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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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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마 11:28~30)

요즘 교회에서 어머니 기도회를 하지 않습니까? 불과 두 달 정도 지났는데 자주 일어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기도 시간에 한 성도가 이 좁은 의자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조용히 울기 시작하더니 점점 울음소리가 커지고 나중엔 목까지 컥컥대는 흐느낌 속에 빠져드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염려가 되어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리번거려 보니까 그 앞에 누군가가 갔다 놓았는지 벌써 휴지 한 통이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그의 눈물과 흐느낌의 기도가 너무 아파서 다가가서 손을 얹고 기도해 주려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시간에 방해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그냥 그 광경을 보면서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강한 것 같지만 내면은 참 약한 존재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자체 발사대를 만들어 우주 로켓을 쏘아 달까지 간다는 프로젝트를 내 놓으니 우리 인간은 참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또 수 백만, 수억 개의 정보를 조그만 칩에 저장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두뇌는 신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거 1세기 전 만해도 평균 수명이 40세도 안 되던 나이를 80세까지 끌어올린 것만 봐도, 거의 하나님에 버금가는 능력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대단한 존재입니다.

반면에 인간에겐 나약하고 작은 모습도 있습니다. 주체하지 못하는 슬픔 앞에서 몸부림치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서운 고독 앞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심각한 질병 앞에서 하얗게 질려 버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나 가엾을 정도로 나약하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표현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많은 성도들이 모여드는 교회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무거운 짐, 뼈아픈 아픔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상처가 있고, 그 어떤 누구에게도 없는 자기만의 상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다 괜찮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 상처가 있어요, 질 그릇 같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계 정복을 꿈꾸던 나폴레옹도 세인트 헤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 “나는 지금까지 단 일주일도 행복한 날이 없었다. 저기 바닷가에 넘실거리는 물결은 세상 사람들의 눈물이요, 저기 부는 바람 소리는 세상 사람들의 한숨소리로구나”라고 한탄했던 것입니다.

1.인생의 무거운 짐을 어떻게 해야합니까? 지난 18세기 영국이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다닐 때, 수없이 많은 배들을 띄웠습니다만, 그 중에는 적지 않은 많은 배들이 침몰되곤 했습니다. 배들이 자주 가라앉게 된 큰 이유는 짐을 너무 많이 싣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사무엘 프림솔(S. Plimsoll)이라는 사람이 이를 연구하고 조사하여 영국 국회에 한 개의 법안을 제출, 통과시켰습니다. 그 법의 이름이 적재 한계선(Load Line)이라는 법이었습니다. 일정한 짐을 실은 배가 일단 물 위에 띄워지면 그 배가 물에 닿는 부분에 선, 줄을 긋고, 그 이상은 절대로 초과해서 짐을 더 못실게 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큰배를 보면 매 아래에 노란선, 하얀 선이 그어져 있지요? 이 선을 프림솔이란 사람이 제안했다고 하여 프림솔 line이라고 합니다. 일단 이 선이 물에 닿으면 그 이상 짐을 실을 수 없습니다. 이 선은 생명선과 같습니다. 그 이상 짐을 실으면 배가 가라앉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 조그만 풍랑이 일어도 쓰러지고 뒤집혀지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쉬기를 원합니다. 피곤한 영혼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며 살다가 어느 곳에 짐을 내려놓고 쉬기를 원하지만 쉴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와 같은 연약한 인생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인생의 본질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수고한다’는 말은 원문에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사서 고생하는 능동적인 고생을 의미합니다. ‘무거운 짐’은 원문에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즉 피동적인 고생입니다. 원치 않는 환경 속에서 수난을 겪는 그런 고생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고난을 취하든지, 원치 않는 고난을 받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2. 지금 이 연약한 인생들에게 절망하는 인생들을 향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보세요. 두 팔을 벌리시고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에게는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감히 이런 절대적인 초청과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초청이요 절대적인 약속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돈 많은 사람은 오라. 많이 배운 사람은 오라. 건강한 사람은 오라 하셨다면 어떤 사람은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과거에 우리가 누구였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는 것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지금도 내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모습이 되었든지 그것 가지고 무어라고 다그치지 않습니다.

