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대림절] 메시야를 기다리는 삶 (눅 2:25~35)

  • 잡초 잡초
  • 408
  • 0

첨부 1


메시야를 기다리는 삶 (눅 2:25~3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도 모여 예배하는 우리의 모임위에 성령의 임재하심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말씀을 듣는 설교의 시간에도 내리시는 말씀의 감동과 은혜가 가득한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사업가이면서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던 경영자 데일 카네기를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그 카네기의 사무실에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커다란 그림 한 폭이 늘 걸려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여러분도 복사본으로 많이들 보았을 것입니다. 저도 많이 보았습니다. 낡아빠진 배 한 척이 뭍에 척 걸쳐져 있는 그림입니다. 배는 물(水)에 떠 있어야 하는데 이 배는 뭍(地)에 그대로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낡아빠진 노는 모래위에 그냥 던져진 채로 있습니다. 무척 낡은 배입니다. 아마 썰물 때 뭍으로 밀려올라온 것 같습니다. 그런 배 한 척과 노가 뭍에, 물이 아닌 모래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림인데 문제는 이 그림 바로 밑에 씌어 있는 한 줄의 글귀입니다. ‘밀물 때는 반드시 온다’-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아시는대로 바다란 썰물이 있는가하면 밀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서해안도 밀물 때 해면이 몇미터씩 높아집니다. 그 물이 썰물 때는 쏴 빠져갑니다. 그러면 해안 가까이 있던 배는 뭍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바로 이러한 소망, 이러한 기대감, 그것으로 카네기는 큰 용기를 얻고 힘을 얻어서 한평생 그 크고 놀라운 사업을 경영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리 삶의 대부분이 기다림으로 차 있다는 것입니다. 약속된 시간을 기다리고, 소식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특별히 변화를 기다립니다. 어떤 변화가 있어지기를, 그리고 어떤 발전이 있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학자 우드야드의「냉소를 넘어서」라는 책이 있는데 저자는 이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희망은 가장 믿을만한 기질이다. 어쨌든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유일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력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희망은 현재 가지고 있는 자료를 추정해서 예측하는 미래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의 잣대로 보는 미래는 아니고 현재를 추정해서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희망이란 오로지 현재의 상황을 넘어서서 확신하는 미래로부터 주어지는 그 기대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 아직 한 번도 없었던 일이지마는 그러나 기다린다. 그것이 진정한 소망이요 그 소망에 의해서 인간은 사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곧 무엇인가를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막연히 넋을 놓고 기다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다림과 나 자신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있습니다. 기다림이 있다면 그 기다림에 내가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정말 내년에 다시 시험을 본다고 한다면 그래서 더 좋은 성적을 기대한다면, 배전의, 작년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성직자가 되겠다면 아직은 아니어도 지금부터 성직자의 모습으로 살겠다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구체적 능력으로 그 의미가 바꾸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기다림이란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은 생각을 말하는 것이고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사랑과 가슴 그것이 먼저 미래로 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미래에 먼저 가 있습니다. 내년을 기다리는 사람이 생각이 내년에 가 있습니다. 가을을 기다리는 농부는 생각이 이미 가을에 가 있습니다. 추수때에 가 있는 것입니다. 추수때를 생각하면서 오늘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다림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성은 그가 생각하는 그 사람과 닮은 아이를 낳는다고 합니다. 사랑해도 닮고 미워해도 닮고… 시어머니 미워하면 꼭 시어머니 같은 아이를 낳는 다지 않습니까. 생각하는 대로 작용을 합니다. 

영국작가 토머스 하디의 「환상의 여인」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의 내용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작품속의 부인은 시를 좋아해서 시인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시인을 만나본 일도 없습니다. 다만 그 시인의 시를 좋아하여 자꾸 읽으면서 그 시인을 사모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를 낳았는데 보니 그 시인과 꼭 같은 걸 낳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화가 났고 이런저런 오해가 생기면서 일이 복해집니다. 그래 소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여인, 환상 속에 산 여인입니다. 

