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인생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히 11:22)

  • 잡초 잡초
  • 427
  • 0

첨부 1


인생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히 11:22)


유명한 거장 화가인 미켈란젤로가 씨스틴 채플의 그 천장 벽화가 거의 완성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작품은 이제 끝난 것으로 보여 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천장을 향해서 마지막 작업을 위한 손질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도왔던 조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이젠 끝나지 않으셨습니까?" 
"자네 눈에는 끝난 것으로 보이는가? 내 눈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네" 

그리고 몇 달을 더 그는 계속해서 이 작품 에 매달렸습니다. 마침내 작업은 완전히 마쳐진 것으로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작업 도구를 치우지 않고 계속 천장을 응시하면서 그 장소를 맴돌았습니다. 다시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이제는 정말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미켈란젤로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내 눈에는 끝났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지" "주님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지"

우리는 언젠가 모두 우리의 일생을 결산하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라도 우리는 지나온 시절을 종종 되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후회 없는 결산을 위한 일종의 중간 결산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작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라는 한 걸출한 신앙인의 죽음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단 한 구절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여기 임종시란 말은 단순히 죽음을 맞이한 때라는 표현과는 달리 '결산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세요. 요즘 연말이 되면 회사에서는 회계장부를 감사하고, 정부도 관계기관의 국정감사를 합니다. 개인이나 모임, 단체도 반드시 결산이 있습니다. 이 결산을 잘할 때, 그 결산을 통해 보람도 얻을 수 있고, 살아가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면서 이 땅의 결산도 잘 해야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사화복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결산입니다.

지금 요셉은 자신의 죽음 앞에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의 결산을 하고 있습니다. 이 결산은 그의 후손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요셉이 인생의 무대에 등장할 때는 하나님의 꿈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요셉의 어린 시절에 사람들은 뭐라고 그를 불렀는지 아십니까? 

