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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섭리(攝理)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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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攝理) (눅 2:1~7)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섭리(攝理)라고 한다. 나를 다스리고 사건과 역사, 우주를 다스리는 것이 섭리다 섭리란 말 속에는 창조, 보존, 관리, 안내, 인도하는 말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무관심하게 이 세상을 내 던져 놓으신 분이 아니다. 이신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다. 더군다나 인간을 구원코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시, 분, 초까지도 관할하신다. 

오늘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보라. 해산할 날이 찬 마리아가 베들레헴의 여관에 투숙하여 있다가 아기를 낳았다. 그 아기를 뉘일 곳이 없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두었는데 참으로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신 정경이다. 이 성탄의 이야기 속에서 왜 주님이 베들레헴 동네의 여관장에 마련된 구유에 누이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구주의 탄생 예언이 예루살렘 큰 도시가 아니고 작은 시골 베들레헴이 되어야 한다고 미가 예언자가 예언했기 때문이다. 

미5:2을 보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 예언을 따라 상고의 근본, 태초의 근본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기 예수로 태어날 때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이다. 태어날 장소가 예언대로 성취되어야 그 분이 다스릴 분임을 알게 되기에 하나님은 섭리하셨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관할하셨다. 

첫째, 이방 왕 가이사 아구스도 황제를 하나님이 움직이셨다. (눅2:1)

눅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로마의 독재자로 이른 난 가이사 아구스도, 그가 영을 내린 이유는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사람들의 수를 헤아려 군대 징병에 사용하기 위해서다.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가이사 아구스도, 그의 이름의 뜻은 지존이란 뜻이다. 오직 지존이란 말은 하나님께만 붙일 수 있는 말인데 가이사 아구스도는 자기만 신인줄 알았다. 이 사람의 본래 이름은 줄리어드 시저의 조카로서 카이누스 옥타비우스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를 높이려고 자신을 아구스도, 즉 가장 높은 자라 부르게 했기에 로마의 모든 장군을 향해 부르던 원수란 말도 다 사라지고 독재자, 지존, 아구스도만이 다스리는 일인 치하의 로마 제국이 등장한 것이다. 온 나라 천하를 한 인간이 신이 되어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시려고 역사 뒤편에서 아구스도를 섭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 시대 지존의 영을 받아 호적을 해야 되는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여행 길을 떠나게 되어지므로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가서 출산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왕도 섭리하신다. 제국의 통치 뒤에서도 섭리하신다. 인간들이 나라의 역사를 끌고가는 것 같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의 맷돌을 돌리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간섭하신다.

  
둘째, 선택받은 다윗의 집 족속도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눅2:4)

호적의 명을 받아 모든 사람이 다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갈 때 요셉도 움직이게 된다. 눅2:4~5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라고 하였다.

유다 지파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다스리는 자가 오는 것이 하나님의 예언의 약속이다. 이미 여자의 후손으로 오는 자가 사단의 머리, 뱀의 머리를 밟는다고 창3:15에 기록되어 있다. 그 뱀의 머리를 밟을 여자의 후손은 아브라함, 이삭, 유다의 혈통을 이어서 와야 누구든지 메시야로 오신 분으로 확증이 된다. 창49:9~10을 보라.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유다가 왕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이 예언을 따라 메시야가 유다 가문, 다윗의 집에서 출생해야 한다.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이 누구인가? 바로 유다 지파 다윗의 집 족속인 것이다. 요셉이 유다 지파의 가문에 태어난 것, 그리고 베들레헴을 고향으로 삼고 성장한 것, 이 모든 것이 내가 자라나고 내가 베들레헴 농촌의 목수의 아들로 성장한 것 같으나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이다. 다윗의 집의 족속이 이때까지 유지되고 선택받은 선민으로 살아온 모든 것이 섭리인 것이다. 유다 족속이 대가 끊어질까봐 다말을 통해 베레스를 낳게 하고 또한 이방 여인 룻을 통해 보아스와 혼인하여 오벳을 낳게 하여 다윗 왕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게 한 것, 따져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선민의 혈통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움직임으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깨닫게 된다. 세속 사회 속에 모든 만민들도 하나님이 움직이시지만 성지 안에 사는 모든 선민들도 하나님이 움직여 가신다는 것이다.
  

