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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과 함께하는 성도의 행복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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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함께하는 성도의 행복 (눅 19:1~10)

 
오늘 12월 첫 주일은 2009년 새 회기가 시작되는 날 입니다. 전도서 1:4에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와도 땅은 영원히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과 연대가 바뀌어도 교회의 이상이나 추구하는 목표가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새해에도 세상이나 환경에 변화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의 목표를 지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대망의 새해에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을 다짐합니다. 본문 성경에 나오는 삭개오의 사건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것인가를 실례로 보여줍니다. 

1.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른 것만큼 그 조건도 다양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의 기준을 외부적인 조건에 두기 때문에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으로는 불행에 시달립니다.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1) 하나님과 격리된 자입니다.

2절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는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권세를 가진 자요, 또 부자로 소문이 날만큼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권력과 재력을 소유했을 경우 행복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세상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삭개오의 경우 돈과 권력은 붙잡았으나 하나님과는 격리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것을 다 가지고도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상실된 인간으로 분류됩니다(롬 1:28). 예레미야 17:5에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사람에게서 소외된 자입니다.

대체로 돈이 많거나 권력을 소유한 사람인 경우 그를 따르고 그 앞에서 아첨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인격적으로 존경하지 않고 외부적인 조건을 보고 따르는 경우 상황이 달라지면 순식간에 다 없어져버리고 맙니다. 삭개오의 경우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다음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비방하였습니다. 

본문말씀 7절에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그 앞에서 굽실거리며 존경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무시하고 외면하였습니다. 그 당시 사회적인 통념으로 “세리와 죄인”이라는 말이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눅 15:1).

3) 마음에 갈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길거리로 뛰어나온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는 평소 세관에 앉아서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일에 몰두 했습니다. 세리장으로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는 일에 혈안이 되었으며 부당하게 획득한 재물을 가지고 행복의 가치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그 마음속에 있는 영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마음속에 영적인 성품을 간직하게 하였습니다. 전도서 3:11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도 영혼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행복이 없습니다.


2. 행복의 원인자 예수님

삭개오의 인생은 자기의 가치관에 따라서 살아온 생애였습니다. 그 결과 마음속의 갈등과 불안에 허덕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만난 이후부터 오직 예수님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행복의 원인자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이 만나주셨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의 지나가시는 길에 나갔지만 키가 작은 신체적인 악조건 때문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뽕나무)위에 올라가서 그 밑으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밑에 이르자 쳐다보시며 그를 속히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미루어 볼 때 우선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 나선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것까지 미리 아시고 그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삭개오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노력해도 예수님께서 외면하시거나 모른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만나주신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2)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신 것은 삭개오에게 엄청난 행복이었습니다.
⒜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의 친구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깜짝 놀란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셨나이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고 하였습니다(요 1:46-48). 

⒝ 자기 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입니다. 요한복음 10:3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 잃은 양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3에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잃은 양을 향한 주님의 깊은 애정과 간절함의 표현입니다(행 26:14).

3) 함께 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 주시고 함께 유하신다는 것은 임마누엘의 은총을 뜻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신 후 어린아이처럼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은혜위에 은혜”라고 합니다(요 1:16). 예수님께서는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계 3:20). 


3. 예수님과 함께하는 행복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추구했던 권력이나 재물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체험입니다. 이제부터 그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통하여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1) 임마누엘의 체험

예수님을 먼발치에서 쳐다만 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삭개오는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유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너무나 큰 기쁨과 감동을 느꼈습니다. 본문 6-7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며 비방을 해도 삭개오의 집에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캄캄한 곳이라도 예수님의 밝은 빛이 비추게 되면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질병과 죽음과 슬픔에 잠겨 있던 베다니촌 나사로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시니 부활과 생명의 환희가 넘쳤습니다(요 11:1-44).

2) 회개와 섬김이 실천되었습니다.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그 속에 있는 죄와 허물을 고백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숨겨둔 죄로 인하여 고민하던 사람이 이를 자기 입으로 실토하고 나면 그때부터 참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세관장이었던 삭개오가 남의 것을 토색하고 착복한 것을 양심적으로 자백하였습니다. 그는 또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하여 책임 있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율법에 따라서 4배나 변상하겠다고 하였습니다(출 22:1). 그것 외에도 자기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실천하려 한 것입니다. 베풀면서 느끼는 행복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3) 예수님께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후로 삭개오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거룩하다, 구별되었다는 뜻(Ζαχαιος)의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이름과 반대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심으로 명실상부한 삭개오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하여 그도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였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하시고 완전한 회복을 선언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집을 나간 탕자처럼 잃어버린 자의 위치에서 회복된 자의 위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특권과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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