창37:18-19절을 보면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요셉을 가리켜 '꿈꾸는 자'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인생의 무대에서 내려 올 때 이 마지막 임종 때에 그 자신은 세상을 떠나가지만, 이 땅에 남은 자들에게 또 하나의 꿈을 펼쳐 보입니다. 어떤 꿈입니까? 첫째는 이스라엘 자손이 떠날 것을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요셉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남다른 사랑으로 다른 형제와는 달리 채새 옷을 입고 자랄만큼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이를 시기하는 형들은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살도 아닌 형들에게 인신매매로 이방 땅에 던져진 어린 시절, 요셉이 겪어야 할 그 충격은 말로 다 표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낯선 이방 땅 애굽의 한 노예 시장에서 자신을 사갈 주인을 기다리는 기구한 운명에 빠진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찌 그뿐입니까? 노예로 팔려간 집에서 신임을 얻어 이제 좀 살만하니까, 주인의 아내의 모함으로 '성폭행미수범'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꼼짝달싹도 못한 채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악명 높은 애굽 왕 바로의 지하 감옥에서 언제 풀려날지, 아니면 비참하게 죽을지도 모르는 어떻게 보면 짐승보다 못한 생활도 하지 않았습니까? 요셉의 일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말 기구한 인생입니다. 그는 꼬일 대로 꼬이고, 비틀릴 대로 비틀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요셉의 인생은 마감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노예 생활을 했고, 죄수 되었던 땅에서 총리대신이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던져놓은 형제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흉년으로 고통 당하는 애굽을 경제 강국으로 만드는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혀 놓았습니다. 그런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얼마나 아쉬었든지 이방 사람인 애굽 사람도 무려 70일간이나 통곡하며 슬퍼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은 바로 요셉이 후손을 위해서 유언을 하고 세상을 떠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인생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인생이 평탄하지 않았던 요셉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한결같은 신앙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도, 노예였을 때나 국무총리가 되는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도,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함께 있을 때도, 어릴 때나 늙었을 때도, 살아있을 때나 죽는 순간의 때도 변함 없었습니다.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면 달라집니다. 출세를 하거나 혹은 사업에 실패하면 변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직분을 받으면 사람이 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떤 것이 달라진다 해도 변함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변함 없을 수 있었던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는 요셉이 삶을 마감하는 장면을 클로즈업하면서 바로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잠 29:18의 말씀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묵시라는 말이 곧 비전이요, 꿈입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의미합니다. 꿈이 없으면 인간이 경고 망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전이란, 꿈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꿈이 없는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꿈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항상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삶은 방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금년 2월 달에 우리나라 국보 제 1호인 남대문이 불탔잖습니까? 이제 원형을 살리는 설계를 마치고 한 3년에 걸쳐 복원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불이 난 당시 방화범은 한 노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을 때가 없다고 이성을 잃은 한 늙은 광인이 그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이 한층 더 컸습니다. 임진왜란 때나 병자호란 때도 오랑캐의 그 침략에도 꿋꿋이 그 자리를 버터 주었는데 그리고 6.25 동족상잔의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도 지켰 왔는데 그렇게 타버리니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단순히 국보급 목조 건물 하나가 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가 타고 자존심이 타고 우리의 미래가 타 버린 것 같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꿈이 없기에 자기 한 사람이 지금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꿈이 없으면 목회자이든, 교인이든, 어떤 인간이든 방자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꿈을 가졌다, 가지지 않았다 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어떤 값을 치루고 있습니까?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던 헬렌 켈러에게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앞이 보이지 않는 생활보다 더 불행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 때 헬렌 켈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꿈이 없이, 비전이 없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은 건국 232년 만에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 보도를 통해 아셨겠지만, 오바마의 부모는 두 살 때 이혼했고, 어머니는 그 후 인도네시아 남자와 재혼하는 가정에서 혼란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이 속에서 극심한 정체성 갈등을 겪으면서 마약까지 접하는 혼돈스런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오바마를 움직여 온 것은 무엇보다 꿈입니다. 그는 꿈을 가슴에 품고 하버드 법대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47세에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입니다. 그가 이번 선거에 내건 슬로우건은 ‘변화’였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변화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그의 연설 내용을 보세요."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깜깜한 밤에 자유를 향한 길을 뚫으면서 노예들과 노예폐지 운동가들이 바로 그렇게 속삭였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먼 곳의 해변에서 출항하면서 이민자들이 그렇게 노래했고, 험난한 광야를 가로질러 서부로 향하던 개척자들이 그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이 미래를 향한 비전의 메시지가 국민들의 가슴에 희망의 샘물로 솟구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비전이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포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연초에 꿈을 세웠다 할지라도, 일주일이 지나면 25%의 사람이 포기하고, 한 달이면 45%의 사람이 포기를 한다고 합니다. 연말이 돼서 조사해보면 85%에 해당하는 사람이 포기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인생이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삶의 한 복판에서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견뎌야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느 신문에 실린 글인데 참, 마음에 와 닿아서 소개합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도끼 자루를 구하러 산으로 갔습니다. 따라가던 손자가 발이 아파오자 말했습니다. "여기도 나무가 많은데 왜 자꾸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세요?" 할아버지는 말없이 계속 산길을 올랐습니다. 이윽고 산 정상 가까이 있는 절벽 위에서 할아버지는 바위 틈새를 뚫고 나온 나뭇가지를 어렵사리 잘라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산을 내려오며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말했습니다. 

"절벽의 바위틈을 뚫고 나무가 뿌리를 내려, 가지를 뻗으려면 얼마나 견뎌야 했겠니. 비바람도 폭설도 추위도 더위도 모두 견뎌낸 그놈을 잘라 도끼자루로 써야 평생 써도 부러지지 않는단다. 매사 모든 것이 견딤이 있은 연후에 쓰임이 있는 법이야." 견딤은 은혜입니다.