여러분! 전도서 2:22-23절에서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쉼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정신적인 쉼도 필요하고, 육신의 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필요한 것은 마음의 쉼입니다. 육신이 아무리 편하게 살아도 마음이 편치 못하면 참다운 쉼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진정한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환경오염을 피할 수 없듯이 정신 오염이라고 할 수 있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회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요구하나 우리는 그 요구에 응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는 자꾸 쌓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에 쉼을 얻는 비결을 갖고 이 현실을 대처하지 못하면 비탈을 올라가던 소가 주저앉아 버리듯이 언제 우리도 모두 주저앉아 버릴지 모릅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 앞에 나오면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마태11:29에서의 ‘쉼’은 희랍어에서 ‘아나 포신’(anapausin)인데 ‘아나’(ana)는 ‘다시’라는 뜻이고 ‘포신’(pausin)은 영어의 ‘pause' 다음 단계의 행동을 위한 '멈춤'이란 뜻입니다. 쉬고 나면 새로운 창조를 위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안식은 새로운 창조인 것입니다. 최근에 많이 읽히는 시중 책 중에 ’행복한 멈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본래의 제목은 ’행복한 멈춤‘이 아닌 ’능력 있는 멈춤‘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하루에 단 3분이라도 멈추어 서서 행복한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이 이루어진 것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경이적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특히 요즘 연말을 맞이해서 이 말씀을 붙들 때마다 왜 이렇게 감동이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올해는 유난히 안타까운 기사들로 지면이 채워지지 않았습니까?. 미국 쇠고기 수입으로 촉발된 광우병 파동은 대립과 갈등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상처를 안겨 주었습니다. 

또 연예인들의 연이은 자살소식은 놀람과 슬픔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좀 안정이 되나 했더니 갑자기 밀물처럼 닦쳐 온 금융위기는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뭐, 이처럼 부정적인 소식들이 자꾸 들리게 되니까 개인이나 사회에 몸살처럼 번지는 현상이 우울증입니다. 이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감정적인 처리에 미숙한 면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2000년 이후 자살자가 해마다 13%씩 늘어 OECD 30개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그런데 자살자의 80∼90%가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울증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삶의 질곡이 있게 마련이고, 그 속에서 삶에 짓눌려 살다 보면 우울한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인 스펄전은 우울증으로 몇 주 동안 아예 활동도 하지 못하고 설교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욥과 예레미야는 자기의 출생한 날을 저주할 정도로 영혼의 낙망을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하는 것은 신앙과 상관없이 타락한 이 땅에 태어난 자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울증을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영적 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신앙생활 속에서 기도의 문이 막히고, 성경말씀이 모래알처럼 다가오지 않고 황량한 영적인 사막을 지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주로 환경에 시선이 갇힐 때 일어난다. 8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이기고 승리하였던 기도의 전사요, 영적인 거인이었던 엘리야나, 담대한 믿음으로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적인 거인이라도, 설사 예수님의 수제자라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대신 사건, 환경, 사람을 쳐다보면 반드시 은혜가 떨어지고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3. 그런데 보십시오. 이처럼 두려움과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지금 온갖 두려움과 또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무력감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널 부러져 주저앉은 채 안식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유를 경험하지 못 한 사람들에게 주님을 '내게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내게 배우라. 나는 마음 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어떤 사람들은 '배우라' 이 말만 들어도 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공부를 좋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배우라, 저 같은 사람은 배우라는 이야기만 들으면 심장이 뜁니다.

사실 저도 공부를 그렇게 잘 했던 사람은 아니예요. 그래서 배우라 그러면 스트레스가 생겨요. 제가 워낙 특공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공대는 특별히 공부 못하면서 대가리가 돌인 사람을 특공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게 그냥 배우라고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니까 더 스트레스가 생겨요. 혹시 우리가 이런 오해를 할까봐 다음절에서 예수님을 친절하게 이렇게 덧 붙이셨습니다. 

30절에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운 것이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내 멍에다.'란 단어는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유대 땅에 가면 두 마리의 짐승이 한 멍에 아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멍에라는 말을 달리 표현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배우고 훈련하는 것을 멍에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고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멘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배우고, 따르고, 본받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서 날마다 그 삶 속에서 예수를 드러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이 안 맞는 고통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요즘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몸살을 앓고 있습니까? 서로 맞지 않아서 오는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부간에도 맞지 않아서 사네 안 사네 고통하지 않습니까?.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이혼률이 높은 나라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한국입니다. 이혼사유 1위가 성격차이입니다. 까다로운 성격을 누가 맞추면서 살겠습니까 안 맞아서 못살겠다는 것이 이혼입니다. 그러니까 70이 다 된 부부가 황혼 이혼을 하겠습니까? 

