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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이쿠메네(사람이 사는 모든 땅) (엡 2: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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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쿠메네 (엡 2:14~22)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이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 늘어가는 담장

대림절 둘째 주일 아침 주님의 평화와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살아온 삶의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품 넓으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습니다. 예배는 영혼의 심호흡입니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면 긴장이 풀리듯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숨결로 몸과 마음을 채우면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소생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정진규 시인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4월이 되어 왈큰왈큰 알몸 열어 보이는 진달래꽃을 바라보다가 급기야 봄 신명에 지펴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나 한 사날 잘 열리고 있어
누구나 오셔, 아름답게 놀다 가셔! 
<몸詩․14> 중에서

저는 우리의 삶은 이처럼 누군가를 향한 초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자꾸 옹색해져갑니다. 너무 분주해서, 혹은 자기 일에 빠져 다른 이를 위한 여백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시간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무엇보다 마음이 없습니다. 만남이 줄어들면 관계도 뜨악해집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모처럼 만나면 나눌 이야기가 없습니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마음의 담을 쌓으며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인정이 오고갑니다. 먹을 것도 나누고,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눕니다. 담장을 높이 둘러치는 이들은 나눔을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일 년에 몇 번 강남에 살고 있는 家兄 집을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걷다보면 성채처럼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집들과 만나게 됩니다. 담장 주위에는 감시 카메라가 돌고 있습니다. 담장의 높이는 어쩌면 불안감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불안감은 물론 타인에 대한 불신입니다. 험한 세상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하지만 불신과 불안을 안고 사는 삶이 그렇게 흔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고급 아파트나 건물에 들어가려면 마치 검문소를 통과하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도시는 어쩌면 인정의 담벼락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용산구청에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볼 때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집니다.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 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오니 제발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소통을 거부하는 그들의 관료적 태도가 못마땅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는 분리의 장벽이 무너져야 한다고 늘 주장해왔습니다. 두께 1미터, 높이 8미터, 총연장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는 소통을 거부하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땅에도 수많은 경계선이 쳐져 있습니다. 종교, 문화, 경제 등으로 구획된 계층 사이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지고 있습니다. 


• 당신의 입상, 나의 입상

주님을 기다리는 이 대림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와 ‘나’를 가르는 담장을 허무는 일입니다. 에베소서의 기자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면서, 그 평화가 어떻게 이룩되는 것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14a-15a)

여기서 주님은 담을 허무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신학자는 예수님의 행적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경계선 가로지르기’(crossing the border)라고 말합니다. 남성과 여성, 의인과 죄인,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유대인과 이방인…주님은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소통의 틈을 만드십니다. 도저히 만날 수 없었던 것 같던 사람들이 만나게 되고,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서로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도록 하셨습니다. 불경하다 할지 몰라도 주님의 모습은 지렁이를 닮았습니다. 지렁이는 딱딱해진 흙을 헤집어 부드럽게 만들고, 그 흙을 삼킨 후 부드러운 분변토를 내놓아 땅을 기름지게 만듭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몸으로 사람들 사이에 틈을 만들고, 그 사이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말 장난 같지만 이 말은 어떤 본질적인 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죄는 나누고, 사랑은 하나 되게 합니다. 세상은 갈기갈기 찢겨 있습니다. 분쟁과 테러의 소식이 끊이질 않습니다. 인류는 얼마 전 뭄바이 테러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 총격은 지금 이 시대가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창4:23-24)고 자랑했던 라멕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미움과 증오의 시대를 사랑과 신뢰를 통해 극복하려는 의지를 갖는 것입니다. 

송나라(960-1279) 때 한 여인은 자신을 향한 남편의 사랑이 소멸되는 것을 깨닫고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바쳤습니다. 결혼 당시의 사랑에 다시 불을 붙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 덩이 진흙으로/당신의 입상(立像) 만들고/나의 입상도 만들고//당신의 입상, 나의 입상/으깨어 합쳐/다른 진흙덩이 만들고//이 흙덩이로 다시/당신 입상 만들고/나의 입상 만들어요./이제야/“당신이 내 안에”/“내가 당신 안에.”(C.S. Song, <<아시아의 고난과 신학>>134-5쪽에서 재인용)

설명하지 않아도 그 절절한 느낌이 다가옵니다. 으깨어 합쳐져 다시 한 덩이가 되고, 다시 빚어지고 싶은 그 마음 말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당신이 내 안에’, ‘내가 당신 안에’라고 말할 수 있는 거겠지요. 하나님은 ‘하는 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하는 분이 아니라 늘 우리를 위해 뭔가 새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하셨던 것입니다. 


