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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공동체 (엡 5: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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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공동체(엡 5:25~32)


제가 좋아하는 교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유명한 스펄존 목사님에게 한 청년이 찾아와서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고민을 말하면서 ‘완전한 교회’를 하나 추천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스펄존 목사님은 웃으시면서 그런 교회를 찾거든 당신에게도 알려달라고 자신도 그 교회의 멤버가 되고 싶다고 하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덧 붙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형제여, 그런 교회를 찾거든 당신은 제발 그 교회의 멤버가 되지 말 것을 부탁하오”라고 하자, 청년은 “왜요?”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스펄존 목사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교회에 참여하면 그 순간부터 그 교회의 완전함이 깨어질 터이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한 교회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결국 교회도 불완전한 인생들이 모여 형성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교회는 우리의 포기할 수 없는 갈망입니다. 왜냐하면 건강한 교회만이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희망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써 내려간 그의 서신서를 통해 그런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며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야 말로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거룩한 의무라고 가르칩니다.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 성도는 교회를 사랑하고 아낄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일찍 성 어거스틴은 “교회를 어머니처럼 섬길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가 불완전해도 우리 모두는 어머니 사랑이나 어머니 섬김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를 통해 우리는 세상에 태어났고 어머니를 통해서 처음 진정한 사랑을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우리의 생명의 젖줄이요 뿌리요 우리의 삶의 터전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와 가정이라는 공동체 없이 인생의 여행이 불가능하듯, 교회라는 공동체 없이 우리들의 영원을 향한 신앙의 네비게이션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머니가 우리의 삶의 비밀이요 사랑이듯, 교회는 우리의 신앙의 비밀이요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 분문을 통해 주님의 비밀, 우리의 사랑인 교회가 도대체 어떤 공동체인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교회-도대체 어떤 공동체일까요?


1.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오늘 에베소서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가정에서의 부부관계의 도리를 가르치며 그것을 주님과 교회의 관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상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성경은 영원성을 지닌 두개의 공동체로 가정과 교회를 소개합니다. 세상에 직장이나 학교, 회사등의 모든 인위적인 공동체는 잠시 있다가 없어지지만 주님 오실 때까지 없어 질수 없는 ‘신적인 공동체’(Divine Institution)가 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절정에서 탄생한 공동체가 가정이었다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절정에서 탄생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가정에서의 삶의 원리는 그대로 또한 교회에서 적용되어야 할 관계의 원리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과 교회의 탄생의 한 공통분모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희생적인 사랑인 것을 아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한 남녀의 사랑에 이어서 자녀를 낳는 어머니의 피흘리는 희생적 사랑으로 가정이 형성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자신을 내어 주시는 피흘리는 희생적 사랑으로 교회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여기서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고 피를 흘려주신 그 희생의 사건을 뜻하는 말입니다. 

행20:28을 읽겠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여기 교회를 사도행전의 기자는 무엇이라고 서술했습니까? 예,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했습니다. 어찌 그분이 그런 교회를 사랑하시지 않고 아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교회가 부패하면 교회를 개혁도 하시고, A라는 교단 혹은 지역 교회가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B라는 다른 교단이나 지역교회를 세워 일하시지만 그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분의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위해 그분은 자신의 존재 전체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교회주의는 바른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저는 무교회 주의자들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교회에서 상처가 생기면 교회 없이 예수를 믿고 싶은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성경적 사고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상처를 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가정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가정은 상처를 넘어서서 사랑을 배운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무엇이냐구요? 주님의 희생적 사랑위에 세워져 그 사랑을 배워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성화를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본문 26절의 말씀이 그것을 가르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가 물로 더러움을 씻어 내듯이 바울 사도는 주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얼마나 건강한 교회가 되느냐는 것은 결국 우리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말씀을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여 거룩함을 이루어 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말씀 공부나 말씀 나눔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공부도 그것이 우리의 두뇌를 자극하여 정보를 축적하는데 그치면 안 됩니다. 삶의 적용이 없는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께서 우리가 끊임없이 말씀의 거울 앞에 서로를 비추어 보고 서로를 권면하기 위한 공동체를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모일 때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10:24)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셀 교회(목장 교회)를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진정한 공동체를 경험하고 서로를 세워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는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붙들어 주고, 한 사람이 병들면 다른 사람이 치유의 손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전도서 4:10의 말씀이 그런 말씀이 아닙니까.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무교회 주의자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이런 붙들어 줌의 경험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교회주의자들도 결국 자기들끼리 모임을 만들고, 주일 모임을 갖기도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무교회이겠습니까? 이미 그들도 무교회주의라는 하나의 교파, 하나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의 교회 내에는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사실상 주일 예배 외에 모든 관련을 거부하는 무교회주의적 발상을 가진 성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소위 교회 등록도 제대로 않고 설혹 등록을 하더라도 목장 모임을 기피하는 교우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어떻게 서로를 돌아봄과 격려함을 통한 성화를 기대하겠습니까? 이런 분들에게 다시 강조를 드립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성화를 이루어 가는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3. 인간적인 연약함을 영광으로 바꾸는 공동체입니다.

