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좋은 편을 택하라 (눅 10:38~42)

  • 잡초 잡초
  • 321
  • 0

첨부 1


좋은 편을 택하라 (눅 10:38~42)


영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도시의 한 복판에 교회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교회 바로 옆에 술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마다 떠드는 소리, 음악소리, 주정 부리는 소리가 예배당 안에까지 다 들려오는 바람에 예배를 드리기가 힘들었습니다. 참다못한 교인들이 술집이 이사를 가거나 아니면 장사가 안 돼서 문을 닫게 해달라고 예배 때마다 합심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정말 술집은 기도대로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술집 주인이 자기가 망하게 된 것은 교회가 술집 문을 닫도록 기도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교회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한 것입니다. 드디어 재판이 열리고 교회 대표로 법정에 장로님 한분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로님은"우리가 기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그 기도 때문에 술집이 망했겠느냐"고 펄쩍 뛰면서 항변했습니다. 한참을 듣고 있던 판사는 이렇게 판결을 했답니다."술집주인, 믿음 있음. 교회대표, 믿음 없음." 우습지만 생각해볼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는 그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한 것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 사람을 선택해서 결혼을 했을 때는 그 사람에 대한 믿음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교회를 선택했을 때는 그 교회에 대한 책임감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믿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기도를 했으면 믿어야 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믿지 못할 바엔 기도를 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선택을 했으면 그 좋은 결과를 위해서 노력하는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고 소망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기와 자세를 보면 그 생의 등급을 대략3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3등급인생은<과거에 매여 현재를 사는 사람>입니다. 과거에 잘못 한 자기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서 만부득이 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그 잘못된 과거를 청산해도 다 청산하지 못하고 갑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업보(業報)>라고 하여 전생까지 올라가서 그때에 한 행위에 의해서 오늘 그 값을 받으며 살아간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에서는 과거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내어 놓으면 용서 받을 수 있고 죄 사함을 얻을 수가 있다고 믿는데 이걸 못해서 평생을 과거에 매여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2등급 인생은<미래에만 매달려 현재를 사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너무 막연한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투자하는 것입니다. 먹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무지개와 같은 미래만을 좇아갑니다. 

어떻게 보면 현명한 삶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미래가 없는 현재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현재가 없는 미래는 더 난감합니다. 신앙생활은 엉망으로 하면서 천국은 가겠다고 합니다. 물어보면 천국이라는 미래는 가지고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생각할 여유가 없고 지금은 열심히 벌고 먼 훗날 미래에 잘되면 그때에 가서 예수를 본격적으로 믿어보겠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현재가 없는 미래, 이게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것입니까? 

자, 그러면 1등급인생은 무엇일까요?<미래를 바라보며 현재에 만족하여 하루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이 내 인생에 가장 복된 날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이 지나가면 후회 할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사랑할 것이요, 혼신의 힘을 다하여 땀 흘릴 것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을 위해 최상의 노력을 할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과거란 현재가 있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요, 미래란 현재가 가져다 줄 보상입니다. 그래서 현실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하며 만족합니다. 여러분, 한평생 살아온 가운데 언제가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과거입니까? 막연한 미래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까? 만약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최선을 다하여 실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 가장 만족하신다면 여러분은 과연1등급 인생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꽃은 역시 결혼입니다. 결혼이란 서로 사랑해서 하는 것이고, 또 사랑하겠노라고 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런데 요즘 텔레비전이나 주위의 분들을 보면"어쩌다가 내가 저런 사람을 만나 가지고 이렇게 고생이냐.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이 산다."라고 푸념하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가만히 보면 이 사람은 인생을 결혼한 과거 때문에 사는 겁니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행복하냐고 물으면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과거 때문에 매여 산다는 것은 이렇게 힘든 것입니다. 

사실 가장 행복한 결혼이란"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그래야 되거든요. 그런데<당신은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습니까?>라는 설문 조사 자료에 의하면 대한민국 기혼자의 50% 이상이"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바꾸어 생각하면 절반 이상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미 결혼했다는 과거 사실 때문에 매여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오늘 우리의 불행입니다. 