또 어렵게 들어간 직장인데 막상 들어가 생활해 보니까 도저히 맞지가 않아요. 그러니 그 순간부터 일하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갓 입사했다가도 안 맞으면 금방 나옵니다. 뭐, 교회도 예외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 성도 한 분은 이곳에 이사를 와서 6달 동안 이 주변 교회를 다 다녀보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 인생을 맡기고 또 그곳에서 자신의 사명을 기쁘게 감당할 만한 교회에 대한 신중함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은혜가 맞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왜 우리가 이 하나님의 초청을 외면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은지 아십니까? 종교를 짐으로 생각해서 신앙을 버리고 어느 날 떠나갔던 그리고 인생의 긴 방황 끝에 돌아와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소설을 쓴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의 얘기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신앙생활 을 했습니다. 틴에이저 시절에 신앙 을 떠나갔습니다. 그의 나이 55세 가 되었을 때 그는 '신앙론'이란 글을 쓰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의 지나간 55년간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의 최초의 15년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나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했다. 안식을 알지 못하고 살아 왔다. 내가 18세 되던 나이 내 친구는 나에게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나는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 말이 진리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의 종교 가족의 종교인 기독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심지어 종교 는 속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나이 55세, 이제 나는 내가 버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아온다. 나는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나는 다시 참된 안식을 발견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방황'이라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참 우리 인생에 있어서 방황, 그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더 무서운 방황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방황입니다. 방황은 눈에 안 보여요. 남자고 여자고 마음 속에 이루어지니까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우리의 한번 뿐인 인생을 병들게 하고, 우리를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 방황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는 채 방황하는 분계십니까? 내가 일하긴 하는데 손을 대긴 대는데 내가 이 정도로 할 사람인가? 하면서 하는 일에 대해서 방황 중에 계신 분계십니까?

또 무엇인가 사업을 추진하다가, 그만 장애물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다시피 한 분들이 계십니까? 그 분은 자신에게 맡겨 준 일 조차도 끝내지 못 한 채 인생을 마칠 사람입니다. 또 10년, 20년을 한 지붕 밑에서 부부가 함께 살면서도 아직도 내가 누구하고 살지가 결정 안된 분이 계십니까? 그 방황 빨리 끝내야 합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 마져도 꺼뜨리기를 심히 원치 않으시는 그 주님의 가슴에 내 인생을 던지셔야합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그렇습니다. 어떤 인생의 짐도 심지어 내가 내 힘으로 벗어 던질 수 없는 죄 짐도 그 분은 당신이 나 대신 짊어지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내 짐을 대신 져 주실 뿐만 아니라 내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죄 많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와 범벅이 되어 사는 나로 하여금 그 죄와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할 뿐만 아니라!! 새 생명을 가진 자로서... 새 삶을 살게 하려고!! 하나님은 나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오프라 윈프리를 아시죠? 그녀는 미국 최고의 토크쇼 진행자입니다. 그녀가 진행하는 오프라 윈프리 쇼는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세계 여러나라에서 방영될 정도로 대단한 프로입니다. 그녀는 『타임』지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 가운데 뽑혔고, 기부를 많이 하기로 유명합니다. 얼마 전엔 남아공에 무려 4천만 달러를 들여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여자고등학교(오프라 리더십 아카데미)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계속 확대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라이프 스토리를 알면 더욱 놀라게 됩니다. 그녀는 사생아입니다. 할머니에게 맡겨져 학대 속에 자랍니다. 아홉 살 때 성폭행을 당했고, 열네 살 때 사생아를 낳습니다. 마약도 했습니다. 그러다 다행히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인생이 변했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조롱합니다. “당신 사생아지? 마약도 했다며? 사생아도 낳았다지?” 그러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그렇소. 그게 바로 오프라 윈프리요! 그러나 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위대하십니다!” 통쾌할 정도로 멋진 대답입니다.

우리 안에 연약함이 있습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인해 염려가 있습니다. 불안한 우리의 미래를 앞에 놓고 두려움에 갇혀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이처럼 생각하시는 그 분은 나를 포기하지도, 놓치지도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죄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 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 다가오셔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그 하나님께 나의 삶을 맡겨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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