셋째, 개인의 크고 자긍 일들까지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눅2:6)

눅2: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리는 것도 ‘그 때에’라고 표현했는데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찻을 때도 거기 있을 ‘그 때에’라고 표현하였다. 베들레헴에 머무는 그 때에 호적의 영 때문에, 요셉이 시골 베들레헴을 여행하는 그 때에, 바로 그 때에 해산 날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한 것, 그리고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 수태고지한 것, 마리아가 그 엄청난 스캔들, 처녀가 잉태된다는 소식을 믿고 받아들인 것, 그리하여 요셉에게 파혼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수용하게 되는 놀라운 사랑, 그 모든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눈물과 찬송, 고통의 과정이다. 정숙한 처녀 마리아가 은혜를 덧입었기에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그리고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수용하고 믿고 시간을 보낸다. 잉태하여 해산할 날이 찬 그 때까지 기다리며 더구나 여행 길에 까지 오른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움직이심이 얼마나 놀랍고 세밀하신가?

때를 맞추기 위해, 요셉과 미라아 그 양가의 부모들까지 생각하고 약혼하는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 때를 맞추기 위해 예언이 성취되어야 하는 때를 맞추기 위해 24시간의 일상의 시간들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 그것은 정말 사람의 생각으로 경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경영이다. 이미 지혜의 문서, 잠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경영이 실수가 없고 세밀하기 때문이다. 

잠16: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그러고 보면 민족도, 가문도 다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나 개인의 일상의 시, 분, 초까지도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우리는 마음의 염려를 너무 많이 하면서 산다. 염려도 하지 말자. 다스리고 섭리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아기 예수의 출생이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지기까지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믿어지면 우리도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계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 

눅12:6~7을 보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두 앗사리온, 두 개의 동전에 팔려가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한 마리의 참새의 삶, 더군다나 참 새 두 마리의 값이 한 앗사리온이다. 그렇다면 참새 다섯이 두 앗사리온 값에 팔린다는 말은 한 마리는 덤으로 주는 것을 말한다. 

두 앗사리온 값에 덤으로 팔려가는 참새, 그 참새 조차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인가? 참새보다 귀한 인생이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다. 정말 머리털까지도 다 헤아려 주심 속에 있다. 나는 내 머리털도 모르고 산다. 몇 개가 있는지, 몇 개가 달아났는지 모르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다 헤아리는 섭리 속에 있다. 이 놀라우신 하나님이 우주를 만들고 우주를 다스리고 우주를 운행하고 나를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예언은 성취되고 약속대로 예수가 베들레헴에 탄생한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세밀한 삶에 너무 감사한다. 이제는 담대해야 한다. 어떤 사건 앞에서도 용기를 내야 한다. 지난 주일 전화가 왔다. 아주대병원, 홍성현이라는 어린 아이가 나뭇가지에 눈이 찔려 피가 흐른다고 응급실에 왔다는 것이다. 그의 눈, 수정체에 나뭇가지가 찔렸다면 1mm 상간에 실명이 될 뻔하였다. 모두 다 울고 탄식하는 마음으로 고통을 지내야 할 뻔한 순간의 일, 그런데 그 눈동자를 보호해 주시고 치료가 진행되고 시력에 지장이 없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아, 정말 이 사건의 섭리는 머리털까지 헤아리신 하나님의 돌보심이다. 그 부모도 안심하고 나뭇가지 휘두른 부모의 마음도 안심을 얻었다. 

섭리란 눈에 잘 보여지지 않는다. 이 눈이 찔린 사건의 섭리가 무엇일까? 그러나 섭리는 지내놓고 보면 알게 된다. 당시는 아프고 놀라워도 지나가면 다스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했지만 감사할 일이다. 자랑할 일이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빋고 삶을 돌아볼 일이다. 

나는 교회를 지은 후 100평 주택 단지를 개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제도 수영오거리에 차선을 넓히고 지하도를 만들려고 깃발을 꽂아놓은 것을 직접 보았다. 나라를 움직이고 도시 계획 진행을 움직이고 주택 공사 사장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섭리다. 겉보기에는 사람이 권력자가 선포한 집짓기, 길닦기이지만 황금어장, 복음의 길을 닦으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대통령과 장관의 뒤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그 섭리 속에 내가 있고 내가 사역자로 신앙인으로 서 있음을 알고 신나는 신앙 생활의 자세를 갖자. 이곳에 오게 하신 섭리를 알고 순종과 헌신을 다짐하자. 나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해를 맞이하자. 섭리의 무대에 내가 주인공으로 쓰임을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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