사랑은 항상 현재적이어야 됩니다.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과거 때문에 살고 돌아 올 재산이 많은 미래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오늘 현재 이대로가 행복하고 사랑스러워서 사는 것이어야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해서도 안 되고"나는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해도 안 됩니다. 오직"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현재적 고백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1등급 인생입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좋았고, 미래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자식의 앞날도, 사업의 형통도,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다만 나는 지금이 행복할 따름입니다. 지금 내가 자식을 사랑하고, 지금 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게 행복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도 그렇습니다. 과거에 내가 교회를 욕했든지 혹은 무슨 일이 있었든지 지금이 중요합니다. 또한 나에게 돌아올 무언가를 바라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교회를 사랑하고, 이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하고 이자세로 변함없이 살아야 이게 1등급성도입니다. 

오늘 본문의[마르다]와[마리아]두 자매 이야기는 수세기에 걸쳐 사람들의 의견에 왈가왈부하는 이야기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문제의 해답은 신앙적인 시각에서 보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 두 자매가 주님을 영접했다는 것과 주님을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자매가 어떻게든 주님의 거룩하신 은혜 앞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다르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신앙 고백과 믿음의 자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시각으로 보면 예수님과 그 일행을 위해서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는 언니[마르다]에 반해 예수님 앞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말씀을 듣고 있는 동생[마리아]를 보면서[마르다]에게는 동정이,[마리아]에게는 얄미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신앙적인 시각으로 두 자매가 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 동기와 자세는 다릅니다. 언니[마르다]는<물질>로써 예수님께 대합니다. 반면에 동생[마리아]는<존경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 두 여인이 전혀 다른 각도이지만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볼 때 이 평가기준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이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시장하셨을 주님을 먼저 생각하는 마르다의 생각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이런 마르다의 정성을 누가 감히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의 이러한 시각을 바꾸어 놓는 예수님의 시각에 의하면[마르다]보다[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문제는 동기입니다. 고백의 행위 속에 들어있는 의미의 문제입니다. 때로는 우리들도 주님 앞에 물질을 드립니다. 수고를 합니다. 희생도 하고 봉사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때로는 사랑을 물질로 표현하려고도 합니다. 즉 눈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주님의 은혜 앞에 보답을 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물질로도 드리고, 봉사로 드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히려 안 드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알아달라고 할 때 문제입니다. 즉 물질도, 봉사도 그 동기가 문제라는 말입니다. 나의 수고와 나의 희생과 나의 헌신을 제발 좀 알아주었으면 하는 불순한 동기가 따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오늘[마르다]를 보세요. 영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아마도 몇 번씩이나 동생에게 눈짓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철없는 동생은 말귀를 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듣고도 모른 체 하는 건지 도무지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급기야 예수님께"동생에게 나를 좀 도와주라고 하십시오."하고 예수님과 동생의 대화를 잘라버립니다. 여기에 숨겨진 심리적 동기가 무엇이겠습니까? 내 수고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음식 준비하는 나의 이 수고를 보아달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인정해달라는 지나친 요구가 그 봉사를 희석시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런가 하면[마리아]는 대접한 것도 없이 다만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조용히 말씀을 귀담아 듣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여자들이 배우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습은 보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지금 이 모든 환경과 전통을 뛰어넘어[마리아]는 가장 충실한 자세로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알아봐 달라 요구할 것도 없고 기대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말씀에 대한 깨달음 뿐 입니다. 이런 동기로 오늘 예수님이 좋은 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보면 말씀을 듣는 자세가 다양합니다. 교회에 아무리 늦게 와도 꾸역꾸역 앞자리에 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들어오면서 뒷자리에 앉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편을 택한 사람입니까? 교회는 가장 앞자리가<금 자리>라고 합니다. 중간은<은 자리>이고 가장 뒷자리는<똥 자리>라고 합니다. 화장실 급한 사람처럼 언제든지 뛰쳐나갈 자세로 앉는 자리란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 둘 중에 누가 옳으냐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더 기뻐 하셨느냐는 겁니다. 만약에[마르다]도 순수한 동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알아봐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자기 일에 충실했더라면 그 나름대로의 칭찬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우선순위이며,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입니다. 그 상황을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마리아는 언니인 마르다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주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동기가 그 모든 비난을 듣지 못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실을 주님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절대로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여러분이 택한 것이 동기가 순수하고 목적이 선하다면 좋은 편을 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분명히 오늘 이 사건은[마르다]로부터 시작되었는데[마리아]에게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들어 온 사람은[마르다]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품에서 사랑을 받는 이는[마르다]가 아니라[마리아]였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엇을 하든지 그<동기>와<목적>이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절대로 빼앗기지 아니 할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