견딤이 은혜인 까닭은 똑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잘 견뎌내고, 어떤 사람은 포기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6년 간 계속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로 약 1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의미 치료로도 세상에 알려진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랑클을 알것입니다. 이 빅터 프랑클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테레지엔슈타트,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독일의 카우페링과 튀르크하임 등 죽음의 수용소를 무려 네 군데나 거치고서도 살아남았습니다. 그가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살아야 할 의미’를 잊지 않고 견뎠기 때문입니다. 자기 미래에 대한 비전과 믿음을 상실한 사람은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다시 22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는 헬라어로 ‘엠네모뉴센’입니다. 이 말은 ‘생각나게 하다, 숙고하다, 기억하다, 언급하다’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심사 숙고하며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자녀들에게 이 애굽 땅을 떠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갈 때 자신의 해골을 파서 함께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셉이 창세기 15장 13-14절에 있는 말씀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 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무슨 말입니까?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 뒤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며 고통을 당할 것을 보았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400여 년이 될 것도 알았습니다. 바로 그 때에 그들에게 가장 필요하게 될 것은 하나님의 약속임을 알았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들을 고통과 탄식의 땅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다는 확신만이 그들로 죄를 범하지 않고 희망 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할 것이었습니다. 마치 혹독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약속과 꿈으로 이겨내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예언하고 그 증표로 자기 해골을 가져가게 함으로 얼마나 분명하게 일어날 일인지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관심은 애굽이 아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있음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이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았던 것은 또 그것을 비전으로 삼았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딤전 4장에 보면 임종을 앞둔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말합니다. 그는 세상에 떠날 길이 가까웠다고 할 때 바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 그리워집니다. 한번 더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겨울 전에 속히 오라.' 그리고 올 때 한 가지를 부탁합니다. "가죽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그것은 성경책입니다. '이제 마지막 시간에 또 성경만을 읽어야겠다.' "가죽종이에 쓴 구약 성경, 가져오라." '그것을 읽고 생을 마쳐야겠다' 생각을 합니다.

이제 이 연말 과연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시겠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요즘 동창회다 망년회다 하여 분주히 다니지 말고 더욱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하겠습니다. 연말이 가까이 오면 이것 저것 해야 할 일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이 해의 마지막 시간들 속에서 조용히 말씀 앞에 무릎을 꿇어 보십시다. 성경책을 가까이 하십시다. 거기에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다. 종말을 아는 사람은 영적인 일에 힘을 씁니다. 영원한 세계, 하늘 나라를 준비할 줄 압니다. 말씀이 능력입니다. 그 말씀으로 천지가 창조되었고 그 말씀 앞에 귀신은 놀라 도망가고 그 말씀 안에서 새 역사가 일어납니다.

스코틀랜드 보너 목사의 성경 애찬가는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내가 피곤할 때 성경이 나의 침대가 되고/어두움이 있을 때에 성경은 나의 빛이 되고/내가 주릴 때에는 나에게 생명의 떡이 되었노라/두려울 때에 성경은 나의 방패가 되어 주었고/내가 병들었을 때는 고쳐주는 양약이 되었고/고독할 때는 성경에서 내가 많은 친구를 얻었노라/성경은 무지한 나에게 학교가 되어 주었고/ 풍파 일어날 때는 성경은 나의 피난처 되었노라/성경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진리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꿈을 가지고 삶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미래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진 사람은 그 꿈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 꿈은 항상 입으로 고백되어지고 그 삶을 통해 증거 되게 되어 있습니다. 입에 항상 그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워도 내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의 꿈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항상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꿈을 고백할 뿐 아니라 그 꿈을 향해서 끈기 있게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굴복시키는 삶을 감당합니다.

우리의 생명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 너머 부활의 영광을 보시고 그 고난의 길을 당당하게 걸으셨습니다. 세상은 그를 십자가로 내몰았지만, 십자가는 실패의 자리가 아니요 패배의 자리가 아니라 승리의 자리였습니다. 이제 한 해를 결산하는 자리에서 누가 무엇을 말했고, 지금 세계는 어떨 것이다라는 수많은 예측이 일어난다 할찌라도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내 인생의 결산 때 정말 후회 없는 자리에 설 수 있는냐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요셉의 마지막 따나가는 뒷모습이 ... 저는 정말 부럽습니다. “아! 나도 저렇게 살다가 저렇게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에 솟구치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한 해를 뒤로하고 떠나가는 나의 뒷모습이 어떤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그것이 장차 하나님이 부르실 때 떠나갈 ‘나의 뒷모습’에 대한 예고편인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만족하십니까? 여기 요셉처럼, 아니 비슷하게나마 아름다운 뒷모습입니까? 그렇다면 더 아름답게 가꾸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혹시 나 자신조차 안타깝게 여길 만큼 부족한 모습입니까? 그래도 아직은 괜찮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시간을 더 주셨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있고, 남은 생애가 있습니다.

이제 이 한 해를 정리하고 또 다른 한 해를 향해 나아가는 송년의 계절에 우리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 하리라 새롭게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