보십시오. 생각, 중요하지 않습니까. 어느 방향으로 생각합니까? 누구를 생각합니까? 무엇을 생각합니까? 그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강하게 소망할 때 그것이 내 몸에까지 작용을 합니다. 내 유전자까지도 움직이는 것입니다. 내 건강, 내 철학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내 삶은 더욱이 말할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기다리고, 바라고 사느냐! 그것은 오늘 우리들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 나옵니다. 시므온이라는 이 사람이 무슨 장삿속으로나 출세나 세상적인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것을 기다렸습니다. 또한 자기자신을 위해서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위로, 이스라엘민족이 구원받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것도 자기 방법대로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스케줄을 따라서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시므온은 메시야의 세대, 자유, 평등, 번영… 그런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the Messianic age, 메시야 시대와, Messiah- 이 둘의 의미는 굉장한 신학적 논란의 대상입니다.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메시야의 세대를 기다린 것이 아니고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메시야의 세대만 기다립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유대인이 잘못하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합니다. 시므온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오늘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특징이 몇 가지 나타납니다. 그는 기다리면서 먼저 세속생활을 떠났습니다. 경건을 찾았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같은 것은 다 버렸습니다. 세상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새로 말하면 교회에서 기다린 것입니다.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기도한 것입니다. 어디서나 기다릴 수 있지마는 그는 마음과 정성을 모아서 교회에서, 성전에서 주를 기다린 것입니다. 

또한 기다림을 그는 기도로 바꾸었습니다. 기다림은 곧 기도였습니다. 명상이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나아가서는 성령의 지시를 받고 기다렸습니다. ‘죽기 전에 네가 메시야를 보리라’ 하시는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시시각각으로 기다렸습니다. 몇 년을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전설에는 이 사람이 수십 년 기다렸다고 합니다. 정말 계속해서 기다렸습니다.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매일같이 성전에 나가서 기도하고 두리번거리면서 아기 예수를,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다림의 신앙이 귀하긴 하지만 약속을 받지 못했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지개 따라가는 소년처럼 기다리고 끝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마지막이 문제입니다. 약속의 성취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다렸다면 만나야 합니다. 기다렸다면 기다린 바가 이루어지는 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므온의 특별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꿈이 꿈으로 끝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꿈이 현실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기다림에 대한 믿음이 환상이나 dream으로 끝날 수는 없습니다. 

이 시므온의 귀중한 점은 아기 예수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기다렸던 바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숙원을 성취했다는 것입니다. 기다림, 만남, 그리고 영접, 그리고 행복감. 오늘 본문에 보니 그는 아주 행복해합니다. 보십시오. 나는 이 말씀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29절을 보시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 번 읽어보십시오.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메시야 오신 것을 눈으로 보면서 그는 말합니다. ‘나는 이제 평안히 가겠습니다. 이제는 눈감고 평안히 죽겠습니다.’ 그 말씀입니다. 요샛말로 말하면 ‘이젠 소원이 없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소원 다 이루었으니까요. 메시야를 보는 축복을 누렸으니까요. 수천 년에 걸쳐 많은 사람이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눈으로 본 사람은 몇 사람에 그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복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복된 자라고 했습니다. 메시야를 보았으니까요. 예언의 성취를 보았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았지 않습니까.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아무 소원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행복합니다. 이대로 나는 세상을 가겠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시므온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강림절 계절에, 성탄의 계절에 여러분들도 오시는 예수를 영접하고, 앉아 그가 주시는 평안함에 만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놀라운 것은 유대사람들의 태도였습니다. 유대사람들의 소위 메시야 대망사상, 메시야를 기다리는 마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 그들이 이제 정작 메시야가 오시니까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영 마음에 안드는 태도입니다. 헤롯왕도 기다리더니 아기 예수 나셨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를 해칠 생각부터 하지 않습니까. 나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성경을 보다보면 동방박사들 나오는 대목에서 늘 미진함을 느끼곤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 뵈러 왔는데 어디 가야 뵐 수 있는지 유대 넓은 땅에서 알 수가 없으므로 헤롯왕한테 가서 물었더니 율법사들이 말하기를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성경을 잘 보면 이 때 예루살렘이 소란했다 합니다. 