• 하늘 다리

예수님이 꿈꾸셨던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인간 가족으로서의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공존의 세상이었습니다. 부자 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착취하는 일도 없고,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도 없고, 힘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억압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을 자랑하지도 않지만 도움 받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여러분께는 낯선 단어인 ‘오이쿠메네’로 잡았습니다. 원래 이 단어는 ‘살다, 거주하다’라는 뜻의 ‘oikeo-’ 혹은 ‘집’을 뜻하는 ‘oikos’에서 온 말로 ‘사람이 사는 모든 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다양한 정치적 함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받는 지역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리스 문명권 바깥의 사람들은 물론 야만족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리스가 무너지고 로마제국이 등장했을 때 이 단어는 로마 문명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기독교에 의해 받아들여졌을 때는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통치에 의해 이룩되는 새로운 나라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종의 장벽, 종교의 장벽, 문화의 장벽, 계층의 장벽, 남녀의 장벽을 당신의 몸으로 무너뜨리시고, 모두가 기쁘게 만나 생을 축제로 바꾸는 세상을 꿈꾸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지개 백성입니다. 빨주노초파남보, 각각의 색깔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절묘한 조화, ‘和而不同’의 공동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이런 조화의 촉매이십니다. 주님의 마음이 들어가면 미워하던 사람들도 화해하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이 들어가면 원수도 죄인도 친구로 변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런 새로운 세상의 촉매제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이고, 또한 희생입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욕심의 종살이를 하면서 만들어 놓은 분리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그 다리는 죽음으로 이룬 다리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된 사람들의 삶의 특색은 배려(Fürsorge)입니다. 그들은 ‘나 좋을 대로’ 살지 않습니다. 늘 남의 유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배려야말로 이웃들을 향해 내미는 마음의 손입니다. 식상할지 몰라도 또 반복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남의 배고픈 사정을 헤아리면서 남을 위해 먹을 것을 남겨두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교우 한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와 술래잡기 놀이를 했더랍니다.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아 두리번거리다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부엌에 슬쩍 숨어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혼비백산하여 뛰쳐나왔습니다. 불기 없는 아궁이 속에서 반짝이는 눈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양이였습니다. 고양이는 그 속에서 몸을 풀고 새끼들을 돌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옛날부터 고양이는 불길한 짐승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란 그의 마음에 공포심이 생겼습니다. 쫓아냈다가는 흉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조바심에 전전긍긍하는 데 자초지종을 눈치 챈 아버지가 단호하고도 엄격한 목소리로 새끼 낳느라고 사지에 갔다 온 생명인데 잘 보살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어머니에게 ‘죽을 쒀 오라’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그 경험은 그의 일생을 비추어주는 등불이 되었을 겁니다. 고통에 처한 생명을 차마 외면할 수 없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중한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성탄절 선물을 기대할 수 있다면 이런 마음을 청하면 어떨까요?


• 아씨시 십계명

우리는 한반도에 겨울이 오고 있음을 불안스럽게 직감하고 있습니다. 금강산 관광길이 막히더니, 개성 관광도 중단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개성 공단도 닫힐 위기에 처했습니다. 4년 전 개성 공단에서 나온 첫 번째 공산물인 냄비를 사기 위해 줄을 섰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면서 통일의 씨가 뿌려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문이 막 닫히려고 하고 있습니다. 현대아산의 정주영 회장이 소 떼를 몰고 넘음으로 열렸던 저 휴전선의 통문이 다시 닫히려 합니다. 정부는 북한이 변화될 때까지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개성 공단에 들어갔던 중소기업들의 피눈물나는 사연에는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땅을 분리장벽으로 둘러막는 것처럼, 불신과 증오의 장벽을 더 높이 쌓아올리려 하는 것은 아닌지요? 사랑이 아니고는 어떤 길도 열리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의 자리에 서보아야 합니다. 내 제안이 그럴싸하고 그 뜻이 선하다 해도 다른 이들이 동의하지 않거나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늘 타자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7:12). 주님은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야말로 성서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002년 이탈리아의 소도시 아씨시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발의로 다양한 종교 전통을 가진 이들이 함께 모여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 모임을 열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온 200여명의 대표들은 프란체스코의 마을인 그곳에서 “평화를 위한 아씨시 십계명”(Assisi Decalogue for Peace)을 발표했습니다. 교황은 나중에 그것을 각국의 정상들에게 보냈습니다. 

이 문서는 인류가 사랑과 증오 가운데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서, 증오는 파괴하고 사랑은 세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호 용서와 조화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섯 번째 계명은 이렇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는 장벽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하면서 솔직하고도 끈기 있게 대화에 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다양한 타자들과의 만남은 더 깊은 상호 이해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We commit ourselves to frank and patient dialogue, refusing to consider our differences as an 
insurmountable barrier, but recognizing instead that to encounter the diversity of others can 
become an opportunity for greater reciprocal understanding). 

주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한 가족, 곧 오이쿠메네입니다. 주님은 이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하나됨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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