건했습니다. 

[사마리아]의 그리스식 이름 [세바스토스(Sebastos)]는 [아우구스투스] 즉 “존경받는 자”를 의미합니다. [로마의 평화]는 로마의 권력과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였습니다. 로마에 순종하는 한에 있어서 평화롭게 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로마군대의 무자비한 정벌을 당할 수밖에 없는 평화가 [로마의 평화]였습니다.

로마의 통치와 이에 대한 굴종에 의해 평화를 누리던 세상에 로마제국 내 동쪽 변방의 한 속주(屬州) 수리아에 속해있던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가 탄생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 아기의 탄생은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놀라운 사건 즉 삼백여년 후 황제를 신으로 추앙하며 기독교를 무자비하게 박해하던 로마제국이 기독교국가로 급변하는 역사의 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첫 황제 때 온 세상의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로마가 제공하고 유지하는 정치적, 군사적 평화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을 온갖 억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며 진정한 영적 평화를 누리게 하고 온 세상에 하나님나라의 평화를 이루실 이가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선포한 것이 본문 10-11절에 기록된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한 천사의 전언이었고 마지막 절에서의 천군천사들의 합창소리였습니다. 13-14절을 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태어난 아기 예수는 바로 “그리스도 주”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인의 구원자이시고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권자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탄생은 땅에서는 사람들 중에 평화를 이루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 중의 평화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사실의 연결고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임을 또한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태어난 아기 예수가 누구신지를 안다면 그의 탄생은 너무나 충격적일 수 있습니다.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셨는지에 관해 복음서가 전하는 사실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만인의 구원자이시고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권자이신 이가,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그렇게 태어나셨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힘든 일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태어나셨기에 그의 탄생은 전적인 은혜이며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태어나시지 않고 유대인의 수도 예루살렘에서도 태어나시지 않으셨기에 그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변방에서 태어나셨기에 변방의 사람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일류 병원이나 고급 호텔에서 태어나지 않으셨기에 누추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찾아오시는 주님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매스미디어의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요란스러운 보도를 통해 그의 탄생소식이 전해지지 않았기에 음지의 사람들도 눈여겨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유학시절에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대관식이나 왕실혼례행사 같은 것을 TV로 유럽전역에 생방송으로 중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특히 영국의 찰스 왕자가 다이애너비와 혼인하는 의식의 모든 진행과정을 중계하는 방송은 실시간에 전 세계로 전파를 타고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이 아시아나 아프리카나 남미의 빈촌의 주민들에게 무슨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은혜입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이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고 자기를 낮추시기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실천하셨다(빌2:6-8)는 사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일생을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것도 우리가 몸 둘 바를 모르게 할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버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랬습니다. 하나님과의 동등한 권리도 버리셨고 절대 자유자의 지위도 버리셨으며 안락한 삶도 버리셨고 변론권이나 항소권이나 존엄사의 권리마저도 다 버리셨습니다. 배신당하시고 잡히실 것을 아시면서도 피하지 않으시고, 중상모략과 허위선전과 거짓 고발을 당하시면서도 변명하지 않으시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시고 발가벗겨져서 혹독한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으면서도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께 용서를 비셨습니다(눅23:34). 완전하고 철저한 [자기 버림]이었습니다. 

왜 자기를 버리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며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하신 말씀을 먼저 친히 행하신 것입니다. 그 [자기 버림]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이루셨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를 이룬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인간 사이의 평화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라는 인류구원을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그 [자기 버림]을 통해 이루셨고, 그것을 당신의 영광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말과 사고와 상식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신비라고 말해야 할 뿐입니다. 그 신비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신비, 그 [십자가의 도]를 사도 바울은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이해했습니다(고전1:18-24).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버리심으로써 얻고자 하신 것이 땅에서는 사람들 중에 평화이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자리를 드리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본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대로 선과 악을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삶의 염려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을 때 그 결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정상화되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사람들 사이의 바른 관계는 사랑과 사귐과 하나 됨의 관계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다면 우리 모두 사이에서도 서로 사랑하고 형제자매로서의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며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 미움이 있고 싸움이 있으며 갈라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각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각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에 무슨 이상이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사이에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며 갈라져 있는 채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다른 것 아닙니다. 사람들이 각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정착시킬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최고로 가치 있는 것은 다른 무엇에 앞서서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는 일임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토록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나라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의 버리심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버림]은 곧 아버지 하나님의 [자기 버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아들의 [자기 버림]이 없이는 우리에게서 그 어떤 평화도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버리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주님께서는 이제 그 [자기 버림]을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요구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버리려 하지 않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공동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집단일 뿐입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의 공동체라면 모두가 스스로를 버리려 해야 합니다. 자기를 버리는 사람은 그러나 모든 것을 얻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신 후 곧바로 이어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하신 뜻도 이와 같은 그것입니다.

새로 성탄절을 맞는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자기를 버리심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명하신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또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 탄생 시에 수많은 천군천사들이 함께 하나님께 드렸던 찬송,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한 찬송에 화답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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