마태복음 2장 3절에 보시면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하였는데, 그런데 그 후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베들레헴으로 가더라.’ 이런 말씀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베들레헴입니다’ 말해놓고는 저들은 떠들기만 하고 한 쪽에서는 죽일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이게 바로 옛날이나 오늘이나 잘못된 무서운 태도입니다. 왜요? 자기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헤롯왕, 왕 되신 예수께서 오셨으면 자기가 물러나야 하겠는데 이거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제사장 자기가 지금 영광을 누리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제사장으로 오시면 자기가 자리를 양보해야겠거든요. 자기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도 수천 년 동안 기다렸던 메시야이건만 오시는 순간 해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기다리기는 하면서도 오시니 영접하지는 않습니다. 기다리기는 하면서도 그것이 구체화되는 것을 저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 안에 오시는 예수를 저들은 배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기다렸다면 기다리던 분이 오셨을 때 내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내게 책임이 있습니다. 어쩌면 직업을 버려야 되기도 하고, 어쩌면 생명을 내놓아야 되기도 하고, 어쩌면 일생을 다 예수님께 바쳐야 하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안주함에서 떠나고 일상에서 떠나는 희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변화를 기다리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밝은 미래가 오기를 바라면서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내 몫이 작아질까봐, 내가 잘못될까봐... 이래서 참된 진리를 수용하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가 없었더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시므온은 참 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다렸지요, 만났지요, 기뻐했지요, 충만했습니다. 이거 놀라운 얘기가 아닙니까.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만족해합니다. 이제는 현재적입니다. 현재에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일에 바실레이아 슈링크가 세워놓은 ‘메테르 하우스’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수도원입니다. 이것을 창설한 슈링크의 저서에 「사랑의 승리」라고 하는 작은 책이 있는데 그 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중국에 공산주의혁명으로 인해서 핍박이 많을 때 교회 장로님 한 분이 끌려들어가 많이 맞았습니다. 아주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았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예수를 부인하고 전도 사업을 중단하면 살려주겠다고 하건만 듣지 않아서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신앙을 지키느라고 엄청난 매를 맞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 영문 모르게 석방이 되었습니다. 교회로 돌아왔는데 모든 교인이 나와서 영접하고 반가워하면서 온몸에 낭자한 피를 닦아주고 씻어주는데 놀랍게도 그렇게 많이 맞았는데도 상처 하나 없고 피로 얼룩진 것을 닦고 보니 거짓말처럼 깨끗한 것입니다. 

모두들 어찌된 일이냐고 놀라워하니까 장로님, 빙그레 웃으면서 매맞을 때마다 스데반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었다면서요?” 그가 계속 스데반을 사모하다보니까 자신도 모르게 천사의 얼굴이 된 것입니다. 그래 석방된 것입니다. 신비로워서 석방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는 그렇게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갈 때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그 상처난 자리를 쓰다듬어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행복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앞에서 행한 그런 간증이 그 책에 실려 있습니다. 

여러분, 영접한 사람,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그리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속에 오늘도 그렇게 주의 위로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는 것은 기다리고 사모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다림의 내용이 오늘 현실에서 ‘바라보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 나타나게 될 줄 믿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오늘 보니 시므온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같은 구체적인 은혜, 그 거룩한 약속의 성취를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런 소망과 기다림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이 기다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분명한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다림은 막연한 환상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기다림으로 자신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행동이 그 기다림의 미래에 가있으므로 성취된 미래가 오늘의 삶에서 나타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기다림을 위하여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기다리며, 기대하면서도 오히려 나 자신이 그것의 방해가 되는 자리에 있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감리교회의 현안문제들이 감독 선출의 방법에서 시작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감독선거의 부정적인 요소들은 제거하자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런데 번번히 차기 감독으로 선출될 유력한 목사들의 그룹이 이것을 반대하여 무산됩니다. 변화를 바라면서도 자신을 내려놓치 못하는 모습이 진정한 변화를 저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에 걸 맞는 모습을 갖추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기다림이 우리의 현실이 될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시므온 처럼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영접하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더 바랄 것 없는 평안함과 만족함이 여러분에게 채워지는 강림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