본문 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 우리는 교회에 대한 주님의 궁극적인 기대를 알게 됩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어느 날 우리 모두는 우리의 자기이신 주님 앞에 그의 신부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신랑이신 주님은 눈부신 영광스런 신부인 교회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이미 우리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의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곧 신앙생활이고 교회 생활인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흔히 기독교 교리에서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성화가 완성되는 순간을 가르쳐 기독교 교리에서는 ‘영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 가는 과정을 살아가다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께서는 다시 그분의 은혜로 우리의 부족함을 메워 주시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셔서 그 분 앞에 영광된 존재로 세워 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영화의 체험인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에 살며 간직하던 모든 연약함의 티나 주름을 없이하고 비로소 온전함을 이룬 존재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바로 영화의 날인 것입니다. 

지난 9월 저는 노스 케롤라이너에서 집회를 인도한 후 빌리 그래함 라이브러리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기념관 입구 우편에는 작년 6월에 세상을 떠나간 대 전도자의 부인 루스 그래함 여사의 소박한 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묘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그 묘비에는 자신이 죽기 전 선택했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영어로 씌어 있었습니다.

 “The End of Construction. Thank You for Your Patience.” (공사 끝-그동안의 인내에 감사 드립니다.) 

흔히 우리는 길가다가 공사 중에는 이런 안내판을 보게 됩니다. “공사중-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런데 생전에 루스 여사가 드라이브 하다가 ‘공사 끝’이란 안내판을 보더니 너무 기뻐하며 저 글을 내 비문으로 하겠다고 하셨다는 겁니다. 사실 공사 중인 우리는 성도라 할지라도 우리의 부족함으로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으며 통행에 불편을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느 날 우리의 인생의 여행을 마치고 우리의 구주요 주인이신 주님 앞에 서는 날, 우리는 루스 그래함 여사처럼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공사끝-그동안 인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그 고백이 이루어질 영화의 날을 바라보며 우리는 인내함으로 남은 여정의 걸음을 계속해야 합니다. 때로 공사 중인 인생이어서 피차에 불편함이 있더라도 참고 견디며 우리의 연약함을 영광으로 바꾸어 가는 공동체-그것이 교회임을 잊지 마십시다. 이런 몇 가지 교회됨의 진리를 확인하며 평생을 계속할 교회 공동체 생활의 지침을 안내하고자 합니다.

<1>예수를 구주로 믿고 믿음을 갖게 되신 분들은 침례(세례)로 신앙을 고백하십시오.

<2>교회에 출석하며 아직 등록을 안 하고 계신 분은 이제 새해부터 등록된 가족으로서의 교회 생활을 시작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남녀가 호적 갖지 않고도 결혼 생활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법적인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사람들은 심리적 안정을 갖고 건강한 관계를 통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교회 등록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3>본문 30절에 보면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고 했습니다. 지체는 서로 연결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장 교회에 참여하여 지체로서의 교통을 시작해 주십시오. 몸의 지체들은 상호간의 책임 있는 연결과 소통을 통해 건강한 몸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이제 솔로 신앙생활이 아닌 공동체의 삶을 시작하십시오. 

<4>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교회를 옮길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옮기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사와 같은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는 되도록 이적 증명서를 갖고 이적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우는 일입니다. 

<5>한국 교회에서는 직분을 받을 때 항존직, 혹은 영구 제직을 수여 받습니다. 이런 분들은 특히 먼 지방과 같은 곳으로의 이사와 같은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아닌 이상 교회 이적을 삼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언약을 이행하는 정당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평신도 선교사의 삶을 강조해 왔습니다. 

따라서 사역의 경험이나 우리 보다 더 연약한 공동체를 돕기 위해 가실 경우 이적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동안의 봉사를 목표로 가서 사역을 하신 후 돌아오시는 것이 덕을 세우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더 연약한 공동체들을 돌아보시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지속적으로 격려 하고자 합니다. 할렐루야!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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